포옹 제1권 지은이: 문순태 출판사: 삼진기획 1.우리들의 흔적 바다는 밤새도록 몸부림치며 온몸으로 울어댔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아침의 바다는 거대한 짐승의 숨소리처럼 거칠어졌다. 살아 있으면서도 싸늘한 체온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뒤척이는 바다는 아침이 되어도 잠들지 못했다. 짐승 같은 거대한 꽃의 숨소리, 파도가 스크 럼을 짜고 격렬하게 밀려오고 있는 아침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누구인가 마지막 목소리로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는 듯하다.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 짜리 두 아이를 차에 태우고 빵빵 클랙슨을 기세 좋게 울리며 아 파트의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남편이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고 흔들었을 때, 아파트 12층 베 란다에 나와있던 오정매는 남편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바닷바람이 바늘 끝 처럼 날카롭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문득 수영만 쪽의 아침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날 따라 바다의 외침은 한결 더 노여움에 떨고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난 10년 동안 날마다 거의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여전히 변하지 않는 바다의 빛깔과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변함없는 그 바다는 언제나 그녀에게 칼날과도 같은 두려 움으로 다가왔다. 바다는 분명 그녀에게 노여움과 증오의 모습을 보이면서 무서운 보복의 칼날을 세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정매는 베란다에서 거실로 들어와 두 겹의 창문을 닫고 나서 바다 색깔과는 거리가 먼 주황색의 커튼을 쳤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파도 소리보다 더 격렬한 음악을 실내가 쿵쿵 울리도록 고 음으로 키워놓고 등나무 흔들의자에 앉아 비행접시 모양의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9시, 파출부는 어김없이 이 시간이면 부저를 두 번 누른다. 알코올 중독자 남편을 가진 파 출부는 오정매보다 두 살이 아래인 서른 두 살이었으나 얼핏 보기엔 오히려 다섯 살쯤 위로 보인다. 파출부 아줌마는 간밤에 또 주정뱅이 남편한테 얻어맞았는지 왼쪽 눈퉁이에 멍이 들었다. 그녀는 멍이 든 왼쪽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오정매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는 데, 오정매의 눈에는 그 웃음이 더없이 슬퍼 보이기만 했다. 오정매는 파출부의 사생활에 대 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하였다. 그녀는 언제나 처럼 파출부에게 할 일을 대강 지시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창 밖에서, 파도 소리는 여전히 끈질기고도 정열적인 생명력으로 그녀의 침실까지 파고들었다. 그녀는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았다. 이 시간이면 언제나 잠을 잔다. 남편이 출 근하면서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가는 것을 아파트의 12층 베란다에 나가 손을 흔들어주고, 파출부가 올 때까지 잠시 음악을 듣다가, 파출부가 오면 그날 할 일을 시킨 다음 침실로 들 어가 두어 시간쯤 낮잠을 잔다. 그 다음에 점심을 먹고 헬스 클럽에 가서 한 시간쯤 땀을 빼고 돌아오면 초등학교 1학년짜리 막내 창주가 집에 올 시간이다. 오정매가 막 잠이 들려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오정매 씨 계싱교? 오정매 씨 좀 바꿔주이소" 송수화기의 목소리가 약간 다급하게 들렸다. 오정매는 하동이라는 말에 다소 긴장을 하면 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더듬어보았다. 그러나 쩌렁쩌렁 금속성이 깨지는 것 같은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얼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동에서 시외 전화를 할 사람은 그녀의 친정 오빠 한 사람뿐인데 분명 오빠의 목소리가 아닌 것이었다. "누구세요?" 오정매는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퉁겨댔다. "아, 오정매 씨가 맞능교?" 반문하고 있는 목소리에 설렘과 반가움이 적당히 버무려져 들려왔다. "그런데요 댁은 누구십니까?" "나 박문홉니다. 설마 나를 잊지는 않으셨겠지예?" 그러나 그녀는 박문호라는 사람이 얼른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잠시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 보았다. 한참을 생각해 보았으나 박문호라는 이름은 마치 소설의 주인공처럼 생소하게만 들 렸다. "박문호 모르겠능교? 고등학교 ㄸ 달리기 잘하던 지훈이 친구 모르겠능교?" "아, 문호 씨!" 그제야 오정매는 머리 속이 부스럭거리며, 달리기를 잘하던 그의 모습이 약간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에게 박문호는 지훈이의 친구로 더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어쩐 일이세요 지금은 뭘 하시죠?" 오정매는 박문호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올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궁금했 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하기루 하고요, 우선 내 이야기를 듣기만 하이소. 한 달 전에 지훈 이가 출옥을 했는데 지금 생명이 위독하다 아입니까. 그라고 그아가 나한테 자꾸 정매 씨 이야기를 하면서 한번 만나보고 싶다 안합니까. 그래 어렵게 전화번호를 알아갖고 전화 안 했능교. 벵원에서도 가망이 없다 카이 그냥 집에 누워 있음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그노마 인생이 하도 딱해서... 그러니 정매 씨 처지 알면서도 염치 불구하고 전화했다 아입 니까." 박문호는 그 말만을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오정매는 전호가 끊긴 후에도 한동안 송수화기를 든 채 우두커니 천장을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갑자기 파도 소리가 드세 어지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 처절한 통곡이, 간절한 울부짖음이, 그녀의 뼛속까지 절절이 파 고드는 듯하였다. 그러면서 그녀의 가슴이 파도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굳게 닫힌 창 틈으 로 새어 들어온 바다의 울음소리가 지훈의 마지막 울부짖음으로 처절하게 들리는 듯하였다. 최지훈의 이름은 오정매의 마음속에 탱크의 캐터필러 자국만큼이나 선명하게 지울 수 없 는 흔적으로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그녀의 마음속에 파도의 생명력만큼이나 두렵 고 끈끈하게 살아 있었다. 오정매의 가슴에 탱크의 캐터필러 자국과도 같은 흔적으로 남은 그것을, 그녀는 결코 상 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처를 입은 쪽은 그녀가 아니라 오히려 최지훈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 커다란 흔적은 양심의 종양고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박문 호로부터 최지훈이 10년 만에 죽게되어 출옥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마음속으로 그를 잊어야 한다고 소리치면서 거칠게 머리를 흔들어댔다. 오정매는 다시 잠을 이루어보려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러나 마치 치열한 전쟁터 에서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병사처럼, 과거의 기억들 속에 묶임을 당한 채 죽음과도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파출부 아주머니를 도와 설거지 를 하고 빨래도 해보았으나, 머리 속에서는 여전히 거대한 기억의 캐터필러가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사모님, 그만두시고 들어가 주무시라 카이." 파출부 아주머니는 오정매가 전에 안 하던 짓을 하자 오히려 불편해 하는 것 같았다. 그 러나 그녀는 농 속의 옷가지들을 정리하기도 하고, 찬장의 그릇들을 모두 꺼내서 닦은 다음 다시 진열을 해보기도 하면서, 머리 속에서 10년 전의 기억들을 끝없이 풀어내고 있는 그 거대한 캐터필러의 자국을 지워버리려고 애썼다. 그럴수록 지훈으로 하여 만들어진 흔적은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견디다 못해 그녀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낮에 남편한테 전화를 거는 경우는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일이었다. "웬일이야? 집에 무슨 일이 있소? 아이들한테 일이 생긴 거야?" 남편은 오정매의 전화를 받자 걱정부터 하였다. "아무 일 없어요" "여보, 저 지금 밖에 나가려고 하는데 맛있는 점심 사주실래요?" 오정매는 그녀답지 않게 애교까지 떨었다. "저녁에 애들이랑 같이 외식을 하기로 해놓고 그래? 갑자기 왜그래?" 남편은 의외라는 듯 물음표를 한꺼번에 두 개 씩이나 던졌다. 오정매는 보지 않아도 남편 이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여지껏 자신이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외식을 시켜달라거나 무엇을 사달라거나 하는 부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곧 수술에 들어가야 하니까 점심은 안 되겠어. 우리말야..." 오정매는 남편이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철컥 송수화기를 놓아버렸다. 송수화기를 놓은 지 1분도 안 되어 남편 쪽에서 전화를 걸어와, 보채는 어린아이 어르듯 하였으나 그녀는 알 았어요, 라는 한마디만을 퉁겨대고 여전히 신경질적으로 송수화기를 놓았다. 오정매는 그날 낮잠도 자지 못했으며 헬스 클럽에도 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 었는데도 시간에 쫓기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떨리고 불안했다. 그리고 그날 그녀의 생활 리 듬은 뒤죽박죽으로 엉키고 말았다. 그날따라 남편이 여느 때보다 반 시간쯤 앞당겨 가족들의 외식을 위해 차를 몰고 집에 왔 을 때도 오정매는 악몽을 꾸고 난 사람 처럼 약간은 기력이 빠져 뜨악한 얼굴로 남편을 맞 았다. 점심을 사달라고 아양을 떨던 때와는 달리 그녀는 남편을 낯선 사람처럼 대했다. 남편 이 서둘러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라고 재촉했을 때도 그녀는 멀뚱한 눈으로 쳐다보며, "나가고 싶지 않은데 그냥 집에서 먹지요" 하고 외식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는 투로 말했다. "당신, 낮에 점심 사달라는 모처럼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해서 화가 난 모양이구먼. 자, 그러지 말고 어서 나갑시다." 오정매의 남편 김원철은 그답지 않게 부드러운 말로 아내를 달랬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이지 아무데도 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아무도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깊숙한 곳으로 숨고 싶을 뿐이었다. 큰애 원주와 둘째 창주가 아파트의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빨리 나가자고 재촉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예 외출을 거부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게 생각되었다. 네 식구가 고급 레스토랑의 네모난 식탁에 둘러앉아 바닷가재요리를 먹고 있을 때도 그녀 는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고 거의 기계적으로 음식물들을 입 속에 퍼넣었다. 그녀는 한사코 남편과 두 아이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어졌다. 남편의 시선이 때로는 그녀의 피부를 뚫고 몸 속 깊숙이 파고 들어와 캐터필러 자국과도 같은 10년 전의 흔적들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신 오늘 왜 그래? 갑자기 딴 사람이 된 것 같구먼." 의사답게 남편은 그녀의 건조한 표정에서 무슨 낌새를 챈 듯 싶었다. "제가 왜요? 지금 맛있게 먹고 있잖아요" 오정매는 잘 익은 봉숭아의 씨앗 꼬투리처럼 조금만 건드려도 터져버릴 것같이 신경이 날 카로워져 있었다. 남편은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저... 저 말인데요" 음식을 거의 먹어치웠을 때 오정매는 남편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하는 순간 그녀의 머리 속에는 수갑이 채워진 채 늠연한 모습으로 잡혀갔던 당당한 얼굴과, 병석에 누워 죽어가고 있는 풀잎처럼 약한 두 모습의 최지훈이 캐터필러의 자국과 함께 떠올랐다. "하동에는 왜? 집에 무슨일이 있는 거야?" "어머니께서 편찮으신가봐요" "장모님께서 편찮으시다면 의사인 내가 가봐야 하는 게 아닌가?" 남편은 그제야 아내의 우울증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이 가셔야 할 만큼 대단치는 않으신 모양이니 일요일에 원주 데리고 다녀올게요" 오정매는 큰아들 원주를 데리고 갔다 오겠다는 말을 하고는 곧 후회하였다. 원주까지 데 리고 가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원주는 왜 데리고 가려고 그래?" 남편은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핀셋으로 원주의 이름을 꼭 집어 내어 따지듯 반문했다. "원주를 데리고 가면 든든하거든요" 그러자 초등학교 3학년짜리 원주가 외할머니 댁에 간다고 좋아했고, 둘째 창주는 시무룩 한 얼굴로 불만의 주둥이를 삐죽거렸다. "그냥 저 혼자 다녀오겠어요" 오정매는 남편의 시선을 피해 아들 원주를 보며 말했다. 외가에 간다고 좋아하던 원주의 표정이 금세 물 머금은 하늘처럼 찌푸려졌다. "장모님 병세가 위독하다 싶으면 곧 전화를 해요" "걱정하실 것 없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늘 골망골망하시니까요. 아마 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신 모양이죠. 어머닌 아버지 생각만 나면 아프시다는 것 다 아시 잖아요. 어머니 병은 내가 알아요." 오정매는 남편에게 친정에 갔다 오겠다는 말을 하고 난 뒤부터 다소 기분이 전환된 듯 싶 었다. 그제야 그녀는 아이들에게 겨울방학이 언제 시작되느냐, 방학이 된다고 해서 늦잠을 자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된다는 등 늘 아이들에게 하던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제야 그 녀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곤, "얘 원주야, 얼마 전에 어떤 학교에서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글짓기를 했는데 한 아이가 뭐라고 썼느냐 하면 말야, 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 어머니를 제일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어 른이 되어 돈을 많이 벌면 우리 어머니를 이 세상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양로원에 보내드려 야겠다고 썼다는구나. 우리 원주나 창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면서 두 아들을 밉지 않게 흘겨보기도 했다. "나는 엄마가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겠어요" 원주가 정색을 하고 말하자, "엄마가 양로원에 가기를 원한다면 양로원으로 보낸다 이거구나?" 하고 오정매가 약간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랬더니 원주는, "엄마가 원하신다면요" 하고 분명하게 다시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둘째 창주가, "나는 절대로 엄마를 양로원에 보내지는 않겠어요. 내 색시가 우리 엄마를 양로원에 보내 자고 해도 색시 말을 듣지 않겠다구요" 하고 큰 소리로 마치 제 형을 비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원주를 찔러보며 말했다. 오정매는 친정에 가기로 한 일요일이 기다려지지 않았다. 차라리 그 일요일이 영원히 돌 아오지 말았으면 하고 생각하였다. 최지훈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그와 헤어질 때보다 더 큰 고통에 짓눌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만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나야만이 지난날의 아픈 흔적이 지워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오정매는 며칠 동안 덫에 걸려 버르적거리고 있는 참새처럼 심신이 약해지는 듯한 기분이 었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악의 덫이었다. 그녀는 일요일이 다가오는 것을 내 심으로 거부하면서 용서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과거의 덫으로부터 빠져 나오려면 용서받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용서받기는 사랑받기보다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왜냐하변 용서 하는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과 같이, 용서받은 사람만이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랑하기 전에 용서해야 하고 사랑받기전에 용서받아 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용서한다는 것은 마음속에 자리잡은 증오의 뿌리를 없애는 것 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용서받는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전장 의 생채기 같은 아픔의 상처를 지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은 최지훈 한 사람만이 아닌 것이었다. 먼저 최지훈으로부터 용서받은 다음에는 남편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 서는 평생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며 고통을 겪게 될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받는 것은 용서받는 것이다. 나도 사랑받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이다. 오정매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렇게 마음 을 결정하자 조금은 그통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듯싶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이들한테도 예날 처럼 관심을 가질 수가 있었고, 남편에게도 잘해줄 수가 있었다. 이제 오정매는 조금씩 자신의 가면을 벗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가면의 껍질을 벗고 자 신의 실체를 드러내 보여주어야 할 때 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 실체가 치열한 싸움을 겪은 전장의 폐허같은 생채기라 할지라도, 그 실체야말로 거짓 없는 진실의 모습인 것이기 때문 이다. 10년 만에 최지훈의 소식을 듣게 된 월요일까지의 그 일주일 동안은 마치 10년의 세월처 럼 길고도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다. 그 일주일 동안 그녀의 머리 속에는 용서라는 말과 죄 악이라는 말이 서로 칡덩굴처럼 뒤엉켜 그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묶어버렸다. 그리고 두 가 지의 말에 묶임을 당한채 얻어낸 결론은, 결국 죄악과 용서의 뿌리는 하나라는 것이었다. 일요일을 하루 앞둔 토요일 밤, 그녀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 다 최선을 다해 남편을 즐겁게 해준다음, 남편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몸과 마음이 철저 하게 묶임을 당한 기분으로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와 아이들이 화장 실을 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몸을 뒤척인 그녀는 아침이 밝아오는 것이 점점 두려웠다. 오정매는 아침이 밝아오기 전에 집을 나서려 했다. 남편이 잠들어 있는 사이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아직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지금 가려고?" 하면서 남편이 하품을 쩝쩝 삼키며 일어났다. "그냥 주무세요. 오늘 돌아오려면 일찍 서둘러야죠" 오정매는 다소 칙칙하게 느껴지는 회색 코트를 걸치고 나서 무늬가 요란하지 않은 짙은 밤색 머플러로 목을 느슨하게 감으며 아직은 잠에 취해 있는 듯한 남편의 얼굴을 내려다보 았다. 그녀는 되도록 소박한 옷차림을 하였다. 10년 만에 형무소에서 나온 최지훈 앞에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었 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버스터미널까지 태워다줄 테니까" 그러면서 남편은 서둘러 바지부터 꿰었다. "그냥 더 주무시래두요. 전 택시 타고 가겠어요" 그녀가 말렸지만 남편은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벌써 짙은 남색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자, 이젠 됐으니 나갈까?" 남편이 그녀를 끌어안다시피 하며 침실 밖으로 밀어냈을 때 오정매는 갑자기 남편의 목을 휘감고 매달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최지훈을 만나러 가는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어졌다. 어 쩌면 그녀 자신이 최지훈을 만나러 가는 것은 남편에 대해 더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덮쳐왔다. 그녀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마음속 깊은 곳 으로부터 남편에 대한 죄스러운 생각이 줄기차게 뻗질러오름을 느꼈다. 오정매의 마음처럼 싸늘하게 굳어버린 초겨울의 냉랭한 새벽안개를 뚫고 달리는 승용차 안, 남편의 옆좌석에 앉아 있는 그녀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미지의 낯선 땅으로 가고 있는 듯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장모님 병세가 심각하다 싶으면 서둘러 돌아올 생각 말고 내게 전화를 해요. 그럼 내가 하동으로 갈 테니까 말야." 남편이 옆좌석의 오정매를 보며 말했을 때 그녀는 울컥 고마운 정이 솟구쳤다. 그녀는 한 동안 남편의 옆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한테는 참으로 분에 넘치는 남자였다. 그녀한 테는 참으로 분에 넘치는 남자였다. 이렇듯 좋은 남편을 만나게 해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 음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감사하는 마음이 클수록 죄책감으로 인한 고통도 더 커졌다. "여보, 미안해요" 오정매는 남편의 옆얼굴을 들여다보며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말했다. "무슨 말이야? 미안한 건 난데. 당신과 함께 가야 하는 건데 말야" 그러면서 남편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오정매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오정매는 그녀의 어깨로 남편의 체온을 가늠하며 슬며시 기대 앉았다. 버스에 오른 오정매는 손바닥으로 김이 서린 창유리를 닦아낸 다음 개찰구 안에 서 있는 남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정말 미안해요, 라고 말했다. 남편 도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면서 뭐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더욱 선명한 모습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얼음처럼 싸늘하게 느껴지는 창유리를 거듭 닦았다. 그리고 버스가 터미널에서 서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을 때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외쳤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서 죽을 때가지 그 말을 계속해도 모자랄 것만 같았다. 버스가 만덕터널을 빠져나가 낙동대교를 건넜을 때에야 미명의 어둠이 허물을 벗기 시작 했으며, 고통을 모르는 대지가 그 기름진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오정매는 뿌옇게 김이 서린 창유리를 닦고 은회색의 빛깔로 미동하고 있는 낙동강의 넉넉한 강물을 바라보았 다. 그 넉넉한 은회색의 강물 위로 또 하나의 강이 겹쳐흘렀다. 기억 속의 강은 섬진강이었 다. 그리고 기억 속의 강물위로 최지훈의 희미한 모습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산만하게 떠올랐다. 10년 전의 그날, 최지훈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학교 옆에 있는 오정매의 자취방으로 뛰어 들어왔었다. 부산에서 같이 대학에 다니던 때였다.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막노동과 가 정교사로 전전하고 있었다. 최지훈이 피투성이가 되어 그녀가 자취하고 있는 문간방의 들창 문을 흔들어댄 것은 밤 12시가 임박해서였다. 오정매가 들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을 때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해 땅바닥에 허물어져 있었다. 주인집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게 조심스 럽게 그를 부축하여 자취방으로 옮겨놓았을 때 본 그의 모습은 걸레처럼 참담하게 찢겨져 있었다. 그녀는 우선 가까운 약국으로 달려가서 머큐로크롬과 거즈 등 상처에 바를 간단한 약을 사가지고 와서 응급 치료를 해주면서도, 다친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오정매는 설마 최지훈이 나쁜 일을 저지르면서 다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훈이가 필시 학생운동 때 문에 다쳤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무렵 지훈은 학생회 간부를 맡고 있으면서 걸핏하면 데모 에 앞장서곤 했다. 최지훈은 얼굴이 찢겨진 채 오정매의 치료를 받고 나서 이내 잠들고 말았다. 잠든 그의 모습은 벌써 젊은 나이인데도 완전히 삶에 지쳐버린 듯싶었다. 오정매는 거즈를 감은 채 잠들어 있는 최지훈의 머리에 베개를 받쳐주고 그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비록 그가 상처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잠든 남자 옆에서 밤을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워 눈이 감기지 않았다. 한마을에 살면서 초등학교부터 중 학교,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녔고 부산에 와서도 같은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 사이 기는 해도 아직 그녀의 자취방에 와서 잠을 자고 간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그 런일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감정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해라'를 하며 지냈으 며 고향 친구 이상의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더욱이 그들의 감정이 친구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두 사람의 집안 관계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최지훈의 할아버지가 오 정매 집의 종이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두 사람의 관계를 일정한 거리에 묶어두게 된 것인 지도 몰랐다. 오정매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딸이 최지훈과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니, 두사람의 입장에서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갖 는다는 것부터가 무리인 것이다. 그런데 10년 전 가을이 누렇게 무르익어 가던 그날 밤, 오정매와 최지훈은 마침내 자신들 을 상대로 엄청난 반란을 감행하고야 말았다. 두 사람은 새벽녘에 친구의 벽을 허물고 하나 가 된 것이었다. 어쩌면 오정매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는지도 몰랐다. 최지훈의 상처를 응급 치료해 준 그녀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약해진 것이었다. 결국 그 때 문에 그녀는 최지훈의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안고 말았다.최지훈은 사흘 동안 그녀의 자취 방에 숨어있었다. 그는 화장실에 가다가 집주인한테 발각되지 않으려고 음식을 입에 넣지 않고도 사흘 동안 그녀를 완전하게 점유하였던 것이다. 최지훈은 상처를 입고 오정매의 자취방에 숨어든 지 나흘째 되는 날 밤에 집주인의 고발로 잡혀갔다. 그는 잡혀가던 그날 밤까지도 오정매를 철저하게 점유하고 있었다. 그는 잡혀가는 순간 오히려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어쩌면 오정매를 소유할 수 있었다는 자신감과 자랑스러움 때문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잡혀가면서 그는 오정매의 귀에 입을 대고, "내는 어려서부터 니를 사랑해 왔다마. 이제 내 소원을 이루었으니 내사 잡혀가는 것이 쬠도 무섭지 않구마" 하고 속삭였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오정매는 그후 다시는 최지훈을 만나지 못했다. 최지훈이 잡혀간 지 2주일쯤 후에 고향인 하동역 앞 노점에서 떡장사를 하던 지훈의 홀어 머니가 학교로 오정매를 찾아왔었다. 그녀는 지훈의 짐을 가지러 왔다면서, 그가 가정교사를 하던 집을 알려달라고 하였다. 그때까지도 지훈의 어머니는 정매에게 아기씨라고 공대를 하 였다. 몇 번이고 말을 내리라고 하였지만 입에 붙어버렸는데 어찌 하댓말을 쓰겠느냐고 하 였다. 정매는 눈물을 질금거리는 지훈의 어머니를 그가 가정교사를 하던 아미동 고개밑의 청대문 2층집까지 모시고 가서 책이며 헌 옷가지들을 챙겼다. 지훈의 어머니는 아들의 짐을 콘 보자기에 싸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지훈의 존재는 그 의 어머니 삶 자체였던 것이다. 지훈의 어머니는 젊어서 남편을 잃고 단 산 점의 혈육인 지 훈이를 위해서 온갖 고생 다 겪으며 살아왔다. 그런 어머니를 울린 지훈이가 너무 야박스럽 게 생각되어 만약 그가 옆에 있다면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때 정매는 지훈이가 자신을 파괴시키기 위해 예기치 못할 정도로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것은 그의 어머니를 배신한 무서운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지훈에 대해서 크게 실 망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다친 것이 아니라 강도짓을 하다가 다쳤다고 하는 사실은 그녀 를 참으로 분노케 만들었다. 더욱이 정매가 실망한 것은 자신이 잡혀갈 줄 알면서도 무책임 하게 그녀를 범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오정매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지훈의 짐을 챙기다가 우연히 일기장의 한 부분을 읽 고 놀랐다. 우연히 펼쳐본 지훈의 일기장에 '나의 할아버지는 종이었고 나의 아버지는 살 인 자였다. 나도 살인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대목이 씌어 있는 것이었다. 정매는 너무 놀라 그 다음을 더 읽을 수가 없었다. 정매는 지훈의 할아버지가 그녀 집의 종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살인 자였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지냈다. 지훈의 어머니가 아들의 짐을 챙겨 눈물 바람을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 고 자취방에 돌아온 오정매는 밥도 먹지 않고 밤새도록 울었다. 지훈의 어머니가 너무 불쌍 했다. 진주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하동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오정매는 읍에서 다시 차를 갈아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미점으로 가지 않고 택시를 잡아 남해안 고속 도로가 뻗은 섬진강 상류로 거슬러 화개 쪽으로 올라가자면 중간 지점에 자리잡은 미점이라 는 곳이었으나, 지훈의 친구인 박문호가 교편을 잡고 있다는 남해는 그 반대쪽이었다. 오정매는 박문호가 근무하는 중학교 교문 앞에서 택시를 멈추었다. 체육 교사인 박문호는 마침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공차기를 하고 있었다. 정매는 쉽게 그를 알아보았으나 문 호는 그녀가 교문 옆 미끄럼대 옆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는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미끄럼대 옆에 서서 아이들이 공차기 하는 모습을 구경 했다.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운동장에 초겨울의 명주실 같은 햇살이 넉넉하게 쏟아져내 리고, 뿌옇게 흙먼지를 일으키며 공차기를 하는 중학생들의 모습에서 그녀는 오랜만에 생동 감 넘치는 삶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눈부신 희망과 꿈의 빛깔로 보였다. 비록 앙상한 나목이었지만 운동장을 빙 둘러싼 플라타너스가 그 아이들의 삶을 한껏 싱그 럽게 해주고 있는 듯싶기도 하였다. 운동장의 동쪽 모퉁이에서는 여학생들이 편을 갈라 배 구를 하고 있었다. 시골 중학교 교정에서 학생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오정매 는 문득 체육 시간만 되면 지훈과 함께 꾀병을 앓곤 했던 일이 생각났다. 문호는 체육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오정매를 알아보았다. 그는 아이들을 해산시킨 다음, 미끄럼대 쪽으로 서둘러 오더니, "정매 씨 아니가. 정매 씨가 예까지 올 줄은 몰랐구마." 하면서 초겨울인데도 갈색으로 그을린 얼굴에 반가운 웃음을 담뿍 흘렸다. 정매는 그냥 조금은 반갑고 조금은 공허한 미소를 희미하게 띠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잠시 후에 학교에서 약간 떨어진 시골 다방에 마주앉아 커피를 시켰다. 그들이 대 학 시절 때 유행했던 노래가 초겨울 대낮의 어두컴컴한 실내를 촉촉하게 적셔주고 있었다. "부산에서 오는 길이어요" 정매가 10년 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에게 던진 첫마디였다. 그녀는 학교에서 다방까지 오는 동안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계속 문호의 이야기만 들 었다. 문호가 다방까지 오는 동안에 한말이란 주로 지훈의 병세에 관한 것이었다. 문호의 말로는 전화에서도 잠깐 비쳤었지만, 지훈은 소생할 가망이 전혀 없으며 나무가 시들 듯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죽어가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정매 씨가 오신 것을 알면 아매 지훈이 그마 벌떡 넘어질 거고마" 문호가 단숨에 막걸리 마시듯 커피잔을 후루룩 비우며 말했다." "문호 씨하고 같이 가고 싶은데요" 정매는 혼자서 지훈이를 찾아갈 용기가 없어 문호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박문호는 마침 오후 수업이 없다면서 조퇴를 하고 오정매와 동행을 해주기로 했다. 그들 은 남해에서 느지거니 점심을 먹고 하동행 버스에 올랐다. 박문호는 버스에서 조심스럽게 오정매의 가정이야기를 이것저것 물었다. 아이는 몇이고 남편과의 사이는 어떻느냐는 둥 그 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것까지도 물었다. 정매는 그냥 건성으로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지훈씨는 복역을 끝내고 출감을 한 것이 아니로군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정매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어 지훈에 대한 것을 물었다. "지훈인 십삼 년 선고를 받았지 않았습니꺼. 아직은 삼 년이 더 남았는데 워낙 병세가 악 화되니 죽을 것 같아 집으로 보낸 거지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병이 낫게 되면 다시 감옥으 로 들어가서 나머지 삼 년 형기를 마쳐야 하지 않겠능교" 박문호의 그 말에 오정매는 갑자기 숨쉬기가 답답해진 듯한 그분이었다. 그녀는 다시 부 산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제 와서 최지훈을 만나서 어쩌자는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최지훈의 죄명은 강도 미수에 과실 치사였다. 그는 10년 전 모의 권총을 들고 부산 모 재 벌의 저택에 침입했다가 붙잡혔다. 그리고 경찰에 인계되기 직전에 도망을 치던중, 옥상에서 그를 붙들려는 경비원과 한바탕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경비원이 그만 옥상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대학생 살인 강도'라는 타이틀로 한동안 신문의 지면을 장식하였으며 가난 한 대학생이라는 것 때문에 사회적으로 동정을 사기도 하였다. 오정매는 그때 단 한 번도 면회 를 가지 않았으며 재판정에도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선고공판이 끝난 후 지훈은 형무소 안에서 한달에 한 번꼴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왔으나 그녀는 답장을 해주지 않았다. 그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한결같이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 러나 지훈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내용이나 참회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녀는 지훈이 왜 모의 권총을 들고 강도질을 하려고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가 난 때문에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막연하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으나, 공사판의 막노동이나 가정교사를 하면서 자신을 잘 이겨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매는 문득 그의 일기장에 씌어있던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나의 할아버지는 종이었고 나의 아버지는 살인자였다. 나도 살인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구절이 화살처럼 그녀의 심장에 박혔다. 그녀는 어쩌다가 지훈을 떠올릴 때마다 그 구절이 환형동물처럼 살아서 그녀의 머리 속에 서 꿈틀거리곤 하였던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엉뚱한 짓거리를 했죠?" 오정매는 자울자울 졸고 있는 박문호에게 따지듯 물었다. "예?머라고 했습니꺼?" 박문호가 잠에 취한 얼굴로 눈을 씀벅거리며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그는 오정매가 무엇 을 묻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눈빛이었다. "지훈 씨가 뭣 때문에 그런 죄를 저질렀는지 이해가 안 가요" 그제야 박문호는 정매가 무엇을 그에게 물었는지 알아차렸다. "글쎄요. 마, 불만이 폭발한 거겠지예. 마, 자신을 포기해 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그 무렵 그노마 고민이 많았다 아닙니까. 그래 술도 억수로 퍼마셨지예. 마, 누구에게나 그런 불만과 고통의 계절이 한 번씩은 다 있는거 아닙니까. 마, 지훈이 그마는 누구나 한 번씩은 앓게 되는 그 불만과 고통의 계절을 무사히 넘기지 못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마가 결코 돈 이 필요해서 그런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구마" 박문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잠시 정매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그녀는 박문호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며, "바보 같은 짓이었어요, 결국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지 않아요"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일을 저지르기 일주일 전쯤에 더럽게 술에 취해 지한테 왔습디다. 지한테 와서 하는 말이, 정매 씨를 사랑하는데 차마 고백을 하지 못한다면서 우쨌으면 좋겠느냐고 드럽게 눈 물을 흘리면서 퍽퍽 웁디다.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정매 씨를 사랑한다면 용기를 내서 고백 을 하라고 말해 줬지예. 지훈이는 내 말을 듣더니 당장 정매 씨를 찾아가서 고백을 하겠다 고 했습니다. 근데 그때 지훈이가 정매 씨한테 고백을 했능교?" 정매는 박문호의 물음에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지훈이가 피투성이가 되어 찾아오기 일주일 전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에 만취된 그가 그녀의 집 앞에 쓰러WU 있던 것을 발견한 일이 떠올랐다. 정매가 밤늦게 감기약을 사려고 대문을 열고 나 가다가 문 밖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지훈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 그녀는 그가 지훈인 줄 을 모르고 기겁하여 소리를 내질렀고, 그 소리에 놀란 집주인 아저씨가 플래시를 들고 뛰어 나와서 쓰러져 있는 남자의 얼굴을 비춰보았을 때에야 그가 지훈이라는 것을 알고 경악했 었다. 정매는 사촌 오빠 되는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주인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그를 그녀 의 방으로 옮겼다. 그녀는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그렇다고 술에 취해 대문 밖에 쓰러져 있는 지훈을 모른 척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훈은 정매의 방에 누워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꿈속에서 처럼 정매의 이름만을 여 러 차례 불러댔다. 그날 밤, 정매는 지훈이 술에서 깨어날 때까지 불을 켜놓은 채 방 한구석 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새웠다. 지훈은 새벽에야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더니 무릎을 세 우고 앉은 채 고개를 처박고 잠이 든 정매를 흔들어 깨웠다. 그는 거듭 미안하다는 말만 되 풀이했다. 그러고 나서 한참 동안 뚫어져라 하고 정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무슨 말 인가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다시는 정매 앞에 나타나지도 않을게. 멀리 떠나고 싶어. 정매를 볼 수 없는... 아주 멀리 떠날 생각이야.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아." 지훈은 혼잣말처럼 말하고 나서는 홀연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로부터 일주 일쯤 후에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피누성이가 되어 정매를 찾아 와서 그녀를 점유하고 나서야, "내는 어려서부터 니를죽도록 사랑했다마. 이제 소원을 이루었으니 잡혀가는 것이 쬠도 무섭지 않고마." 하고 속삭였을 뿐이었다. "그마 용기가 없는 멈스마라. 내도 고백을 못했을 끼라 짐작했습니더. 그러고 보이, 그마 가 엉뚱하게 강도 미수가 돼서야 정매씨한테 고백한 기라. 지지리도 용기 없는 놈." 오정매는 박문호의 그 말에 섬뜩 놀랐다. 박문호의 말마따나 지지리도 용기가 없는 지훈 은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고 그녀한테 찾아와서 그녀를 범하였고, 그녀를 볼 수 없는 감방에 들어앉아서 편지를 통해 마음놓고 사랑을 몇 번이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의 강 도 미수 사건은 일종의 사랑의 고백 행위였단 말인가. 그렇지만 정매는 그런 지훈을 도무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그렇다면 지훈은 바보 중의 바보가 분명한 것이었다. "그마가 정매씨를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했다는 사실만은 아셔야 할 낍니다. 아니, 자신 의 인생을 포기해서라도 정매 씨만 사랑할 수 있다면 행복하다고 생각했을 낍니다. 내가 면 회를 갈 때마다 그마는 정매 씨 말을 하면서 드럽게도 울었지요. 그러면서 머라고 한 줄 아 십니꺼. 한번은 면회를 갔더니 그럽디다. 정매 씨가 자신을 사랑하니께 자기는 마 아무것도 두렵지가 않다고, 후회스럽지도 않다고 합디다." 박문호는 말을 마치고 나서 고개를 외면해 버렸다. 정매도 차창밖 멀리 시선을 던진 채, 그녀의 마음처럼 황량하기만 한 초겨울의 쓸쓸한 들판을 바라보았다. "근데 그후로 왜 정매씨는 좀더 기다려주지 않았능교?" 박문호가 추궁하듯 물었다. 박문호의 말대로 오정매는 최지훈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를 기다릴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최지훈은 잡혀가는 순간까지도 그녀에게 기다려달라 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물론 그녀가 지훈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그로부터 기다려달라는 부 탁을 받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는 그때 그를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오정매는 여전히 시선을 찬바람이 휩쓰는 쓸쓸하기만 한 초겨울의 들판을 바라보며 공허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정매 씨가 너무하신 겁니더" 박문호가 말했다. 오정매는 그런 박문호의 말에 변명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기실 그녀에 게는 변명할 만한 구실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만약 변명을 하게 되면 자신이 더욱 초라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요, 제가 너무 했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그런 끔찍한 죄를 저지른 그를 기 다릴 수가 없었어요. 저는 그이가 무서워졌으니까요. 그의 일기장을 본 후로는 더 그랬어요. 그때 저의 심정은 아무도 이해 못할 거예요. 정말 무서웠어요" 정매는 정말이지 그가 무섭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두려움에 떤 것은 아마도 감옥에 들어가 있는 최지훈보다 오정매 쪽이 더했는지도 몰랐다. "정매씨는 지훈이를 사랑하지 않았능교?" 잠시 후에 박문호가 다시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것은 그녀가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최지훈이 붙잡혀간 후로 그녀 자신에게 몇 번이고 그 질문을 던졌었다. 그러나 명쾌한 대답을 얻어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친구였어요. 정말 좋은 친구였어요" "친구였다고요?" 박문호가 추궁하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말을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그녀는 박문호에게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기야 그녀도 지훈 이 붙잡혀가던 무렵 사랑이냐 우정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무수히 스스로에게 묻고 저울질 해 보았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분명한 대답을 얻지 못했던 것 자체가, 바로 사랑의 감정이 어느 정도 깊게 배어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친구였을 뿐이라니 실망했습니더. 지훈이가 이 말 들으면 살고 싶은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겝니더" 박문호의 그 말끝에는 그러니 그 말을 지훈에게 하지 마시오라는 대목이 생략된 듯싶었 다. "이미 십 년 전의 이야기예요" 오정매는 과거라는 시간의 무덤 속에 자신이 파묻히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지훈을 찾아가고 있는 것은 과거라는 시간의 무덤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것이었 다. "그건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더. 사랑이라 카는 건 시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 는 기라. 시간이라 카는 것은 사랑을 속박하는 굴레가 아니고 자유를 부여하는 날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더. 나는 되레 시간이 흐를수록 지난날의 사랑의 기억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디다. 십 년 전이면 어떻고 백 년 전이면 어떻습니꺼." 오정매는 박문호의 그 말에 대해서도 변명도 항의도 하지 안ㄴㅎ았다. 그의 말마따나 사 랑의 감정은 시간과는 무관한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지훈이가 감옥에 들어간 지 두 달도 안 되어 정매 씨가 부 랴부랴 결혼을 해버렸다는 사실이라요. 정매 씨의 결혼이 하필이면 지훈이가 십삼 년 형을 선고받은 직후였다는 것을 기억하시지예? 난 그때 지훈이를 면회 가서 차마 정매씨가 결혼 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더. 정매 씨가 결혼했다는 것을 말해 준 것은 그로부터 이년 이 지난 후였구만요" 박문호의 말대로 정매는 지훈이가 13년 형을 선고받은 직후 결혼식을 올렸었다. 지훈이가 붙잡혀간 후 두려움과 고통의 나날을 보냈던 정매는 몸에 이상이 있음을 알고 더럭 겁이 났 었다. 그녀는 고민하던 끝에 광주 남도대학병원 외과 과장의 부인인 그녀의 언니를 찾아가서 지 훈이와의 일을 털어놓았다. 정매의 고백을 들은 언니는 그녀를 꾸짖는 대신 산부인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늙은 산 부인과 의사로부터 임신했다는 말을 들었다. 언니가 낙태를 시키려고 하였으나 정매가 이를 거절했다. 낙태를 시키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최지훈에 대해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언니는 정매에게 끊임 없이 낙태를 강요하면 서 일방 결혼을 추진하고 있었다. 정매의 신랑 후보는 형부가 재직하고 있던 대학병원의 인턴인 지금의 남편이었다. 형부의 제자가 되는 지금의 남편 김원철도 정매에게 호감을 갖고 접근해 왔다. 결국 정매는 최지훈 이 징역 13년의 선고를 받은 다음날 김원철과의 결혼을 승낙했으며, 그로부터 115일 후에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정매는 김원철과 결혼식을 올린 지 8개 월 만에 아들 원주를 낳은 것이었다. 정매와 최지훈과의 사이를 알 턱이 없는 남편 김원철 은 그녀를 한동안 팔삭둥이 엄마라고 놀려댔을 뿐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마는 곧 죽을 것 같구만요. 아마 앞으로 두서너 달이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의사 말도 그렇고..." 박문호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한참 있다가, "기왕에 죽을 사람이니까 좋은 말만 하이소. 듣기 좋은 말을 한다고 해서 손해볼 건 없지 않겠능교 그라이 그마 듣기 좋은 말만 하시이소" 하고 말했다. 박문호는 정매가 최지훈에게 거짓이라도 좋으니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기를 바란다는 투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정매는 지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기실 그녀가 지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생각이었다. 그녀는 지훈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해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무슨 병이랍니까?" 버스가 남해대교를 건너고 있을 때 정매가 물었다. "첨에는 간염인 줄 알았는데 간암이랍니다." 박문호의 대답은 사무적이리만큼 냉엄했다. 박문호의 대답에 정매는 한동안 할말을 잃은 채 우두커니 차창 밖만을 바라보았다. 광양만의 바다가 얼음처럼 차갑게 그녀의 시야를 파 고들었다,. 정매는 문득 슬픈 기억의 안개처럼 차가운 느낌으로 펼쳐져 있는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 한 인간의 생명의 부질없음을 생각했다. 그녀는 살아 있음보다 더 큰 신의 선물이 없다는 어느 신부님의 말을 떠올리면서 공허하게 냉소를 삼켰다. 그 부질없음의 삶 속에서도 미움 과 사랑에 매여 허우적 거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냉소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소설의 시작과 마지막에 비유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니라고 믿었다. 한 권의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이 소설은 참 재미있다거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참 비극적 이다,라고 하는 것으로 한 인간의 생애는 규정지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만큼 진실한 인생이었냐든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살았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매의 그 같은 생각은 어쩌면 그녀 자신의 삶을 합리화하기 위한 억지일지도 모른다. 그녀 는 지금 그녀의 머리 속에서 최지훈이라는 남자의 기억을 아무 흔적도 없이 완전하게 지워 버릴 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이 결코 불행하다거나 무슨 문제가 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 을 터였다. 사실 박문호로부터 최지훈의 소식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걱정이라고는 1,2년 전부 터 체중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과 둘째 아들 창주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제가 지훈 씨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제가 무엇을 도울 수가 있지요?" 정매가 뚜벅 물었다. "글쎄요 마, 지훈이 그마를 만나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꺼. 그밖에 머를 어 쩌겠습니꺼. 마, 더 바란다면... 그마가 정매 씨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죽을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더" "치료비를 좀 보태주면 어떨까요?" "돈을요? 행여 그런 생각은 마이소. 지훈이한테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그런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매 씨의 마음이 아니겠능교" "어떤 마음 말입니까?" 정매는 박문호가 말하는 의미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반문했다. "만나보시면 아시겠지만 지훈이는 지금 꼭 열 살 먹은 어린아이같다 아닙니꺼. 정매 시는 서른네 살의 어른을 만난다는 생각을 버리시고 열 살짜리 어린아이를 만난다고 생각하시이 소. 그마는 십 년 동안 형무소 살이를 한 사이 완전히 어린아가 되어뿌렀다 이거라요. 그러 이 그마 듣기 좋은 말만 하시라 카는 거 아닝교" 정매가 박문호와 함께 하동에 도착했을 때는 낮이 짧은 겨울인데도 해가 많이 남아 있었 다. 그들은 버스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지훈의 집은 정매. 최지훈. 박문호 들이 함께 다녔 던 고등학교의 교문 앞을 지나, 읍내 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정매는 박문호를 따라 지훈의 집까지 가는 동안 너무 불안해 두 다리가 무거워지고 목구 멍이 후끈거렸다. 그녀는 몇 번이고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면서 말없이 걸었다. 그 녀의 마음은 10년 전 지훈이가 13년 실형 선고를 받은 것을 알고, 김원철을 찾아가 결혼을 승낙했던 그 순간보다 더 걷잡을 수 없이 마구 떨렸다. 그들은 밭둑길을 지나 닭똥 냄새가 진동하는 양계장 모퉁이를 돌았다. 양계장 건너편 야 트막한 언덕빼기에 창고 같은 단칸 블록집이 겨울의 찬바람 속에 웅크리고 엎뎌 있는 것이 보였다. 정매는 직감으로 탱자 울타리에 둘러싸인 그 블록집에 지훈의 모자가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심정으로 살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다 왔습니더. 지훈이 그마 정매 씨를 보면 깜짝 놀래 벌떡 일어날 게고마." 벽돌 크기의 큼직큼직한 돌로 계단을 만들어놓은 야트막한 언덕빼기를 오르면서 박문호가 말했다. "지훈 씨 어머님도 집에 계시겟지요?" 정매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탱자나무 울타리에 앉아서 시끄럽게 조잘거리고 있는 참새떼 를 보면서 물었다. 그녀는 지훈의 어머니를 만나는 것조차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지훈이가 붙잡혀간 후 몇 번 지훈의 어머니가 정매를 찾아와서는 아들의 소원이라면서 한 번만 면회 를 가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물론 정매는 지훈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었다. "아마 지훈이 어머니는 집에 계시지 않을 거라요" 박문호가 선물로 산 과일 꾸러미를 다른 손으로 바꿔들며 얼핏 정매를 돌아다보았다. "왜 계시지 않죠?" "지훈이 어머님, 진작 떡장사 그만두시고 역전에 있는 식당에서 일을 하신다 아닙니꺼. 아 들이 그 지경이라고 해서 입을 봉하고 살 수는 없지 않겠능교. 아마 지훈이가 죽은 후에도 지훈이 어머니는 그냥 그대로 역전 식당에서 일을 하실 겝니더." 정매는 집에 지훈의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대행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지훈이뿐 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한테까지도 죄를 짓고 있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다 왔어예. 마, 지훈이 그마 뒤로 벌떡 넘어질 거인데..." 박문호는 남해에서 정매를 만난 후 벌써 그말을 열 번도 더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는 지 훈이가 정매를 만나는 순간을 상상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훈의 집은 대문도 없었다. 디긋자 모양으로 탱자 울타리가 둘러싸고 있을 뿐 집의 옆구 리 쪽이 휑하니 뚫린 채였다. "그냥 정매 씨 혼자 들어가이소. 그래야 지훈이 그마가 더 놀랠 것 아닙니꺼" 탱자 울타리가 터진 불록집의 옆구리쯤에 이르자 박문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박문호는 정 매를 만난 후 처음 그녀에게 미소를 보였다. "문호 씨가 먼저 들어가세요" 정매는,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지훈 씨를 놀라게 해주려고가 아니랍니다. 난 지훈 씨 때 문에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온 것이랍니다, 라고 말하려다 차마 그렇게 는 할 수가 없어서 박문호에게 먼저 들어가 달라는 부탁을 했던 것이다. "같이 들어가시지예" :아닙니다. 문호 씨 먼저 들어가셔서 제가 왔다고 미리 알려주세요. 그래야 저를 보고 덜 놀래실 테니까요. 환자들에겐 크게 놀라는 것이 좋지가 않아요" 정매는 지훈을 위하는 척 말했다. 그러나 기실은 지훈의 앞에 나타난다는 것이 어쩐지 두 렵고 섬뜩한 생각이 들어 잠시라도 마음을 다독거려 보고 싶었던 것이다. "역시 정매 씨는 어쩔수 없는 의사 부인이시라요. 환자가 놀라는 것은 좋지 않겠지 싶네 예. 그라믄 내가 먼저 들어가서 지훈이한테 정매 씨가 왔다는 말을 할 테니 한 오분 있다가 내가 들어오시라 하믄 그때 들어오시이소" 박문호는 그렇게 말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정매가 생각하기에 박문호는 예나 지금이나 바보스러울 정도로 단순한 데가 있었다. 정매는 박문호가 큰 소리로 지훈을 부르는 소리와 방문 열리는 소리를 거의 동시에 들었 다. 그녀는 울타리 밖에 까치발을 하고 서서 탱자나무 으듬지 너머로 지훈의 집 안을 넘겨 다보고 있었다.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초라한 집이었다. 집 뒤꼍에는 늦배추가 잎이 노랗게 된 텃밭이 을씨년스럽게 초겨울 하오의 햇살을 받고 있다. 단지 닭 몇 마리가 눈에 띌 뿐이었다. 토마루에는 방금 들어간 박문호의 검정색 구두와 지훈이의 것으로 생각되는 초록색 플라 스틱 슬리퍼가 병들어 앓고 있는 지훈의 모습처럼 초라하게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었다. 정매는 초록색의 플라스틱 슬리퍼에서 10년 전 지훈의 모습을 찾아보려 했지만, 이내 한낱 부질없는 감정의 사치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정매는 마음을 가다듬고 지훈을 만날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그를 만나서 어떤 말을 해야 할 것인가도 생각해 보았다. 첫마디를 오랜만이에요, 그 동안 고생이 많으셨지요, 이렇게 다 시 만나게 되어 기뻐요, 어서 병이 나으셔야지요, 그 동안 죄송했어요,라고 말한다는 것은 너무 상투적인 인사치레인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 말 않고 앉아 있다가 나올까? 아니야,그래도 무슨 말인가는 해야겠지. 나를 용서해 주셔요, 그리고 저를 잊으세요, 이렇게 말할까? 아니지, 박문호가 지훈에게 듣기 좋 은 말만 하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지훈 씨를 잊지 않고 있었어요, 잊으려고 애를 써봤 지만 잊을 수가 없었어요, 앞으로도 영원히 저는 지훈 씨를 잊지 못할 거예요, 이렇게 말할 까? 아니야, 그냥 간단 명료하게 한마디만 하는게 좋을 거야.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 오랜만이에요, 힘을 내세요, 이 말만 하기로 하자. 정매는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 천천히 지훈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방에 들어간 지 10여분이 지나도록 박문호에게서 들어오라는 말이 없었다. 초겨울의 짧은 해가 하루를 마치기 위해 서두르고 있었다. 햇살이 엷어지면서 바람이 거 칠어지기 시작했다. 오정매는 오랫동안 밖에 서 있었던 탓으로 다리가 빳빳해지면서 어깨가 조금씩 떨려왔다. 그녀는 마당 안으로 몸을 들여놓은 채, 방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 다. 그러나 박문호는 좀처럼 방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박문호가 방안으로 들어간 지가 어느덧 한 시간이나 흘렀다. 오정매는 방안에서 무슨 일이 잘못되지나 않았을까 하는 초조한 생각 으로 몇 번이고 손목시계와 방문을 번갈아보았다. 더럭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혹시 그 사이에 최지훈이 죽은 것은 아닐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오정매는 박문호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가야겠다고 작정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바로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박문호가 침통한 표정으로 토마루로 내려섰다. 그녀는 박문호 의 어둡고 절망적인 표정을 보는 순간, 잠시 전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지금까지 최지훈에 대해서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연민과 서러움의 감정 이 울컥 뻗질러올랐다. 그녀의 그런 감정은 10년 전 지훈이 붙잡혀갔을 때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석양을 재촉 하는 초겨울의 쌀쌀한 바람에 흔들리는 탱자나무 가지의 흔들거림마저도 그녀의 눈에는 슬 픈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보였다. 순간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안 되겠심더." 박문호가 구두에 발을 꿰어 질질 끌며 정매 옆으로 다가오더니 무턱대고 그녀를 마당 밖 으로 끌었다. 정매는 박문호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상반신을 가볍게 흔들었다. "참, 알다가도 모르겠고마. 우째 마음이 변했는지 모르겠다 카이" 박문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 오정매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변하다니 무슨 말이에요?" 오정매는 절망적으로 일그러진 박문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정매씨를 만나지 않겠다 안합니꺼. 그라이 내가 얼마나 답답하겄소" "네? 그럼 지훈 씨는..." 오정매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스스로 놀랐다. "할 수 없습니더. 그만 돌아가시이소. 내가 지금까지 아무리 사정을 해도 싫다 카는 기라" "지훈 씨가 그랬습니까? 내가 왔다는데도 만나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렇다니께요" 박문호가 신경질적으로 말하면서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내가 들어가 보겠어요" 정매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토마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 됩니더. 그마가 나한테 통사정을 했심더" 박문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정매의 앞을 막아섰다. "왜? 무엇 때문에 만나지 않겠다는 거예요?" 오정매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박문호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녀는 최지훈이 자신을 만나지 않겠다고 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박문호의 이야기로는, 최지훈은 형무소에서 나와 집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그녀를 한 번 만 만나게 해달라고 몇 번이고 간절하게 부탁을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최지훈이었는 데, 그녀가 어려운 걸음을 하여 만나러 왔다는 것을 알 터인데도 그대로 돌아가라니 최지훈 의 변덕스러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가 않다고 합디더" 박문호는 궁색한 얼굴로 오정매를 흘깃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오정매가 생각하기에 초라 한 것은 최지훈만이 아니라, 그녀 자신도 최지훈 못지않이 허술하고 부끄럽고 남루했다. 그 녀는 지금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혼의 초라함에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가장 큰 부끄러움을 느낄 때는 남자로부터 만나기를 거절당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는 마음이 떨리는 실망과 분노를 느꼈다. "지훈 씨건강 상태는 어때요?" 정매는 부끄러움과 초라함과 분노를 한꺼번에 억제하면서 한껏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물었 다.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는 아프리카 기아 난민 모습같이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아닙니꺼. 얼굴은 타다 만 장작개비 모양으로 까맣고 눈은 십리나 들어갔고... 그런데도 정신만은 초롱 초롱합니더. 무신 아가 그리 기억력이 좋은지 지난 이야기를 영화 필름 돌리듯이 좔좔 까발 리는 기라." 오정매는 최지훈을 만나보지 않더라도 지금 방안에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육체가 시들어가는 만큼 정신이 맑아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 각했다. 죽기직전 인간의 정신이야말로 유리 구슬만큼이나 투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 돌아가이소" 박문호가 다시 미안하다는 표정을 해 보이며 말했다. 그렇지만 오정매는 이대로 그냥 돌 아서고 싶지가 않았다. 다시 최지훈을 만나러 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저는 다시 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 오늘 꼭 만나고 가겠어요" "다시 오실 필요도 없을 것 같구만요"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오정매는 그러면서 어둠이 깔려오기 시작하는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로 시선을 멀리 던졌 다. 갑자기 마음이 공허해졌다. 그녀의 마음속에도 어둠의 끈끈한 점액질이 부걱부걱 괴어오 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오정매는 오랫동안 탱자나무 울타리 쪽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자, 그만 돌아가입시다" 박문호가 그녀를 재촉했다. 그녀는 차마 용기있게 박문호를 뿌리치고 혼자 최지훈이 누워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10년이라는 긴 세월은 오정매와 최지훈의 사이를 마 치 건널수 없는 강, 아니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이승과 저승의 공간으로 갈라 놓은 것같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내일 다시 와보겠어요" 오정매는 한숨을 섞어 말하고 몸을 돌려세웠다. "내일 다시 오실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능교" 갑자기 박문호의 태도가 냉정해졌다. 그는 기분이 상할 정도로 오정매를 낯선 사람처럼 대했다. "어쩌면 지훈이 그마 생각이 옳을지도 모르겠네예" 박문호가 정매 먼저 둔덕길을 내려가며 말했다. 그는 정매를 의식하지 않고 걸음을 빨리 했다. 필시 그는 큰길까지 정매를 데려다주고 나서 다시 최지훈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 녀는 짐작하였다. "어차피 죽어가는 길에 사랑도 없는 정매 씨를 만나서 멋할 끼고? 사랑하지 않는 죄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라 카는데..." 박문호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밭둑길을 겅중거리며 걸어가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 다. 정매는 그가 그녀 들으라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도 못 들은 척 입을 열지 않았다. "그만 지훈 씨에게로 가보시지요. 전 혼자 가겠어요" 학교 앞에 이르자 오정매가 큰 목소리로 그녀보다 십여 보쯤 앞서 걷고 있는 박문호의 덜 미를 잡아끌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서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친정으로 가실랍니꺼, 아니면 부산으로 돌아가실랍니꺼?" 박문호가 여전히 냉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정매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기실 그녀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훈의 마음이 변하면 다시 정매 씨한테 연락을 하겠심더" 박문호의 그 같은 말에 오정매는 떨떠름한 심정으로 냉소를 삼켰다. 그리고 그녀는 마음 속으로 두 번 다시 지훈을 만나러 오지 않으리라 결심햇다. 죽게 된 지훈이가 그녀를 만나 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니, 10년 전 그왁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지고,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녀의 나머지 삶이 불행으로 끝난다 할지라도 그를 만날 생각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오정매는 그렇게 마음을 독하게 여미고 나자 차라리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하겠심더" 정매 쪽에서 반응이 없자 박문호가 약간ㅇ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만 들어가세요" 오정매는 사무적으로 말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생각도 없이 학교 담 모퉁이를 안고 천천히 걸었다. 다시는 최지훈을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는데도 발걸 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부산에서 새벽차를 타고, 그것도 남편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먼길을 찾아왔다가, 최지 훈을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선 오정매는 마치 배신을 당한 사람처럼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오정매는 최지훈의 집에서 곧장 역으로 갔다. 부산행 열차가 도착하려면 세 시간이나 기 다려야만 했다. 그녀는 차표도 사지 않고, 을씨년스럽도록 고즈넉한 역 대합실의 나무 의자 에 처절하고도 절망적인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훨쩍 열린 대합실의 문 사이로 어둠에 싸인 역광장이 희끄무레한 수은등 불빛에 배신당한 사람의 마음처럼 황량하게 비쳐 보였고, 광장 맞은 편에는 간이 식당들이 낡은 영화의 선전 포스터처럼 출렁여 보였다. 간이 식당 옆에는 검정색 승용차 한 대가 따정벌레처럼 엎뎌 있 고, 그 앞으로 행인들이 몽유병자와도 같이 흐느적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오정매는 어둠이 가득 쌓인 역광장 모퉁이를 바라보다 말고 그곳에서 떡장사를 했던 최지 훈의 어머니 모습을 떠올렸다. 정매는 남녀 공학의 같은 반이었던 최지훈과 함께 그의 어머 니를 만나러 왔다가 자주 떡을 얻어먹곤 하였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지훈의 어머니는 아들이 엉뚱한 사고를 저지로고 죄수복을 입게 되었을 때까지 역 앞 모 퉁이에서 떡장사를 하고 있었다. 오정매는 대합실에서 광장으로 나와 어둠의 한가운데 섰다. 읍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던 시절의 기억들이 역광장의 귀퉁이와 땅바닥에 어둠처럼 끈끈하게 괴어 있다 그녀가 다가서자 조금씩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다. 최지훈과 함께 그의 어머니를 만나러 왔던 일이며, 부산에서 대학을 다닐 때 그와 함께 대합실의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아서 열차를 기다렸던 일, 방학이 되면 나란히 차에서 내려 광장을 가로질러 모퉁이 길바닥에 앉아 떡을 팔고 있는 지훈의 어머니에게 뛰어갔던 일들이 그녀의 머리 속에서 팔랑개비처럼 어지럽게 돌았다. 지훈의 어머니는 아들 앞에서는 정매를 아기씨라고 부르지 않았었다. 그것은 아마 아들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았다. 그러나 지훈이가 없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마치 하 녀가 상전을 대하는 것처럼 허리까지 굽적거렸다. 오정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훈의 어머니가 일을 하고 있다는 길 건너 간이 식당 앞 에 와 있었다. 그녀는 그곳까지 오는 동안 머리 속이 온통 지난날들의 기억으로만 꽉 차 있 었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이끌려온 것인지도 몰랐다. 오정매는 잠시 후 '아리랑식당'이라는 플라스틱 같판이 덜렁거리는 간이 음식점의 문을 조 심스럽게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싿. 주방과 식당의 칸막이도 없이 국밥과 술을 파는 허술한 식당이었다. 저년 식사 시간인데도 손님이 한 사람도 없이 썰렁했다. 안으로 들어선 그녀가 문에서 가까운 식탁에 앉자, 키가 깡똥하고 몸집이 툽상스러운 중 년 부인이 남자처럼 걸걸한 목소리로 '어서 오이소'를 기계음처럼 두 번 되풀이하여 맞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주방 쪽을 살펴보았다. 주방에서 지훈의 어머니가 넋을 잃은 모습으 로 무를 썰고 있었다. 오정매는 국밥을 주문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10년 만에 보는 지훈 어머니의 모습은 몰라보게 늙어 있었다. 그녀는 지훈 어머니의 초췌하고 절망적인 모습에서 지난 삶의 슬프고 고통스러운 궤적을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조금 전 지훈 을 만나러 갔다가 거절을 당하고 배신당한 기분으로 돌아섰을 때 느꼈던 그 처절한 서러움 의 감정과는 또 다른 서글픔을 맛보았다. 오정매는 한동안 지훈의 어머니를 바라보고만 서있었다. 일생동안 행복이라는 것을 느껴 보지 못하고, 삶의 고통스러운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늙고 초라하고 절망적인 모습으 로 허물어져가고 있는 듯한 지훈의 어머니에게 차마 아는 체를 하기조차도 죄스럽게 느껴졌 다. 그녀는 얼마 동안 미적거렸다. "저... 아주머니..." 오정매는 목소리를 쥐어짜듯 하여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지훈의 어머니는 이내 정매 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지훈의 어머니는 방금 정매가 주문한 국밥을 끓이다 말고 눈 가장자 리가 진물로 물커진 눈을 들어 한동안 오정매를 멀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 정매여요, 아주머니" 정매는 지훈 어머니의 쇠갈퀴 같은 손을 덥석 잡았다. 지훈 어머니의 손은 찬피동물의 껍 질처럼 전혀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매? 오오라, 정매 아기씨?" 지훈 어머니는 물커진 눈을 버릇처럼 끔벅거리면 놀랐다. "아주머니, 죄송해요" 정매는 지훈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고 주방에서 나와 자리에 마주앉았다. 지훈 어머니는 한동안 말없이 정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훈 어머니는 몸을 가누기에도 힘들 만큼 전혀 기력이 없어 보였다. 정매를 만난 지훈 어머니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크렁하게 괴었다. "그래 정매 아기씨가 우짠 일잉교?" 지훈 어머니는 허름한 쥐색 스웨터의 소냇자락으로 눈언저리를 거듭 훔치며 물었다. "아주머니께서 여기 계시다는 걸 알고 왔어요" "부러 내를 만나로?" 지훈 어머니는 의외라는 듯 짓무른 눈을 크게 떠서 정매를 쳐다보았다. "지금 지훈 씨를 만나러 집에 갔다가 오는 길이에요" "아기씨가 우리 집에? 우리 지훈이를 만나로?" 지훈 어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거듭 물었다. "네, 지훈 씨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 새벽차로 왔어요" 정매의 말에 지훈 어머니는 다시 눈이 크렁하게 젖는 듯싶더니 이내 훌쩍거리기 시작했 다. 그때 식당 주인인 뚱보 아주머니가 지훈 어머니 대신 정매가 주문했던 국밥을 내왔다. 그제야 지훈 어머니는 울음을 멎고, 스웨터소맷자락으로 다시 눈물을 훔쳤다. 오정매는 최지훈의 어머니에게 부산에서 새벽차를 타고 지훈을 만나러 왔는데. 그가 만나 주려 하질 않아 그냥 돌아가는 길이라고 자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지훈의 어머니는 정매 를 향해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고 ㅏ함께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지훈이 그놈은 자석이 아니라 웬수라예. 우째서 고 웬수가 나한테서 생겨갖고 이렇게도 내 속을 썩이고 있는지 모르겠네예. 냄편 복 없는 년은 자석 복도 없다 카이, 우째 내 팔자 가 이리도 모진지 모르겟고마. 그 문뎅이 같은 놈, 형무소에 있을 때도 노상 아기씨만 찾아 쌌더니 지가 무슨 벼슬을 했다고 그래 아기씨를 박대헌당가요" 하면서 다시 눈물을 질금거리기 시작했다. 정매는 국밥을 몇 숟가락 뜨는 등 마는 등 하고 나서 지훈 어머니가 따라준 보리차로 입 을 헹구었다. 아침을 굶은 데다가 점심까지 시원찮게 먹었는데도 혀에 바늘이 돋은 듯 도무 지 입맛이 없었다. "아주머니, 그 동안 면회도 한 번 못 가보고 정말 죄송했어요" 정매는 지훈의 어머니가 아들의 성화에 못이겨 그녀에게 면회를 부탁했으나 거절했던 일 에 대해서 사과하였다. 그녀는 그때 그 부탁을 거절한 자곡지심 때문에 친정엘 오가는 길에도 지훈 어머니를 의 식적으로 피해 왔던 것이었다. "택도 없는 부탁이었지예. 출가해서 사시는 아기씨한테 면회를 부탁한 것부터가 잘못 아 니었능교. 잘못은 지훈이 놈한테 있능기라예" 그렇게 말하는 지훈 어머니의 표정에는 그때 면회를 거절했던 정매에 대해서 담배씨만큼 도 원망을 품고 있는 것 같지 안　아 보였다. "아기씨, 지훈이 그마를 만날 생각은 마시이소. 그 자석은 이제 곧 두ㅞ질 놈이 아닝교. 뒈질 놈을 만나서 뭣하겠능교" 지훈의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고 나서 슬픈 눈으로 정매를 바라보았다. 정매는 지훈의 어 머니라도 만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친정에 오갈 때 지훈 어머니를 피하지 않고 만날 수있다는 생각 때문에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저는 그만 가봐야겠어요" 정매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지훈 어머니가 한사코 그냥 두라는 것을 뚱보 주인한테 밥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지훈 어머니는 식당 밖까지 따라나왔다. "부산으로 가시려면 아직 기차 시간이 멀었는디..." 지훈 어머니가 정매의 손을 잡은 채 말끝을 흐렸다. "친정에서 자고 내일 갈까 해요" 정매는 어쩐지 밤 열차를 타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 하시이소. 마님을 찾아뵌지도 너무 오래 되얏고마. 지훈이 그 웬수놈 땜에 참말로 사람 노릇도 못하고..." 지훈 어머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였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와 헤어져 택시를 잡았다. 그녀는 택시를 잡아타고 미점으로 향했다. 택시는 섬진강을 따라 상류 쪽으로 달렸다. 그 길은 지훈이와 함ㄲ게 하동음에 있는 중학교 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무수히 오갔던 강변로였다. 정매와 지훈은 눈을 감고도 집을 찾아 갈 수 있을 정도로 그 길을 환하게 알고 있었다. 어디쯤 가면 길이 휘어들고, 어디쯤 가면 강물의 물살이 급하게 흐르고, 어디쯤에 정자나 무가 있는 것가지도 환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어쩌다가 막차를 놓치게 되면 두 시간이나 걸리는 그 먼 길을 걸어오기도 했었다. 정매는 지훈이와 함께 밤길을 걷는 것이 싫지가 않 았다. 지훈은 밤길을 걸을 때면 언제나 목청껏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그가 즐겨 부르던 노 래는 동심초였다. 한번은 막차를 놓치고 걸어오다가 흠씬 비를 맞고 말았다. 그들은 비를 맞고 뛰었다. 그러다가 수박밭의 원두막으로 들어가 불을 피우고 옷을 말려 입은 다음,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도 정매는 지훈에게서 이성의 감정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둘이서 밤길을 걸으면서도, 혹은 원두막에서 불을 피우고 옷 을 말려 입으면서도 그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지못했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그와 함 께 있으면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었다. 택시를 타고 어둠에 덮인 섬진강의 강변도로를 따라가면서, 오정매는 지훈과 함께했던 기 억들을 차곡차곡 마음에 접어 간직했다. 그 기억들은 아스팔트길을 비추는 자동차의 헤드라 이트 불빛만큼이나 선명하였다. 섬진강변의 은회색빛 물억새꽃이나 강변의 산자락에 가을의 햇살을 담뿍 받고 피어 있는 구절초꽃까지도, 지훈과의 기억과 함께 살아 숨쉬는 생명이었다. 정매는 밤이라도 상관없이, 그 기억들은 강변의 어디에고 꽃으로 피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수많은 기억 의 꽃들이 정매의 머리 속에서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순간 정매는 그 꽃들의 향기로움에 취해 황홀하기까지 하였다. 그 황홀감은 그녀가 한 남자의 아내이며 두 아이의 어머니라는 사실조차 망각시키기에 충분했다. 오정매는 미점에 도착하여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에야 기억 속의 꽃들 때문에 망각했던 현 실을 회복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잠시 후 친정 식구들에게 둘러싸였다. 어머니와 오빠와 올케, 그리고 조카들에게 둘러싸여 핏줄의 끈끈한 체온을 느꼈다. 마침 그녀의 언니도 친정에 와 있다고 하였다. 아이 가 없는 언니는 형부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은 완전한 외톨이였다. "새벽에 집을 나섰다고 하던데, 와 이제야 오는 게냐?" 어머니가 다소 불만스러운 눈으로 정매를 보며 물었다. 그녀는 남편한테서 전화가 온 것 을 알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라고 이렇게 사대육신이 썽썽한 에미를 와 아프다고 김서방한테 거짓말을 했노?" 어머니가 다시 정매에게 따지듯 물었다. 오정매는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을 것이라고 짐작 은 하고 있었으면서도 변명할 준비를 미처 못했기에 어머니의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잠시미 적거렸다. "정매 너 시방 누굴 만나고 오는 게냐?" 오빠와 올케가 조카들을 앞세우고 어머니의 방에서 나가자 언니가 다그치듯 물었다. 언니는 정매가 최지훈을 만나기 위해 남편에게 어머니가 아프다는 거짓말을 하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것처럼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하기야 지훈과의 사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언니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에, 정매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만나긴 누굴 만났다고 그래?" 정매는 언니를 향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러고 나서 정매는 곧 후회하였다. 언니한테 화를 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떠난 사람이 밤이 되도록 도착을 안 했다 카이 걱정을 하던데, 김서방한티 전하 를 해주그래이" 어미니는 정매가 무엇 때문에 어머니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새벽에 집을 떠난 것인지 더 이상 따져묻지 안　는 대신 부산에 전화부터 하라고 일렀다. 정매는 집에 전화를 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찜찜한 얼굴로 전화기를 끌어당겼다. 남편이 전화를 직접 받았다. "저예요. 읍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이제 막 집에 도착했어요 저녁은 어쨋어요? 원주 창주 는 자요? 녜...어머닌 당신 걱정할까 봐 그러시는 거예요. 생각보다는 괜찮으셔요. 저 내일 아침에 갈게요" 정매는 이쪽 말만을 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랬더니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송수화기를 들자 남편의 목소리가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왜 전화를 벌써끊어? 내일 몇 시 차 탈 거야? 차 갖고 역으로 나가려고 그래. 아직 모른 다고? 그럼 역에서 다시 내게 전화해. 그리고 잠깐 기다려. 이 녀석들이 엄마 바꿔달라고 야 단들이야. 원주부터 바꿀게" 송수화기가 조용해지더니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엄마를 외쳐 불렀다. 큰애 원주였다. "엄마아, 아빠가 말야 엄마 없으니까 집안이 너무 쓸쓸하시대. 그래서 아빠 혼자 집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음악 틀어놓고 술마셨대. 엄마, 앞으로는 말야, 우리만 떼어놓고 가지말고, 같이가아. 알았어?그리고..." 원주가 말을 계속하려는데 창주가 수화기를 빼앗아 엄마를 목청껏 외쳐 불렀다. "엄마아아, 나 오늘 미술 시간에 엄마 그림 그렸다아? 내가 그린 엄마 그림이 정말 엄마 보다 예쁘지 않은데도 우리 선생님은 잘 그렸다고 칭찬을 하셨어, 우리 선생님 엉터리지? 엄마, 얼른 와아. 엄말 보면서 정말 예쁘게 그리고 싶어" 창주 다음에 다시 남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편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하였 다. "몇 시 차 탈 건지 꼭 전화해 줘. 알았지?" 남편은 거듭 강조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오정매는 남편과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조금은 마음의 홀맺힘이 풀어졌다. "지훈이가 출감했다던데 너 날고 있니?" 정매가 전화를 끝내고 자리에 누우려는데 언니가 뚜벅 물었다. 정매는 잠시 생각을 머리 속에 굴렸다. 언니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정매는 언니가 그렇게 묻고 있는 뜻을 얼추 어림하고 있었다. "알고 있어. 간암에 걸려 곧 죽게 되리라는 것도!" 정매는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려는 듯 비정하게 말했다. "오늘 부산에서 왔는데 어떻게 아냐? 지훈이 소식이 부산까지 날아갔니?" 정옥이 언니는 말끝마다 정매의 속을 쑤석거렸다. 정매는 언니의 그런 태도가 싫었다. 그 것은 어쩌면 정옥이 언니가 정매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자격지심으로 언니를 경 계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정매는 자신이 임신을 한 몸으로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는 사실 을 언니가 알고 있다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오늘 지훈 씨 어머니를 만났어" 정매는 여전히 퉁겨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네가 찾아갔었니?" "그래, 내가 찾아갔었어" "집으로?" 언니의 계속된 질문에 정매는 대답을 못하고 잠시 미적거렸다. 어머니만 옆에 없다면 사 실대로 말하고 싶었지만, "언닌! 내가 미쳤수? 역앞에서 우연히 만났어. 아리랑 식당에서 국밥까지 얻어먹었다우" 하고 거짓말을 하였다. "남편 복 없는 여자는 자식복도 없다더니, 지훈이 어메 참말로 복도 없는 기라" 잠자코 두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머니가 한숨을 섞어 지훈 어머니의 신세를 한탄했 다. "참 어머니, 지훈이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참말이에요?" 정매는 어머니의 입에서 지훈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자, 여지껏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을 반신반의하는 어투로 물었다. 그녀는 10년 전 지훈의 일기장에서 보았던 '나의 할아버지 는 종이었고, 나의 아버지는 살인자였다'는 구절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느껴졌었으나 결혼을 한 뒤 여지껏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훈의 소식을 들은 뒤로 다시 관심이 살아난 터였다. 어머니는 정매의 물음에 한동안 말이 없다가, "정매 너 그 이약 어디서 들었노?" 하고 조용하고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훈이 아버지가 살인을 했다는 말이 정말이에요?" 정옥 언니가 이번에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대답은 하지 않고 정매를 바라보기만 했다. 정매가 그 이야기의 출처를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얼핏 지훈이 친구들한테서 들은 것 같아요" 정매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차마 지훈의 일기장에서 훔쳐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 다. "엄마, 그게 정말이야?" 정매는 어머니 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다시 물었다. "지훈이 애비가 사람들을 쥑인 기 아니고, 시국이 사람을 쥑인기여..." 그러면서 어머니는 지훈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지훈의 아버지 최점백은 집의 종이었던 지훈의 할아버지와 함께 행랑살이를 하다가 결혼 을 한 후 집을 나갔으며,6.25가 터지자 붉은 별을 붙인 모자를 쓰고 돌아왔다. 그는 그해 여름 온통 자기 세상을 만난 것처럼 날뛰었다. 그는 미점 뿐만 아니라 하동읍, 화개, 등촌, 용강 등지를 설치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미점의 근동 사람들이 끌려가서 죽음을 당할 때마다 어김없이 최점백의 이름이 거 론되곤 하였다. 사람을 붙잡아가거나 죽이는 자리에는 언제나 그가 얼굴을 나타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했다. 정매의 고향 마을 미점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는대, 모두 최점백이 죽인 것으로 알려졌다. 공교롭게도 죽음을 당한 사람 중에는 평소 최점백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때 정매 작은 삼촌도 끌려가서 죽음을 당했다. 정매 작은 삼촌은 언젠가 최점백이 달걀 을 훔쳐먹었다고 코피가 터지도록 주먹뺨을 후려친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정매네 식구들도 최점백이 그녀의 삼촌을 죽인 것으로만 믿고 있었다. 물론 그가 사람을 직접 죽이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최점백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고도 하였고, 죽었다고도 하였다. 모습을 감춘 지 5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　 마을 사람들은 그 가 죽은 것으로 믿었다. 지훈의 할아버지 최몽실과 지훈의 어머니는 여전히 미점에 그대로 눌러살고 있었다. 그런데 모습을 감춘 지 5년째 되던 여름부터 그의 아내인 지훈 어머니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또 그의 아내가 마을 뒷산에 자주 올라다닌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의 아내가 새벽 마다 뒷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마을에서는 그의 아내가 서방질 을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 아낙들은 그의 아내가 동이 트기 전에 바구니를 끼고 뒷산으로 올라 가는 것을 미행하였다. 그녀는 뒷산 소나무 숲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러나 얼마 후 마을 아낙들은 그의 아내가 토굴 속으로 들어간 것을 알고 그 사실을 남정네들에게 말해 주 었다. 남정네들이 토굴 입구에 불을 피우자 그 안에서 뜻밖에도 이미 5년 전에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가 토벌작전 때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최점백이 토굴 속에서 늙은이의 모습 을 하고 비척거리며 기어나오자 마치 유령을 보기라도 한것처럼 놀랐다. 그러나 얼굴이 누 에처럼 하얗고 머리가 길게 자란 그는 분명 유령이 아니고 정매네 집에서 종살이를 했던 몽 실이의 아들 점백이가 분명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끌고 내려와 당산나무에 묶었다. 그리고 지나간 난리 때 가족을 잃었 던 유족들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당산나무에 묶인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 고 목숨을 거두었다. 죽음을 당한 점백이보다는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최몽실과 해산을 앞 둔 점백이 아내으 ㅣ울부짖음이 더 처절했다. 점백이가 5년 동안 뒷산에 토굴을 파고 숨어 있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끌려나와 죽음을 당 한 지 석 달 후 그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지훈이었다. 지훈의 할아버지 최몽실 과 그의 며느리는 최점백이 마을 사람들한테 죽음을 당한 후에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눌러 살면서 지훈이를 길렀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떠나주기를 바랐으나 그들 세 식구는 꿈쩍 도 하지 않고 버티었다. 지훈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지훈의 어머니는 아들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하동역 앞에 서 떡장사를 하며 그 먼길을 걸어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앙칼과 오기로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지훈의 어머니를 두려워했다. 더구나 지훈이가 자라서 대학에까지 다니 게 되자 지훈의 아버지를 죽였던 사람들은 은근히 마음이 약해지기까지 하였다. 미점에서 하동읍까지 그 먼길을 새벽에 집을 나가 밤늦게 지쳐 돌아오곤 하면서도 끝내 마을을 떠나지 않았던 지훈의 어머니는, 아들이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형무소 살이를 하게 되어서야 집을 불태워 버리고 홀연히 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사실이 그렇다면 지훈 씨 아버지가 살인자라는 증거는 없잖아요?" 어머니로부터 지훈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오정매가 불만이 섞인 목소리 로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많이 끌려가서 죽었다잖아" 정옥이 언니가 동생의 물음에 쐐기를 박으려고 하였다. "죄가 없다면 왜 오 년씩이나 토굴 속에 숨어 살았겠니?" "그거야 되바뀐 세상이 두려워서 그럴 수도 있잖겠어?" 정매는 이렇듯 언니와 가벼운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그녀는 지훈 아버지의 일은 사상적 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난리통이라 사람들이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람이 사람을 쥑인 거이 아니고, 시국이 사람을 쥑인 게지. 지금은 모두가 그때 일을 후회하고 있을 끼라." 두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머니가 말했다. 정매는 그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성난 겨울 바다처럼 뒤척엿다. 지훈이보다 그의 어머니의 홀맺힌 삶이 너무 불쌩했던 것이다. 그 리고 지훈이의 고통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짧은 생애와 처참한 죽음에 대 해서,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고향을 뜨지 않고 앙칼과오기의 칼을 갈면서 그를 대학까지 보 낸 걸 지훈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오기스러운 삶에 대해서 갈등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머니의 희망에 중압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정매는 그제야 지훈이가 처절한 고 통과 번민 속에서 고백적인 일기를 쓰게 된 경위를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꿈을 저버린 지훈에 대해서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다. 지훈이 때문에 그의 어머니의 삶은 또 한 번 짓밟힘을 당하고 말았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의 삶은 또 한 번 짓밟힘을 당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정매는 나이보다 열 살쯤 더 늙어버린 지훈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혀 괴로웠다. 정매는 새벽에야 얼핏 잠이 들어 아침 해가 벌겋게 떠올라서야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방엔 그녀 혼자뿐이었다. "인제 일어났구마. 깨우려다가 더 자라고 놔뒀는 기라. 간밤에니 와 잠을 못 이루고 버르 적거렸냐? 무신 걱정이라도 있는 기가?" 정매가 세수를 하려고 방을 나서자 마루에서 걸레질을 하고 있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 굴로 물었다. 어머니는 그녀가 간밤에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던 것을 죄 알고 있는 모양이었 다. "걱정은요. 좀 피곤해서 놎잠을 잔 것뿐인 걸요." 정매는 어머니를 향해 되도록 밝게 웃어 보었다. "근데 집 안이 왜 이리 조용해요?" 정매가 타월을 목에 걸고 작두샘 쪽으로 가며 어머니에게 물었다. "니 오래비와 올케는 들에 나갔고, 언니는 읍에 갔다 오겠다더라." 그러면서 어머니는 아침밥을 차려주겠다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정매는 아침을먹고 나서 잠시 햇빛이 화사하게 내려꽂히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이제 겨우 오전 9시밖에 안 되었 는데도 집 안이 한낮처럼 고즈넉했다. 시골의 시간은 도시보다 훨씬 더디게 가는 것 같았다. "언니는 읍에 뭣하러 갔대요?" 정매는 언니가 이슬 아침에 혼자 읍에 나갔다는 게 어쩐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아침 나절에 돌아오겠다고만 하더라. 참 그라고 언니 돌아올 때까지 너더러 집에 있어라 카더라. 택시 불러타고 갔으니 곧 안오겠나." 그러면서 어머니는 정옥 언니의 부탁대로 언니를 만나보고 가라고 하였다. "전 그만 가봐야겠어요. 언니 보고 부산에 한 번 오라고 하세요. 형부는 내년 봄에나 돌아 오신다는데, 그때까지 언닌 시간이 남아돌지 않겠어요?" 정매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부산행 열차 시간에 맞춰 택시를 불러타고 역에 도착했는데도, 열차가 출발하기까지는 40 여 분이나 여유가 있었다. 정매는 40여분 동안 썰렁한 대합실에 앉아 있기도 무엇해서 역광 장 건너편에 있는 다방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지훈 어머니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남은 시 간 동안 지훈 어머니를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었다. 그녀는 역에서 가까운 옷가게에 들러 되 도록 화사한 색깔의 스웨터를 사들고, 지훈의 어머니가 일을 하고 있는 아리랑 식당의 문을 열었다. 식당은 여전히 썰렁했다. 어제 보았던 뚱보 아주머니는 눈에 뛰지 않았고, 지훈 어 머니 혼자 홀을 지키고 있었다. "아기씨가 또 우짠 일잉교?" 정매가 밀창문을 밀치고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시름에 눌린 얼굴로 식탁에 턱을 받치고 앉아 있던 지훈 어머니가 그녀를 알아보고 천천히 일어섰다. "어젯밤에 친정에서 자고 이제 가는 길입니다." "정옥이 언니를 만나셨어요?" "아침에 식당으로 나를 찾아왔더구마." "우리 언니가요? 무슨일로요?" "우리 지훈이 소식을 묻데이." "지훈 씨 소식을요? 뭐라고요?" "그냥 이것저것..." 지훈의 어머니는 시원스럽게 말을 못하고 얼버무렸다. "아주머니, 우리 언니가 뭐라고 했어요?" 정매는 언니가 무슨 일로 아침 일찍이 서둘러 읍에까지 택시를 타고 나와서 지훈 어머니 를 만나고 간 것인지 궁급했다. "정매 아기씨와 우리 지훈이를 만나게 해서는 아니 된다 카더구마. 그래서 내 말이 우리 지훈이는 족을 날을 받아논 기나 다를바 없으이 걱정하지 말라고 했능기라." 그러면서 지훈의 어머니는 또 버릇처럼 이내 크렁하게 눈시울이 젖었다. 정매는 옷가게에서 산 스웨터를 지훈 어머니에게 주고 식당을 나왔다. 지훈 어머니는 식 당 밖까지 따라나오지 않았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가 필시 울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녀는 집에 전화를 하여 언니에게 무엇 때문에 지훈 어머니를 만나서 쓸데없는 소리를 했느 냐고 따지려다가 그냥 두었다. 그녀는 물론 남편에게 전화로 차 시간을 알려주지도 않고 개 찰구를 나갔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있고 싶었다. 열차 안에서 정매는 계속 졸았다. 마침 그녀의 옆좌석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마음놓고 졸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창원을 지나 잠이 들고 말았다. 그녀는 꿈속에서 최지훈을 만났다. 만난 것이 아니고, 꿈속에서 그들은 한가족이었다. 지훈이와 그녀 그리고 원주, 이렇게 세 식구가 섬진강변에서 살고 있었다. 꿈속에서 본 강은 안개에 뿌옇게 덮혀 있었으며, 안개 속 에서 강물 흐르는 소리가 음악처럼 아름답게 들렸다. 그녀는 안개 속에서 강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강의 울음소리는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가야금 산조, 혹은 애원성의 진양조 가락 으로 들리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숨가쁜 십이채의 꽹과리 소리로 들렸다. 그런데 시간이 흐 르자 지훈의 얼굴이 엉뚱하게 지금의 남편으로 변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훈의 얼굴이 남편 으로 변하는 사이 원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꿈속에서 원주를 찾아 긴 강변을 헤매었다. 그녀는 원주의 이름을 부르며 강변을 헤매다가 잠에서 깨었다. 열차는 어느덧 삼 랑진을 지나고 있었다. 차창 밖에는 낙동강 물줄기가 거대한 생명으로 꿈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정매는 명주실 처럼 윤기가 자르르한 겨울날 한낮의 햇살이 강물과 함께 뒤척이는 것을 보면서, 꿈속의 장 면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악몽을 꾸고 난 것처럼 기분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지훈은 늘 섬진강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말을 했었다. 그러면서 그는 강물의 울음은 남 자의 울음이라고 하였다. 그는 정매가 결혼을 하기 전에 형무소에서 보낸 편지에서도 그 강 물의 울음에 대한 이야기를 썼었다. 그 자신이 감방 안에서 꺼이꺼이 강의 울음을 울고 있 노라고 했었다. 열차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아직도 태양은 머리 위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매무새를 추 스리고 천천히 객차에서 나갔다. 정매는 1박2일의 여행이 허탈하기만 했다. 무엇 때문에 새 벽 버스를 타고 남편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하동엘 다녀온 것인지, 자신의 마음을 가늠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남편에 대해서 미안하다는 생각만이 가슴에 앙금처럼 무겁게 깔렸다. 더구나 그녀는 플랫폼 밖에 남편이 마중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더욱 죄스러운 마음 때 문에 고개를 무겁게 떨구었다. "여보! 원주 엄마!" 남편이 정매를 발견하고 소리치며 손을 흔들어댔다. 그녀는 남편에게 차 시간을 알려주지 않았기에, 남편이 역에까지 마중을 나와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기실 그녀는 다른 일 도 아니고 지훈이를 만나러 가서 남편에게 마중을 나오라고까지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 다. "당신, 차 시간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왔어요?" 정매는 남편을 빤히 쳐다보면서 마음속으로 여보 미안해요,라고 말하면서 입으로는 그렇 게 물었다. "내가 집에 전화를 했지. 그랬더니 장모님께서 당신이 열 시쯤에 나갔다더군. 그래 역에 전화를 해서 차 시간을 알아낸 거야. 당신, 내가 나올 줄은 몰랐지?" "아직 근무 시간 아녜요?" 정매는 그러면서 남편의 팔짱을 끼었다 "당신 마중 나오려고 두 시간 먼저 퇴근을 했어. 이런 내 마음 알아줘야 해!" 김원철은 그러면서 걷던 걸음을 멈추고 정매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는 오늘따라 아 내가 무지개처럼 신비롭도록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맞 은 자신은 참 행복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김원철은 아내가 깊이 잠들었을 때, 슬며시 일어나 불을 켜고 앉아서 잠든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 보는 버릇이 있는데, 그때마다 그는 잠시 그 런 행복감에 젖곤 하였다. 화사한 철쭉꽃 빛깔로 사위어가는 저녁놀에 비쳐 보이는 지금의 아내는 더욱 아름다웠다. "내가 없어서 화나셨다면서요? 그래서 혼자 술도 마시구요" 정매는 나편과 나란히 승용차 앞좌석에 앉아 있다가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남편의 옆얼 굴을 쳐다보며 칭얼대듯 물었다. "화까지 난 건 아니고 약간 쓸쓸했을 뿐이야. 아내란 마치 라이터 같아서, 담배 피우는 사 람들한테 말야, 있을 땐 별로 아쉬운지 모르다가도 막상 없으면 꽤 불편을 느끼거든" "아니, 그럼 내가 기껏 라이터란 말예요?" 정매는 밉지 않게 남편을 흘겨보며 투정을 부리는 어투로 가볍게 퉁겨댔다. "당신은 불이다 그런 말이야" "내가 불이라고요? 언제는 당신은 모래고 나는 물이라고 하시고선..." "그래, 나는 모래, 당신은 물, 애들은 시멘트지. 그래서 우리는 콘크리트처럼 몇 백 년, 아 니 몇 천년이 지나도 부서지지 않을거야" 모래와 물과 시멘트... 모래, 물, 시멘트, 그리고 콘크리트... 정매는 혼자 마음속으로 몇 번 이고 그 말을 되뇌고 있었다. 남편은 운전을 하면서 장모의 병세며 처남 내외의 근황과 조카들에 대해서까지 한 사람 한 사람 안부를 물었다. 남편은 언제나 처가 식구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너무 지나 칠 정도로 신경을 쓰기 때문에, 어떨 때는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처가 걱정은 그만 좀 하라고 할라치면, 그는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 쪽 하늘에서 날아오는 까마귀만 보아도 절을 한다고 하면서 어린애처럼 실실거리며 웃어대곤 하였다. "참, 애들 선물 좀 사야지" 집이 가까워지자 남편은 로터리를 한 바퀴 돌아 백화점 앞에 차를 멈추었다. "무슨 선물을 산다는 거예요?" 남편이 차를 세우고 내리라고 했을 때 정매가 물었다. "외갓집에 갔다 온 엄마가 아이들한테 빈손을 내밀 거야?" "당신두 참! 그냥 가요!" 정매는 그러면서 차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남편은 혼자 백화점 안으로 들 어가더니 잠시 후, 큰 선물 꾸러미 두 개를 안고 나왔다. 2. 끝없는 회로 김원철은 여느 날보다 두어 시간쯤 빨리 병원을 나와 승용차를 몰고 그의 아파트와는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그는 영도다리를 건너 남부외항 쪽을 오른켠으로 비끼며 해안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봉래산을 왼쪽으로 밀치고 한참을 달리다가 중리 어귀에서 차를 세웠다. 담배가게 앞에 차를 세운 닥터 김은 좁은 골목을 끼고 깊숙이 들어가 초록색 대문 앞에 섰다. 초록색 대문 옆 문간방의 손바닥만한 창에 분홍색의 엷은 커튼이 드리워진 것을 보면서 김원철은 한동안 그대로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창유리를 두드렸다. 잠시 후에 분홍색 커튼 이 젖혀지면서 5월의 찔레꽃처럼 희고 조그마한 삼십대 초반의 여자가 얼굴을 내밀더니 김 원철의 기침 소리를 듣곤 이내 대문을 따주었다. 김원철은 아주 익숙하게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찔레꽃 같은 여자보다 먼저 문간방의 미닫 이문을 열었다. 여자는 앞을 보지 못해 더듬거리며 김원철을 따라 방으로 들어선 다음, 옷장 위에서 방석을 꺼내 방바닥에 놓으며, "오늘이 벌써 금요일이에요?" 하고 침울하면서도 조금은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닥터 김은 여자가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미숙이는 어디 갔어?" 하면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물었다. 담배 연기 냄새가 풍기자 여자는 다시 옷장 밑을 더듬어 동그란 유리 재떨이를 김원철의 앞에 놓았다. 김원철은 참담하고도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의 앞에 무릎을 세우고 얌전하게 앉아 있는 황 경옥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와 마주앉아 있으면, 자신의 삶이 온통 뒤틀리는 듯한 절망감 에 휘감기곤 하였다. "미숙인 피아노 학원에 갔어요.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것을 알면 빨리 돌아오겠지요" 경옥은 세운 무릎 위에 턱을 받치고 청승맞은 표정으로 멀거니 천장을 향해 턱을 쳐들고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김원철은 시계를 보았다. 병원을 나온 지 한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모레가 미숙이 생일인데 오실 수 있겠어요?" 경옥은 여전히 무릎에 턱을 괴고 앉은 채 물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벌써라뇨? 일년에 한 번 맞는 생일인데... 바쁘시면 오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미숙이도 이 제 철이 다 들어서 모든 걸 이해할 거예요. 그애도 이 년 후엔 중학생이라구요" 김원철은 경옥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담배 연기만 숭숭 내뿜었다. "아직 미숙이가 돌아오려면 멀었나?" 김원철은 두 개비째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지금 몇 시죠?" "네 시 이십 분" 경옥이가 묻는 말에 김원철은 공허하게 대답했다. 김원철이 한 시간쯤 얹아 있는 사이에 담배꽁초가 재떨이에 수북이 쌓였다. 경옥은 마음 속으로 김원철이 피운 담배의 개비 수를 세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경옥이와 단둘이 있을 때는 그렇게 줄담배를 피웠다. 미숙이와 함께 있을 때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경옥은 왜 그가 자신과 단둘이 있을 때는 그렇게 애꿎게 줄담배를 피우는 것인지 헤아릴 수 있었다. 그녀는 비록 눈으로 김원철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그의 생각을 가늠할 수가 있었다. 지금 김원철은 경옥이가 앞을 볼 수 없는 것만큼이나 답답한 심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경옥이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고, 미숙이를 보러 온 것이라 는 것도 헤아리고 있었다. 그녀는 김원철의 말소리만 듣고도 그의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짐 작할 수가 있었다. "미숙이는 왜 아직 오지 않지? 혹시 오늘 내가 온다는 걸 모르는 거 아냐?" 김원철은 거듭 시계를 들여다 보며 물었다. 경옥은 그런 김원철의 물음에 무겁도록 고개 를 떨구었다. "바쁘시면 그냥 가셔요" 경옥은 고개를 깊숙이 떨군 채 잦아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미숙이가 오늘 아빠가 오는 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느지거니 일어나 우유만 마시고 피아노 학원에 가면서 미숙은, 오늘 은 아빠가 오는 날이라면서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었을 터인데도, 오늘 아침에는 아빠 이야 기 조차 꺼내지 않았었다. "미숙이는 요즘도 공부 잘하겠지?" 김원철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끄면서 물었다. "참, 아빠한테 성적표를 보인다면서 빼랍에 넣어두던데... 이번에도 일등을 했다나 봐요" 그러면서 경옥은 앉은뱅이 책상 서갑을 열고 뒤적거렸으나 미숙이의 성적표를 찾아내지 못했다. "관둬. 미숙이 오면 봐도 되니까" 김원철이 처음으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이윽히 경옥을 바라보았다. 그는 경옥이가 실명을 하지 않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같은 고아원에서 자랐다. 원철이 의 나이가 다섯 살 더 많았기 때문에 경옥이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들은 친오누이처럼 서로 의지하며 자랐다. 대학에 들어간 김원철이 고아원에서 나와 과외 지도를 해가며 독립했을 때, 경옥은 거의 날마다 원철의 자취방에 들러 빨래와 청소를 해주었고, 일요일이나 방학 때는 아예 그의 자 취방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뒷바라지를 했다. "저어..." 경옥이 무슨 말인가 할 듯하다가 말끝을 흐려버렸다. 김원철이 그녀의 다음 말을 재촉하 지 않았기 때문에 경옥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오래 전부터 김원철에게 자신이 생각하고 결심한 바를 말하려고 잔뜩 별러왔었다. "저어... 미숙이 문젠데요" 잠시 후 경옥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미숙이 문제라니?" 김원철은 버릇처럼 다시 손목시계를 보며 물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경옥이 한테만 오면 손목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더구나 오늘은 6시에 가족들과 외식을 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마음이 바빴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생각한 것인데요, 미숙이를 데려다 기르세요. 미숙이도 이젠 다 컸으니 나와 떨어져서 살 수 있을 거예요" 경옥은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품어온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 말을 꺼내기가 그렇게 힘들 었었는데, 막상 이야기를 쏟아버리고 나자 마음이 후련해졌다. "미친 소리 하고 있네.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김원철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 같은 일은 상상하기조차 싫었기 때문이다. "부인 때문에 그러시죠? 그렇지만 부인의 마음이 미숙이와 헤어지는 제 아픔만 하겠어 요?" 경옥은 그러면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그녀는 김운철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소릴 또 했다가는 용서하지 않겠어. 미숙이를 주고 어쩌려구?" 김원철은 그러면서 신경질적으로 담배 연기를 푸우 내뿜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경 옥이를 외면하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몇번이고 다짐한 바 있었다. 그는 경옥이 모녀를 책임 지고 있는 것이야말로 그 자신의 양심을 지탱해 주는 마지막 지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것은 유일한 속죄의 길이며, 그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었다. "제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경옥은 김원철을 향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갈길을 이미 결정해 놓고 있었 다. 그녀는 김원철 몰래 일년 전부터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맹인학교에 일자리를 얻어 언제라도 그곳으로 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잔소리 말아. 미숙이를 데려갈 수도 없거니와 경옥이가 내 곁에서 떠나도록 놔두지도 않 을 테니까 그따위 생각은 집어치워" 김원철은 화를 내고 있었다. 그는 12년 전 경옥이가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날을 떠올렸다. 그녀는 원철의 아기를 가졌었다. 임신을 하자 고아원에서 나와 그의 자취방에서 동거를 하 게 되었다. 그녀는 임신을 하면서부터 갑자기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안과 의사 말이 임신부의 시력을 보호하려면 낙태를 시키는 방법뿐이라고 하였다. 김원철은 그녀에게 낙태를 종용하였으나 경옥은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기를 낳 겠다고 끝내 고집을 부렸다. 의사의 말대로 경옥은 미숙을 낳고 완전히 시력을 잃고 말았다. 경옥은 자신의 시력을 미숙이의 생명과 맞바꾼 셈이었다. 그녀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미 숙이를 통해서 김원철과의 근이 지속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김원철이가 오 정매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도 앙탈을 부리지 않았다. 김원철이 경옥에게 이틀 후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마악 방문을 열고 나서려는데, 대문 밖에서 엄마를 외쳐 부르는 미숙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원철이가 경옥이 대신 대문 을 따주었다. 집으로 들어서던 미숙이 똥그랗게 눈을 뜨고 김원철을 쳐다보았다. "아빠, 아직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구나. 아빠가 미숙이도 만나지 않고 돌아가시면 어쩌 나 싶어 학원에서부터 줄곧 뛰어왔다구요" 미숙이는 김원철의 팔을 붙들고 늘어지며 숨을 몰아쉬고 소리쳤다. "아빠가 미숙이를 만나지 않고 갈 수야 없지" 김원철은 미숙의 맑고 시원스러운 눈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는 미숙이를 볼 때마다 어렸을 때의 경옥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숙의 생김새는 어렸을 때의 제 어미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시원스러운 눈동자며 짙은 눈썹, 적당히 높은 콧날이며 도톰한 입술에, 웃을 때마다 눈꼬리에 주름이 생기는 모습까지도 그대로 닮았다. 특히 발끝으로 땅 껍질을 벗기듯 툭툭 차면서 걷는 버릇까지도 같았다. 경옥이가 무등고아원에 왔을 때의 모습을 김원철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 경옥의 나이 는 여섯 살 이었는데 깡마른 얼굴에 새까만 눈썹과 크고 시원스러운 눈동자가 퍽 인상적이 었따. 처음 고아원에 들어온 경옥은 혼자 외톨이가 되어 울기만 하였다. 아무도 경옥의 울음 을 달래지 못하였다. 김원철은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하모니카를 경옥에게 주어 겨우 울음을 달래었다. 경옥에게 준 하모니카가 이상하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나이 많은 고아원 아이들이 빼 앗으려 할 때는 코피가 터지도록 얻어맞으면서도 내어주지 않았던 하모니카를 경옥에게 주 고 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김원철은 경옥에게 하모니카 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경옥 은 하모니카로 '오빠생각'이라는 곡을 배우고 나서 김원철을 오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경 옥 은 지금까지도 그 하모니카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김원철은 얼핏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가족들과 약속한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서둘러 돌아간다 해도 약속 시간 안에 레스토랑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빠, 성적표 보여줄게" 김원철이 토마루에 서서 초조한 생각으로 시계를 들여다보았을 때, 미숙이가 그의 팔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 학기말 때도 일등이야" 미숙이가 김원철의 손에 성적표를 들려주며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래 잘했다. 우리 미숙이가 또 일등을 했으니까, 선물을 사줘야겠구나" 김원철은 오른손에 성적표를 들고, 왼손으로는 미숙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아빠, 나 소원이 있어" 미숙이가 김원철의 턱밑에 바짝 다가앉아 빤히 쳐다보며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우리 미숙이 소원이 뭔지 말해 봐라" 김원철은 미숙의 맑고 시원스러운 눈을 보며 말했다. 그는 열두살짜리 딸의 눈이 아침 첫 햇살에 반짝이는 이슬처럼 해맑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롭게 빛나는 생 명 그 자체였다. "아빠가 꼭 들어줘야 해!" 미숙은 자신의 소원을 말하기 전에 다짐부터 받았다. "그래, 우리 미숙이 소원인데 아빠가 들어주고말고!" "아빠..." 미숙은 여느 때와 달리 찐득한 목소리로 아빠를 부르고 나더니,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김원철의 얼굴만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소원이 뭔지 말해야 아빠가 그걸 들어주지 않겠어?" 그러면서 김원철은 성적표를 방바닥에 놓고 두 손으로 미숙의 양쪽 볼을 감싸안았다. "얘 미숙아, 아빠 오늘 바쁘시단다. 아빠 귀찮게 하지 말고 떨어져 앉아!" 일주일 만에 만난 부녀가 정에 겨웁게 어우러지는 양을 잠자코 청각으로 감지하고 있던 경옥이 갑자기 얀정없이 미숙을 나무랐다. 그러자 미숙은 잠시 뜨악한 얼굴로 어머니 쪽을 돌아다보더니 표정이 침울해지고 말았다. "괜찮다. 아빠 바쁘지 않으니 어서 말해 봐라." 김원철이 재촉을 했지만 미숙은 한사코 경옥의 눈치를 살피며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미숙이가 더 할말이 없다면 아빠는 그만 가봐야겠다."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가족들과의 약속 시간이 넘어 있었다. "모레 미숙이 생일날 다시 오마" 김원철이 일어서자 미숙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처럼 허망하고도 절망적인 표 정으로 아빠를 빤히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미숙은 아빠를 붙잡지 않 고 그렇게 슬픈 얼굴로 쳐다보기만 했다. 김원철은 그런 딸의 얼굴을 대할 때 마다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매주 금요일마다 일주일에 한번씩, 짧은 만남이 있은 후에는 언제나 그런 기분이었 다. "아빠, 나... 아빠 병원에 가도 괜찮아?" 김원철이 일어서서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미숙익가 뚜벅 물었다. "아프지도 않은데 병원에는 왜?" "그래도 가고 싶어. 내 소원은..." "미숙이 소원이라는 게 아빠가 일하는 병원에 와보는 게야?" "그래, 친구 데리고 가보고 싶어" 김원철은 미숙의 소원이 기껏 그가 근무하는 병원에 친구들과 함께 놀러오는 것이라는 이 야기에 적이 당황한 얼굴로 시무룩하게 서 있는 딸을 내려다보았다. "친구들이 내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지 뭐야" "무슨 이야기를?" 미숙이의 말에 김원철이 반문했다. "아빠가 의사라는 것 말야" 그 말에 김원철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제야 그는 미숙이가 소원을 말한 뜻을 알 수 있었다. "얘두 원! 아빠 바쁘신데 별걸 다 가지고 귀찮게 하는구나" 잠자코 있던 경옥이 가볍게 딸아이를 나무랐다. "그래 좋다. 네 친구들한테 아빠 병원을 구경시켜주겠다. 이젠 되었느냐?" "정말 친구들 데리고 아빠한테 놀러가도 괜찮아?" "괜찮고 말고 미리 아빠한테 전화를 해주면 차를 보내주마" 김원철의 말에 미숙의 얼굴엔 감격과 희열이 넘쳤다. 여지껏 미숙이가 그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만한 일로 감격스러워하는 미숙이가 안쓰러워 그는 갑자기 목울 대가 훗훗해졌다. 김원철은 경옥에게 미숙이의 생일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한 후, 토마루로 내려서서 구두 를 꿰고 밖으로 나갔다. 경옥은 언제나 김원철이 왔다 갈 때 그랬던 것처럼 미숙의 손을 잡 고 골목 어귀 담배가게 앞 빈터까지 따라나왔다. 김원철은 차를 몰고 좁은 길을 빠져나가면서 백미러를 통해 경옥이 모녀가 서서 손을 흔 드는 모습을 보았다. 경옥이 모녀의 모습은 꿈속처럼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그는 차를 몰고 시내로 들어가면서 되도록 경옥이 모녀를 잊어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쉽게 잊혀지지 않고 자꾸만 눈에 밟혀왔다. 마치 자동차의 백미러 속에 아직도 경옥이 모녀의 초라하고 외로운 모습이 비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쯤 늦게야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비치호텔의 페스토랑에 도 착하였다. 그의 아내 오정매와 원주, 창주는 바다가 내다보이는 창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세 시간 전에 병원에서 나가셨다던데 왜 이제야 오시는 거죠?" 한시간이나 기다리다 지친 아내는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엄마가 화가 나서 그냥 집에 가자는 것을 우리가 더 기다리자고 했어요. 아빠, 기다리길 잘했죠?" 큰아이 원주가 김원철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무슨 큰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정매의 눈 치를 살피면서 속삭였다 "광주에서 대학 친구가 와서 늦었더. 그 벌로 이 집에서 가장 비싼 음식을 사줄테니. 여보 화내지 말어!" 김원철은 표정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진 아내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김원철은 가족들과 같이 있는 동안만은 경옥이 모녀를 잊을 수가 있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고급 호텔의 양식부 창가에 앉아 어둠에 묻혀가는 드넓은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비로 소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내와 두 아이들이 즐겁게 떠들 어대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면서 짜릿한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다. 그 순간만은 경 옥이 모녀를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있을 동안만은 철저하게 경옥이 모녀에 대한 생각을 배제하고 있었 다. 경옥이 모녀에 대한 생각은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두어 시간 정도로 제한시키고자 하 였다. 지금의 생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잠시 전 경옥이가 미숙이를 데려다 기르라고 했을 때도 결연히 반대한 것 이었다. 그는 경옥이 모녀에 대한 것은 도덕적인 책임감만 저버리지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 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터였다. 그는 아내 오정매에 대해서도, 경옥이 모녀를 숨겨두고 있다 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경옥이 모녀의 일로 해서 가정에 파 문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자 두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김원철과 오정매는 칵테일을 시켜 입술 을 적셨다. 음악은 적당히 감미롭게 흐느적거렸고, 밤은 파도를 뒤집으며 점점 끈끈하게 깊 어갔다. 김원철은 아내의 화사한 얼굴 위로 경옥이의 슬프고도 답답한 표정이 오버랩될 때 마다 그 모습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두 아이들이 즐겁고 만족한 얼굴로 아이스 크림을 핥아대는 것을 보고 있는 동안, 앞이 보이지 않는 엄마 대신 밥을 짓고 있는 미숙이 의 얼굴이 눈에 밟혔지만, 그는 그 모습마저도 떨쳐버리려고 두 아이들과 장난말을 주고받 았다. 김원철은 오정매와 결혼할 때, 경옥이 모녀에 대해서는 도덕적 의무감만을 이행하겠다고 스스로 결심했었다. 경옥이한테도 그 점을 분명히 이야기했었다. 경옥은 김원철의 결혼을 반 대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목메는 목소리로 미숙이를 외면하지만 말아달라고 애원했었다. 그 리고 어떤 경우에도 그의 여자임을 주장하거나, 그의 가족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경옥은 지금까지 약속대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설령 김원철이 경 옥이 모녀를 외면해 버린다 해도 그녀가 그의 앞에 나타나서 죽네 사네 하면서 앙탈을 부리 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분명했다. 그런 경옥이 느닷없이 미숙이를 데려가 기르라고 한 말이 문득 마음에 걸렸다. 그는 경옥이한테서 미숙이를 떼어내 버린다면, 그녀가 단 하루도 살아 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경옥이는 김원철보다도 미숙에게 더 많이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 는 일이었다. 그런 경옥이에게서 미숙을 떼어낸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가혹한 일일 터였다. 지금 김원철한테서 그녀가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라면, 모녀의 생활비와 미숙이에게 아버 지가 있다는 작은 위안뿐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김원철에게 그 이상은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생활비를 받고 일주일에 한 번 찾아와서 미숙이로 하여금 아빠가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 왔을 뿐이었다. 김원철은 가족들과 함께 비치호텔 양식부에서 외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화점 에 들러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쇼핑을 하였다. 아내 오정매는 끈이 긴 핸드백을 샀고, 아이 들은 겨울용 점퍼를 샀다. 넉넉한 마음으로 외식과 쇼핑을 즐기고 가족들을 자가용에 태워 집으로 돌아가는 김원철은, 이만하면 나도 행복하다 싶게 느긋한 표정으로 핸들을 잡았다. 그는 자동차에 부착된 카텔레비전을 켜고 화려한 옷차림의 가수들이 화려한 무대에서 노 래를 부르는 쇼 프로를 즐기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속에는 앞을 못 보는 경옥이와 미숙에 대한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수 없을 만큼 행복과 만족감만이 꽉 차 있었다. 오정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고향의 최지훈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동으 로 그를 만나러 갔다가 거절을 당하고 돌아온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넘었으니, 지금쯤 최지 훈이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건 듯 부는 바람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을 뿐 이었다. 그후로는 박문호에게서도 최지훈에게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외식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남편과 함께 거실의 푹신한 동나무 소파에 몸을 파묻 고 앉아 그녀가 좋아하는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을 들으며 포도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 밤 남편을 위해 적당히 술에 취하고 싶었다. 그녀가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포 도주를 마시자고 한 것은 남편에게 보내는 사랑의 신호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남편에게 사랑의 예비 신호를 보내곤 하였다. 그날 밤도 밖에서 돌아오자 그녀는 남 편에게 포도주를 가볍게 한 잔씩 하자고 하였고, 김원철은 아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 고 샤워를 미리 끝냈다. "당신 오늘 밤 피곤하지 않으세요?" 오정매는 물빛 포도주가 반쯤 담긴 글라스의 손잡이를 잡고 찐득한 눈으로 남편을 올려다 보며 물었다. 묻고 있는 그녀의 눈빛이 목마르게 타오르고 있었다. 김원철은 그런 아내의 얼 굴을 보면서 은근하게 웃어 보였다. "그만 안으로 들어가지" 김원철이 빈 술잔을 유리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저 한 잔 더 마시고 싶은데 당신은 어때요?" 오정매가 유리 술잔을 입술에 대고 조금씩 핥으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은 어쩐 일이지? 당신은 언제나 침실에 가기 전에 한잔씩만 마셨지 않아?" "오늘 밤에는 기분이 좋아요. 그래서 기분 좋게 취하고 싶어요" "특별히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어?"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마음이 포근해요. 저 음악 때문일까요? 아마 이런 걸 행복이라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오정매는 단숨에 남은 술을 목구멍에 털어넣고 나서, 주방으로 가 남편과 그녀 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워 들고 왔다. 김원철과 그의 아내 오정매는 다 같이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밤을 보냈다. 그 밤, 그들 부부가 얻어낸 행복에 대한 결론은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었다. 행복은 희생과 봉사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주의의 소산이라는 데 두사람의 생각은 서로 일치하였 다. 오정매는 오정매대로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최지훈과의 사이에 얽힌 과거의 무덤 을 다시 긁적거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고, 김원철은 김원철대로 지금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경옥이 모녀 때문에 자신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겨론이었다. 그들 부부는 똑같이 행복은 이상이 아니고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그 런 생각은 그들이 결혼을 하게 된 순간부터 일치했었는지도 몰랐다. 오정매가 최지훈과 삶 의 궤적을 달리하기 위해 서둘러 김원철과 결혼한 것은 그런 현실적인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그녀의 계획은 모두 이루어졌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추구해온 현실적인 행복감에 흠뻑 젖어 있었다. 김원철도 마찬가지였다. 김원철은 오정매와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치밀하게 이해타산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의 계산은 분명하게 들어맞았다. 그는 오정매와 결혼을 한 대가로 그녀의 형부 도움을 받아 대 학병원의 인턴으로 남을 수 있었고, 지금의 병원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는 오정매와의 결 혼을 경옥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경옥이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는 자신에게 닥 쳐올 어떤 불행이라도 감수하겠노라고 분명히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김원철과 오정매는 포도주 맛처럼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기분이 녹아흐를 정도로 찐득한 부부관계를 끝내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따금 자신 들의 과거에 대해서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과거는 아름다운 기억의 축적이 아니라, 시간의 무덤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때문에 오정매는 여지껏 남편에게 과거의 여자들에 대해서 묻지 않았으며, 김원철 역 시 그녀가 결혼하기 전에 친했던 남자 친구에 대해서 조차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뿐이었으며, 아름다운 미래는 과거의 축적이 아 닌 현재의 꽃이며 결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때문에 중요한 것은 오직 현재인 것이었다. 어 쩌다가 다른 사람들이 과거에 대해서 말해도, 또 과거 때문에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 기를 듣게 될 때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그들 부부는 푹신한 침대에 끈끈한 살을 맞대고 나란히 누워 초겨울의 차갑게 느껴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 부부는 똑같이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들이 꾸는 꿈은 언제나 과거였다. 그들의 과거는 언제나 꿈속에서만 나타났다. 그 때 문에 그들은 과거로 하여 괴로움을 겪은 일이 별로 없었다. 과거가 나타나는 꿈이 비록 악몽이라 할지라 도, 그것은 꿈으로 시작하여 꿈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오정매의 꿈에 나타난 과거는 회색빛이었다. 과거의 빛깔까지도 그렇게 선명하지 못하였 던 것이다. 그녀의 꿈속에서는 언제나 최지훈과 아들 원주가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꿈속에 나타난 최지훈은 건강했으며 죄수복을 입지도 않았다. 언제나 꿈을 꿀 때마다 그랬던 것처 럼, 정매는 최지훈과 원주와 함께 섬진강변을 거닐고 있었다. 그들은 강변의 긴 둑을 타고 달리기도 하였고, 강변 모래밭에 나란히 누워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였다. 셋이 나란히 누워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녀는 황홀했다. 마치 그녀 자신이 구름처럼 하늘 높이 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황홀하기까지 한 행복감에 젖은 그녀는 하늘에 감사하는 마 음을 보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언제까지라도 깨어지지 말게 해달라고 빌었다. 김원철은 꿈속에서 경옥이 모녀와 함께 바다가 보이는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꿈속 에서 경옥은 맹인이 아니었다. 또 경옥이 모녀를 자동차에 태워 멀리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짙은 남빛 바 탕에 흰 물방울 무늬의 머플러를 바람에 날리며 경옥은 어렸을 때 즐겨 불렀던 '오빠생각' 이 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경옥의 노래를 들으면서 김원철은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노래처럼 달콤하고 아름다운 꿈이었다. 그는 경옥의 노래를 들으며 끝없이 뻗어누운 고속도로를 달리 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거의 동시에 꿈에서 깨어났다. 오정매는 섬진강의 모래톱 위에 지훈과 원주 와 함께 나란히 누워 있다가 물비늘을 일으키며 수면을 훑고 올라온 쌩한 강바람에 놀라 눈 을 떴으며 김원철은 경옥이 모녀와 함께 끝없이 뻗어누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갑작스럽게 길이 끊겨 꿈에서 깨어났다. 먼저 꿈에서 깨어난 오정매는 남편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 려와 거실로 나왔다. 그녀는 냉장고 문을 열고 시원한 주스를 마시고 나서 거실의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꿈에서 께어나서 돌이켜보면 꿈은 결ㅋ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꿈은 꿈속에서만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 는 되도록 꿈의 내용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하였다. 꿈은 언제나 현실의 행복을 방해하려 하 기 때문이다. 정매가 혼자 불도 켜지 않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 꿈속의 거대하고 차가운 강바람을 생각 하며 오싹한 한기를 느끼고 있을 때 김원철도 꿈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다. 그는 정매처럼 냉장고에서 찬 주스를 마시고 나서 거실의 소파에 앉으려다 아내를 발견하고 놀랐다. "당신 거실에서 혼자 뭣하고 있소?" 그렇게 묻고 있는 김원철이 머리 속에는 아직도 갑작스럽게 큰 길이 막혀버린 꿈속의 장 면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목이 말라서요." 정매는 목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꿈속에서 차를 타면 안 된다는데...." 김원철은 아내 옆에 앉으며 밑도 끝도 없는 말을 꺼냈다. "당신도 꿈을 꿨나요?" 정매가 어둠속에서 남편을 보며 관심 있게 물었다. "당신도?" "네. 꿈속에서 깨어나자 목이 타서...근데 꿈에 차를 타고 어디를 가셨나요?" "어떤 여자와 여자아이를 차에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길이 막혀버렸 어. 그래서 깜짝 놀라 깨었지." "어떤 여자라뇨?" "글쎄....처음 본 여자였어..." "지난번 꿈에서도 여자가 나타났다면서요? 당신이 꿈에는 왜 아내인 제가 나타나지 않고 다른 여자가 나타나는 것죠? 당신 정말로 저 아닌 다른 여자가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는 거 아녜요? 당신 꿈이 참 이상하잖아요." "근데...꿈에 차를 타면 죽는다는데..." "정말 당신 꿈은 이상해요." "그럼 당신은 무슨 꿈을 꾸었소?" 김원철은 꿈속의 불길한 장면을 잊어버리기 위해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저는 바람 때문에 깼어요. 마치 죽은 사람의 손이 내 몸을 덮쳐 오는 것처럼 음습하고 싸늘하고 소름끼치는 바람이었어요." "죽은 사람의 손이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덮칠 수가 있겠어?" "암튼 이상한 느낌을 주는 바람이었어요. 꿈에서 바람을 느낀 것은 처음이라구요. 당신은 꿈에서 바람을 느껴본 적이 있어요?" "글세... 잘 모르겠는걸." "우리는 강변 모래톱 위에 누워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이상한 바람이 내 몸을 덮쳤다구요." "우리라니? 내가 당신 꿈에 나타났었소?" "당신이 아니었어요." "남자였소?" "남자였어요. 그리고... 사내아이도..." "남자와 사내아이? 어쩌면 그렇게도 내 꿈과 같지? 내 꿈에는 여자와 여자아이가, 당신 꿈엔 남자와 남자아이가 나타나다니?" "모르겠어요." 그들은 꿈에 대해서는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다. 그들은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나타난 것까지도 말하였다. 다만 그 남자와 여자가 누구라는 것만은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상대방의 꿈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시 침실로 들어가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다. 오정매는 최지훈을 만나기 위해 고향에 갔다. 온 후 차츰 생활의 리듬을 되찾기 시작했다. 최지훈을 만나러 고향에 갔다 온 얼마 동안, 그녀는 마음의 혼란스러움 때문에 갈팡질팡 하였다. 그러던 것이 차츰 시간이 흐르자 마음에 가라앉으면서 삶의 궤도가 정상을 회복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전처럼 남편이 출근한 후에는 낮잠을 퍼자고, 느지거니 일어나 헬스 클 럽에 가서 한바탕 몸을 흔들어 땀을 빼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한 다음, 여성 잡지를 뒤적거 리거나 아파트의 같은 또래 여자들을 불러들여 심심풀이 화투놀이를 하면서 해가 지기를 기 다렸다. 그런 그녀의 일과가 다시 하루하루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갔다. 그날도 오정매는 남편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가 파출부가 오는 시간에 맞춰 적당한 볼륨 으로 오디오를 틀어놓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파출부가 오자 빨랫거리를 내놓고 치장을 봐야할 물건들을 적은 메모지와 돈을 쥐어준 후, 침실로 들어가 반듯하게 누워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그 순간만을 아무리 거친 파도소리라도 낮은 'G선상의 아리아'처럼 부 드럽게 들렸다. 그녀는 침대에 몸을 뉘이자 이내 스르르 눈이 감겼다. 간밤에 긴 꿈탓으로 잠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녀는 초겨울 바다의 적당히 거친 파도 소리와 세탁기 돌아가는 소 리, 파출부가 설거지를 하느라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얼쑹얼쑹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 리고 이내 심해어처럼 깊은 의식의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오정매는 한 시간쯤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파출부는 설거지와 빨래를 끝내고 거실 청소 를 하고 있었다. 정매는 하품을 삼키며 거실로 나가 거실 바닥을 닦고 있는 파출부의 포실 한 뒷모습을 한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파출부의 육중한 몸집이 숨이 막힐 정도 로 답답하게 느껴졌다. "아줌마 몇 킬로예요?" 오정매가 언짢은 얼굴로 뚜벅 묻자 파출부는, "맻 시냐고 물었능교?" 하고 둔중하게 몸을 돌려 정매를 보며 반문했다. "시간을 물은 게 아니고 아주머니 체중을 물었어요" "체중예? 내사 저울로 달아보지 않아 모르겠네예." 파출부는 언제나처럼 헤벌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줌마도 살 좀 빼야겠어요. 내가 보기에는 팔십 킬로도 더 나가겠어요." "팔십 킬로라고예? 그라믄 몇 근잉교?" "백이삼십 근쯤 되겠네요." "그라믄 이백 근이 될라믄 아직도 멀었구만예" "이백 근이라구요?" "없는 사람 살이라도 피둥피둥해야 든든하지 않겠능교" 그러면서 파출부는 버릇처럼 푸실푸실 웃었다. "내가 아줌마처럼 뚱뚱해지면 자살이라도 하고 말 거예요." 오정매는 절망적인 눈으로 파출부를 보며 말했다. "자살을예? 사모님은 날씬해지기 위해서 사시능교?" "전 지금 오십 킬로를 넘지 않으려고 날마다 헬스 클럽에 가서 땀을 빼잖아요." "지는 그래도 살을 뺄 생각은 없능 기라예. 돈도 없는데 젓가락 맹키로 비쩍 말라갖고 댕 기면 올매나 힘이 없겠능교." 파출부는 오정매의 말에 여전히 웃기만 하였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 때가 없 었다. 이름보다는 천주교 영세명인 테레사라고 불러주기를 원하는 그녀는, 지금 이렇게 건강 한 몸으로 일을 할 수 있게 하여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녀의 남편은 청소부라고 하였다. 그녀는 가난을 부끄러워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한 번도 9시 이후에 와본 적이 없었던 그녀가 10시가 넘어서야 온 일이 있었다. 정매가 왜 늦었느냐고 묻자, 그녀는 시내버스 값이 없어 한 시간 반이나 걸어오느라 늦었다 고 하였다. 그녀의 말로는 500원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2학년짜리 막내딸이 불우이웃 돕기에 낼 돈을 달라고 조르기에 주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테레사는 한 시간 반 동안 뛰어 오느라 땀에 흠씬 젖은 상의를 벗고 숨을 몰아쉬었다. 오정매는 가정부의 그 같은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 세상에 시내버스 요금이 없어서 걸어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 던 것이다. 더구나 그 돈을 불우이웃 돕기에 내고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먼 거리를 땀을 흐리며 걸어온 파출부는 그 바보스러움에 웃음이 터져나오려고까지 하였다. 오정매에게 파 출부의 그 말은 10년 전, 아니 100년 전의 이야기처럼 현실감이 없게 들렸다. 그녀는 남편에 게 최근에 나온 신형으로 자동차를 바꾸라고 성화를 부리지 않았던가. 파출부 아주머니의 그말은 마치 그녀의 육중한 몸무게만큼이나 답답하게 들렸다. "아줌마, 나 헬스 클럽에 갔다 올 때까지 시장 좀 봐오세요." 오정매는 화장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여기 적힌 대로만 봐오면 되지예?" "그래요. 그리고 시내버스 요금 아끼려고 걸어오지 말고 차 타고 오세요." "돈 남으면 택시 불러타고 오겠구만요." 파출부 테레사는 푸실푸실 웃으며 농담을 하였다. 파출부의 말에 오정매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파출부에게 시장을 봐오라고 돈을 줄 때마다 파출부가 그녀를 속이지나 않 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시내버스 요금이 없어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걸어올 정도라면 시장을 보면서 얼마쯤 속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아줌마가 먼저 들어와야 해요." 오정매는 파출부에게 아파트 열쇠를 맡기고 나오면서 말했다. 오정매는 헬스 클러에 가서 땀을 빼고, 클럽에서 새로 사귄 여자들과 어울려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시 간 가는 중도 모르고 노닥거렸다. 클럽에서 사구니 여자들이란 거의 정매와 비슷한 또래들 로 돈은 많고 쓸 곳은 없고 시간은 남아돌아 할 일이 ddjqt는 부인네들이었다. 그리고 그녀 들이 지껄이는 이야기란 아이들에 대한 극성이나 퇴근이 늦는 남편에 대한 불만, 기구들, 새 로 유행하는 옷가지 등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녀들은 이 집 저 집 몰려다니며 어떻게 꾸며 놓고 사는지 엿보고 흉잡는 걸 낙으로 삼곤했다. 그녀들은 집 안을 화려하게 꾸며놓은 것을 보고는 살림을 잘한다고 하였고, 검소하게 사는 집을 보고는 살림을 못한다고 하였다. "오늘은 우리 김 박사 댁으로 가서 고스톱이나 치는 게 어떻겠노?" 남편이 큰 전자제품 대리점을 경영하는 경일이 엄마가 오정매를 보며 말했다. "그거 조오쿠만." "어서 갑시다." 다른 여자들도 경일이 엄마의 의견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오정매는 어쩐지 그녀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껏 그녀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기는 했으나 집에까지 몰고 가서 노닥이고 싶지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가 무슨 흉을 잡히게 될지 모르지 않겠 는가 싶었다. 언젠가 그녀들을 집으로 초청했더니 침실에 걸어놓은 그림을 보고, 이름도 없 는 화가의 그림이라면서 예술 잡품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없느니 낮느니 뒷이야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는 되도록 그녀들을 집에 불러들이지 않기로 하였다. 그리고 남편한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은 당장 침실의 감싼 산수화를 떼어버리고 대신 이름 있는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비싼값에 사들여 그 자리에 보란 듯이 걸어놓았던 것이다. 이제 그녀들을 다시 집에 데리고 가며, 또 그 그림을 보고 예술 작품을 보는 안목이 높아졌 느니 어쩌니 하면서 말이 많은 터인데 정매는 그것이 싫었다. "고스톱은 무슨...오늘은 사우나나 합시다." 정매는 그녀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기가 싫어 딴소리를 했다. "사우나? 것도 조오치." "그럼 사우나비는 김 박사 댁이 내는 거야?" "그러지 뭐." 결국 정매는 그녀들을 집에 데리고 가지 않는 대신 다섯 명의 여자들 사우나비를 뒤집어 쓰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매가 헬스 클럽의 여자들과 사우나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보니 최지훈의 편지가 와 있 었다. 그녀는 편지의 겉봉에 씌어 있는 최지훈의 이름을 보는 순간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는 겉봉을 찢고 내용을 꺼내보기조차 두려웠다. 오정매는 최지훈의 편지를 들고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않은 채 거실의 소파에 오랫동안 넋을 잃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얼마 동안 그렇게 앉아 있다가 파출부에 게 커피를 끓여달라고 하여 천천히 마신 다음, 용기를 내어 편지의 겉봉을 뜯었다. 나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고 나의 죽음보다 더 두려운 정매 백지에 청색 볼펜으로 꼭꼭 눌러쓴 편지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볼펜에 힘을 주어 쓰긴 했어도 어딘가 흐물흐물하게 느껴지는 글씨에서 최지훈의 건강 상태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른의 글씨라기보다는 어린 여학생이 쓴 것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오정매는 '생명보다 더 소중하고 죽음보다 더 두려운 정매'라고 쓴 첫대목을 읽는 순간, 온몸의 핏줄 이 흐름을 멈추어버린 듯한 강박감을 느꼈다. 정매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다음, 다 시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아니 생명이 다하여 육신의 흔적이 사라져버고 영혼만 이 남게 되더라도 그 영혼으로 정매 한 사람만을 사랑하게 될 것이오. 나는 죽음이 내게 가 까이 다가 오고 있는 순간에도 정매에게 향한 마음만은 뜨거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소. 지난번 정매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얼마나 감사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나는 그 때 비록 정매를 그냥 돌려보냈지만 영혼으로 뜨겁게 정매를 만났던 것이오. 비록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들의 마음만은 하나가 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오. 정매는 내가 왜 그대를 만나주지 않았는지 나의 아픔 마음을 이해하리라고 믿소. 나는 이미 육신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오. 그것은 머지 않아 내 육신이 이 땅에서 영원히 모습을 감추게 되리라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오. 나는 지 금까지의 삶을 통해서 얻어낸 내 나름대로의 진리를 믿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존재는 육 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오. 나의 영원한 생명이며 영혼이기도 한 정매, 우리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오. 죽음은 우리를 갈라놓는 마지막이 아니고, 영혼이 다시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인 것이오. 그러기에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오. 죽음은 우리를 잠시 동안만 갈 라놓게 될 뿐이며, 헤어짐이 없는 영원한 만남이란 죽음 그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오.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인간의 영혼은 언제까지나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 소. 그러기에 나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들이 다시 만날 곳 에 먼저 도착하여 그대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라오. 그러기에 나는 지금 죽음이 조금도 슬프 거나 두렵지 않다오. 그러니 정매도 내 죽음의 소식을 듣고 너무 슬퍼하지 마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완전히 소멸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서 그대를 기다리는 것이 니, 그대여, 부디 나의 죽음을 서러워 마오. 나의 생명보다 소중하고 죽음보다 더 두려운 나 의 정매. 나는 지금 내 생명의 마지막 힘을 다하여 이 편지를 쓰고 있소. 아마 이 편지를 다 쓰고 나면 숨쉴 기력마저도 쇠진하여 눈을 감게 될 지도 모를 것이오. 벌써 기력이 다하여 더 이상 손가락에 힘을 줄수가 없소. 이것이 마지막이오. 먼저 가오. 먼저 가서 기다리겠소... 최지훈의 편지를 읽고 난 오정매는 마치 그가 등장하는 꿈을 꾼 기분이었다. 그러나 꿈을 꾸고 났을 때는 곧 그 꿈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지만 편지를 읽고 난 지금은 달랐 다. 마지막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은 최지훈의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 깊숙한 곳에서 끝 없이 메아리처럼 울려오고 있었다. 오정매는 마치 최지훈의 부음을 접한 기분이었다. 편지를 읽고 난 그녀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이상하게 최지훈의 옛날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편지의 내용과 함께 그의 낯익은 목소리와 모습이 함께 되살아났다. 정매가 최지훈의 편지를 읽고 몸에 힘이 빠져버린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데 큰아이 원주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정매는 원줄를 두 팔로 안고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엄마, 누구한테서 온 편지야?" 원주는 정매가 그때까지도 손에 쥐고 있는 지훈의 편지를 보고 물었다. "편지 응, 이 편지는 엄마의 고향에서 온 거란다. " 원주가 정매의 손에 있는 편지의 겉봉을 들여다보며 다시 물었다. "아냐, 외할머니한테서 온 것이 아니고..." "옛날 엄마 친구한테서 왔단다." "엄마 친구? 이리 줘봐. 엄마 친구가 엄마한테 뭐라고 편지를 썼는지 읽어보고 싶어" 그러면서 원주는 정매가 쥐고 있는 지훈의 편지를 낚아채려고 하였다. "엄마 친구가 아파서 죽어가고 있다는구나. 어쩌면 지금쯤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매는 원주가 낚아채 간 편지를 빼앗으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원주의 얼굴을 짯짯이 되작거려 보았다. 마치 원주의 얼굴에서 최지훈의 모습을 발견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엄마 친구가 죽었어?" "아직은 모르는데 이 편지에 죽어가고 있다고 했어" "친한 친구야?" 정매는 원주의 물음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한참 있다가, "친했었지, 아주 가까웠단다."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죽게 되었지? 병에 걸렸으면 우리 아빠한테 고쳐달라고 부탁하면 되잖아. 그래 엄마, 아빠한테 부탁해서 엄마 친구 살려달라고 해" 원주는 정매의 어깨를 흔들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건 안 된다. 아빠도 고칠 수가 없는 병이거든" "아빠가 못 고치는 병도 있어, 엄마?" 원주는 실망한 눈으로 정매를 빤히 쳐다보았다. 최지훈의 죽음을 알리는 부음과도 같은 편지를 받은 정매는 그녀답지 않게 기력을 잃고 있었다. 우울하고 절망적인 기분으로 오후를 보낸 그녀는 남편이 집에 돌아왔을 때도 여느 때와 같이 그렇게 반갑게 맞아주지를 못했다. :아빠, 엄마 친구가 죽게 되었는데 아빠가 살려낼 수 있지?" 김원철이 집에 돌아오자 아들 원주가 매달렸다. "친구가 죽게 되다니?" 김원철이 아내에게 물었다. 정매는 멀뚱하게 남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엄마한테 편지가 왔어요" 원주가 정매 대신 말해 주었다. 김원철은 말없이 아내를 바라보았다. "고향 친구가 아프대요. 아마 암인가 봐요" 정매는 음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며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편의 얼굴 위에 최지훈의 시들어가는 모습이 겹쳤다. 그리고 그의 간절한 목소리가 그녀를 목마르게 부르고 있는 듯한 환청 때문에 고개를 떨구어버렸다. "어떤 친군데 그렇게 맥이 빠져 있지? 친한 사이였는가 보구만 "남자 친구여요. 단 하나뿐인 남자 친구" 정매는 남편 앞에서 서슴없이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조금도 남편에 대해 서 미안한 생각을 갖지 않았다. "남자 친구라고? 당신한테 남자 친구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심각한 사이였 나?" 남편은 정매를 향해 실실거리고 웃으며 물었다. "심각했었죠" 정매는 짧게 대답을 하고 다시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녀를 보는 남편의 눈에는 심각한 사 이의 남자 친구가 있었다는 정매의 말에도 전혀 그녀를 의심하는 빛이 없었다. 오히려 재미 있다는 듯 실실거리며, "그런 친구가 죽게 되었다면 문병이라도 다녀오지 그래"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정매는 벌써 다녀왔노라고 말하려다가 차마 그 말만은 할 수가 없 어서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남편은 최지훈의 편지를 보여달라는 말은 하지 않 았다. 마치 음울하고 슬픈 영화를 구경하고 나서 영화 속의 분위기에 흥건히 젖어있는 것처 럼 기분이 울적한 그녀는, 남편이 지훈의 편지를 보자고 하면 그냥 보여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아무에게라도 최지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의 짧고도 비극 적인 삶을 마구 지껄이고 싶어졌다. 그리고 남편에게서 행복을 찾지 못하고 다시 아들에게 까지 배신을 당한 지훈 어머니의 삶에 대해서도 누구에겐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비극 적 운명의 그들 모자를 생각하면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최지훈의 유서와도 같은 그 편지를 받은 후 정매는 한동안 심한 몸살을 앓은 사람처럼 기 력이 빠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괴롭힌 것은 그 편지를 읽고 난 후부터 최지훈과의 지 난날 기억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나서 그녀의 현실적 삶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괴 로운 것은 그 기억들을 떨구어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살아나서 온통 그녀를 과거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최지훈의 그 편지를 없애지 않았다. 시집을 올 때 이미 그의 편지들을 모두 불태워 없애버렸었는데, 이제 와서 그의 마지막 유서와도 같은 그 편지를 없애지 않고 장롱 서랍 깊숙이 숨겨둔 이유를 그녀 자신도 알 수 가 없었다. 그녀의 며칠 동안의 삶은 마치 안개가 두껍게 깔린 후미지고 음습한 숲속을 혼 자 몽유병 환자처럼 걷고 있는 듯하였다. 그것은 방황도 절망도 아닌 혼몽의 순간들이었따. 그 때문에 정매는 며칠 동안 헬스 클럽에도 나가지 않고 거리를 쏘다녔다. 생활이라는 나무, 가정이라는 나무의 뿌리가, 한창 줄기차게 뻗어나가는 삼십대 중반의 가 정주부가 하릴없이 거리를 쏘다닌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녀 자신도 그것 을 알고 있었다. 초겨울의 햇살이 넉넉한 바람과 함께 버무려져 꽂혀내리는 언덕길을 올라가던 그녀는, 언 덕 위에 서 있는 교회의 첨탑에 꽂힌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녀는 이 세상의 모든 십자가들이 마치 자신의 잘못을 단죄하려는 칼날처럼 무 섭게 보였다. 그리고 십자가를 싫어한 그녀는 자신이 죽은 다음의 세계에 대해서는 부정적 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내세를 믿고 싶지 않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지훈이 그녀에게 보낸 그 편지는 그가 죽은 다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는 죽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자 않았던가. 최지훈의 편지 중에서 그 구절은 그녀의 영혼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고야 말았다. 정매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햇살 속에 냉엄한 모습으로 꽂혀있는 십자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언덕을 올라가기조차 두려웠다. 그 십자가가 그녀의 죄를 묻고 있는 것만 같 았다. 그녀는 언덕을 내려와 버렸다. 시내 번화가로 돌아와 커피숍에 앉아 커피를 마신 다 음, 미장원에 들러 숏 커트로 머리 모양을 바꿔보았다. 그녀는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를 때 그녀 자신의 과거를 잘라버리는 기분을 맛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조금도 그녀 를 편안하게 해주지 못하였다. 미장원에서 나와 다시 백화점에 들러 기분 내키는 대로 쇼핑을 하였다. 그러나 마음만 더 공허하고 불안해졌다. 집에 돌아와서 원주를 보니 그녀의 마음은 더욱 착잡해졌다. 원주의 얼굴 위로 자꾸만 최 지훈의 모습이 겹쳤다. 그녀는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침실로 들어가 방문을 안으로 잠그고, 장롱 속에 감추어 두었던 최지훈의 편지를 꺼내 다시 읽었다. 그의 편지를 다시 읽는 순간, 온몸의 피가 몸 밖 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오정매는 최지훈으로부터 유서와도 같은 편지를 받은 지 얼마쯤 후에 그의 부음을 들었다. 그의 부음은 전화로 왔다. 지훈의 친구 문호가 전화로 알려온 것이었다. 지훈의 편지를 받고 한동안 마음의 혼란 때문에 생활의 궤도에서 이탈하여 음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가까스로 지 난날 기억의 파편들을 잠재울 무렵, 그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이다. "지훈이가 오늘 새벽에 세상을 떴습니데이" 박문호의 목소리는 송수화기 안에서 촉촉히 젖어 있었다. 그 목소리의 물기가 그녀의 마 음까지도 적셔주는 듯하였다. 그녀는 지훈의 부음을 받자 오디오의 음악을 죽였다. 박문호의 전화를 받고 있을 때 오디오에서는 사이먼과 가펑클의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 어'가 적당한 볼륨으로 실내를 흔들고 있었다. 최지훈의 부음을 접한 오정매는 무작정 집을 나와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도 없이 걸으면 서 심한 조갈증을 느꼈다. 아무데나 가까운 커피숍에 들러 목을 축이고 나서 다시 방향도 없이 걸었다. 괜히 지하상 가를 꿰고 돌아다니며 진열장의 상품들을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지하도의 계단을 오르내리 기도 하다가, 재상영의 삼류 극장에 들어가서 사랑한다는 말과 미워한다는 말이 백 번도 더 나오는 울고 짜는 국산 영화를 구경하기도 하였다. 점심때가 훨씬 지났는데도 배고픈 줄을 몰랐다. 그녀는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공 허한 것이었다. 최지훈의 죽음이 전혀 실감나지 않았다. 그녀의 기분은 마치 10년전 지훈이 가 수갑에 채여 붙잡혀갔을 때처럼 멍멍할 뿐이었다. 그때 왜 그가 그런 엉뚱한 죄를 짓고 붙잡혀간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던 것 처럼, 지금도 그녀는 왜 그가 죽어야 했는지 심장이 꽉 막혀올 뿐이었다. 정매는 무작정 걷다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자갈치 시장으로 가서 열심히 살아가는 상인 들을 지켜보기도 하였다. 정매는 갑자기 열심히 살아간다는 삶 그 자체까지도 무의미하게 보였다. 그녀는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해운대로 달려가서 해변의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그날 따라 파도는 마치 죽음의 몸부림이라도 치고 있는 것처럼 거칠게 뒤척이고 있었다. 그녀의 귀를 어지럽히는 해조음까지도 슬픈 비명으로 들려왔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고 해도 자꾸만 머리 속이 뒤숭숭해지면서 며칠 밤잠을 이루 지 못한 사람처럼 신경이 미세하게 갈라지는 듯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울고 싶도록 슬픈 것 도 아니었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혼돈이었다. 도무지 마음을 똑바로 가눌 수가 없는 것이 었다. 해운대의 초겨울 바닷가를 거닐던 그녀는 가까운 호텔의 커피숍에 들러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누구에게라도 까발려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여보, 지금 좀 만날 수 없어요?" 정매는 송수화기에 대고 앙탈을 부리듯 불만의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래? 지금 곧 수술 들어가야 하는데..." 정매의 귀에 남편의 목소리가 그렇게 짜증스럽게 들릴 수가 없었다. 오정매는 남편과 더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할 일도, 갈 곳도 없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조차 없었다. 전화를 끊고 커피숍의 창 가에 앉아서 허탈한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바다가 높고 험한 성벽처럼 보였 다. 성벽과도 같이 단단하게 느껴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까지도 성벽에 갇힌 듯 답답했다. 그녀는 쫓기듯 커피숍을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에 아저씨한테서 전화 왔었구만예. 사모님 들어오시는대로 전화하라 카시데이" 정매가 아파트에 들어서자 무를 썰어 깍두기를 만들고 있던 파출부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나 정매는 남편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침대에 벌 렁 누워 눈을 감았다. 그녀는 바닷바람에 창유리가 가볍게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되도 록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잠시 후 두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는데도 그녀는 그대 로 무기력하게 누워 있기만 하였다. "엄마, 어디 아파?" 원주가 침대 옆에 서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냐, 아프기는" "근데 왜 누워 있어? 아, 엄마 친구가 아파서 그렇구나. 그렇지 엄마?" 정매는 아들을 올려다보며 쓸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 그녀는 원주의 얼굴에서 최지훈의 모습을 생생하게 찾아볼 수가 있었다. 그는 죽지 않았구나. 그는 지금 내 곁에 살아 있음이 분명하구나. 정매는 마음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정매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원주를 힘껏 끌어 안았다. 그제야 울컥 눈물 이 솟구쳤다. 그렇다고 해서 그 눈물이 꼭 슬픔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엄마 우는 거야?" 원주가 정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엄마 친구가 죽었다는구나, 그래서 눈물이..." "정말이야? 정말 죽었어?" 원주는 따지듯 거듭 물었다. 정매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아빠한테 낫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보지 그랬어" "이미 늦었단다. 고칠 수 없을 만큼 병이 깊어버렸기 때문이야" 원주는 정매의 말에 잠시 시무룩한 얼굴로 그녀의 크렁하게 젖은 눈을 들여다보더니, "엄마, 울지 마. 엄마가 우니까 나도 눈물이 나오려고 그래. 그리고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저 세상 가서 다시 만날 수 있잖아요" 원주가 정매를 위로해 주었다. 정매는 원주가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섬 뜩 놀라 몸을 움츠렸다. "저 세상이라니?" 정매는 손수건으로 눈을 닦으며 아들에게 물었다. 최지훈이 죽기 전에 그녀에게 마지막으 로 보낸 편지에서도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었는데, 원주도 그런 말을 하자 심장에 삼지창이 꽂히기라도 한 것처럼 놀란 그녀는, 아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교회에 다니는 내 짝꿍이 그러는데 사람이 죽으면 심판을 받아 죄 있는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지고, 죄가 없는 사람은 천당으로 간다고 했어. 그 말을 들은 후부터는 죽는다는 것이 옛날처럼 그렇게 무섭지가 않아.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근 데 저 세상에도 학교가 있을까?" "학교는 왜?" 원주의 말에 정매는 실소를 날리며 물었다. "학교 다니다가 죽은 애들은 저 세상에 가서도 계속 학교를 다녀야 하잖아. 작년 여름에 식구들이랑 자가용 타고 살악산으로 피서 가다가 죽은 우리 반 경철이가 생각나서 그래요" 원주의 말에 정매는 할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녀는 웃지 않았다. 얼마 후 원주는 김원철이 병원에서 돌아오자 무슨 큰 사건이라도 알리듯 다급한 목소리 로, "아빠 아빠, 엄마 친구가 죽었어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김원철은 한동안 말없이 정매를 바라보고 있다가, "낮에 그 때문에 전화했어?" 하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아녜요. 그냥 당신이 한가하시다면 차나 한잔 하려고..." 정매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친구가 죽었다는데 안 가봐도 되겠어?" 잠시 후에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은 남편 김원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 다. "가긴 제가 뭣하러 가요" 정매는 고개까지 저으며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은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였다. 최지훈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가까운 친구라면서?" 김원철이 정매의 표정을 짯짯이 살피며 기분 나쁘지 않게 물었다. "옛날 일이에요. 안 만난 지도 십 년이나 되었구요" 정매의 말에 김원철은 한동안 잠자코 신문만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신 기분도 울적한 모양인데 우리 나가서 바람이라도 쐴까?"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정매는 남편의 바람이나 쐬자는 호의적인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녀는 남편에게 아무렇 지도 않다는 듯 억지 웃음까지 보이며, "친구가 죽었다는데 기분이야 언짢지요. 그렇지만 슬픈게 아니고 약간 허망할 뿐이여요. 이제 저녁 먹어야지, 나가긴 어딜 나가요" 그러면서 오정매는 서둘러서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주고 받는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원주가, "아빠 아빠, 아까 엄마 울었어요. 엄마 친구가 죽어서 슬픈가 봐요" 하고 정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울긴, 그건 운게 아니고 그냥..." 정매는 변명을 하려고 하였지만 더 할말이 없어, 남편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을 뿐이 었다. 그날 밤 침실에서 남편 김원철은 최지훈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물론 남편은 최지훈에 대 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지 못하였다. 남편은 다만, "감옥에 있다는 그 친구가 죽은 건가?" 하고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정매는 그 순간 너무 놀라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면서 얼굴 이 창백해졌다. 불 꺼진 어둠 속이라 남편이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기에 다행이다 싶었다. "감옥이라뇨?" 정매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한껏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반문하였다. "당신 집 종의 손자였고, 당신과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죽 같이 다녔다는 친구 말야. 대학 때 강도질을 하다가 사람까지 죽였다는..." 남편의 이야기에 정매는 한동안 할말을 잃고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어 둠 속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정매는 죽음과도 같은 절망감이 자신의 심신을 죄어 오고 있는 듯한 불안을 느꼈다. "그 친구가 아닌가?" 그녀의 심신을 동여맨 밧줄을 다시 죄듯 남편이 물었을 때,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당신이 그 사람을 어떻게 아시죠?" 한참 후에야 정매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을 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알겠어?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야" "이야기를요?" "그래, 우리가 결혼할 무렵 처형이 그사람 이야기를 얼핏 했었지" "언니가요?" 정매는 비명을 지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정매는 설마 정옥 언니가 최지훈과의 이야기를 남편에게 까발릴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 하였다. 그녀는 언니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꼈다. "처형 이야기로는 그 사람이 일방적으로 당신을 죽자 사자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굴었다던 데? 그리고 그 사람이 강도질을 하게 된 것도 당신 때문이었다던데?" "저 때문이었다고요?" 정매가 궁금해 한 것은 정옥이 언니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사실을 이 야기했을까 하는것이었다. "처형 말로는 당신이 그 사람의 진정을 알아주지 않으니까 반발심과 자포자기로 그런 끔 찍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하던데, 그게 아닌가?" "저 때문이 아니었다구요. 그건 그 사람 자신의 문제 때문이었어요" "그 사람 자신의 문제라니?" 정매는 남편의 물음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머리 속으로 생각을 굴려보았다. 기실 최지훈이 그 사건을 저지르게 된 정확한 이유도 모르기때문이었다. 그의 그 같은 엉뚱한 행동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최지훈은 그 일을 저지르기 사흘 전에 정매를 찾아와서 돈이 생겼으니 함께 저녁을 먹자 고 했었다. 그들은 평소 두 사람이 가끔 만났던 해운대 극동호텔 맞은편의 지하실 다방에서 커피 한잔씩을 마시고 나서, 근처 바닷가 허름한 횟집에서 매운탕으로 저녁을 겸해 소주 한 병을 마셨다. 그날 저녁 정매는 소주를 두 잔이나 마셨기 때문에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그 들은 적당히 술기운이 오르자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해변을 거닐었다. 그리고 오정매는 그날 밤, 그 해변에서 최지훈에게 첫키스를 빼앗겼다. 그녀로서는 그것이 첫키스였던 것이다. 첫키스의 맛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달콤 하지도 상큼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바닷물 맛처럼 짭짤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서 키스를 훔친 최지훈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정매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요구 를 들어주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그의 뺨을 후려치고 해변에서 도망쳐 혼자 택시를 탔다. 그것뿐이었다. "그 사람 자신의 문제라는 게 뭐였는데?" 남편이 다시 물어서야 그녀는 10년 전의 기억을 뿌리치고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가 우리 집 종이었다는 것과 그의 아버지가 육이오 때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는 것 때문에 늘 갈등을 느껴왔거든요" "요즘 세상에 그런 것 때문에 고민을 해? 그 사람 어떻게 보면 풀잎처럼 순수하거나, 아 니면 돌처럼 미련한 사람이로구만. 나는 한 번도 내 핏줄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지 않았거든. 나는 다만 나의 탄생을 생물학적인 의미로만 생각해 왔어. 그래야 마음이 편하거든" 그러면서 남편은 그런 최지훈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김원철에게 있어서 혈연의 뿌리는 처음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뿌리를 추스려보고 싶지도 않았다. 철이 들고 나서 고아원 원장에게 자신이 어떻게 하여 무등고아원에 들어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갓난아기 때 고아원 밖에 버려진 것을 데려다 길렀을 뿐이라고만 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그는 자신의 핏줄의 뿌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 다. 그에게 있어서 핏줄과 고향의 의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아이들에게도 자신이 고 아였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결혼을 하여 처가 쪽에 신경을 쓰고, 처가 마을을 고향 처럼 생각하는 것도, 그의 단절된 자신의 뿌리에 대한 아쉬움과 외로움 때문인지도 몰랐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삶 때문에 자신의 삶까지 망칠 필요가 어디 있어!" 최지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김원철은 어줍잖은 말투로 퉁겨댔다. 그러면서도 그는, "장례식에 다녀오지 그래. 그래도 그 사람의 영혼은 이 세상에서 오직 당신한테서 위로받 고 싶을 것 아니오. 그러니 다녀와요" 김원철은 정매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런데 그 사람 언제 출옥했소?" 하고 뚜벅 물었다. "출옥한지 두서너 달쯤 되었을 거예요" 정매는 최지훈이 출옥한 날을 대충 어림하면서 대답했다. "여지껏 감옥살이를 했단 말이오? 그 사람이 사건을 저질렀을 때가 벌써 십 년 전의 일인 데" 정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결혼은 했소? 아니지. 여지것 감옥에 있었다면 결혼도 못했겠구만. 그렇다면 그 사람 무 덤에 꽃 한 송이 가지고 갈 사람도 없겠구만. 그러니 당신이라도 찾아가 봐야 하지 않겠소" "당신도 참! 제가 왜 그 사람 무덤에 꽃을 가지고 가요?" 정매는 남편을 향해 불만스럽게 퉁겨댔다. 그녀는일부러 그렇게 하였다. 김원철은 정매에게 더 이상 그녀와 최지훈의 관계에 대해서 따져묻지 않았다. 정매 생각 에 남편은 정옥이 언니가 한 말을 그대로 믿고 있는 듯싶었다. 김원철은 다만, "그 사람이 사건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우린 이렇게 부부가 되지 않았겠구만"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것은 정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지훈이가 그런 사건만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지훈과 정매는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결혼을 하게 되었 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는 당신과 결혼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불만도 없구요. 그 말은 정매의 진심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김원철은 그 말을 희미하게 하고 나서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최지훈이 죽은 다음부터 김원철은 아내한테 특별히 신경을 써 주었다. 그는 다른 때보다 앞당겨 퇴근을 하였고 외식도 자주 하였다. 또 주말이 되면 기분 전환을 시켜주겠다면서 가 족들을 데리고 1박2일 코스로 설악산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김원철이 그녀의 친정에서 가까 운 지리산 쌍계사나 다녀오자고 하였으나 정매가 설악산 쪽으로 코스를 바꿨기 때문이다. 남편이 쌍계사 쪽을 제안한 데는 최지훈의 죽음에 대한 문상을 고려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정매로서는 그대로 따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1박 2일 동안의 설악산 여행을 다녀온 후, 정매의 기분은 봄비 내린 신록 처럼 산뜻해진 듯했다. 정매는 그런 것까지 세심하게 마음을 써주는 남편에 대해 고마움을 느꼈다. "여보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하지만 달리 생각은 마세요. 그사람과의 관계는... 단지 그냥..." "그만. 나는 당신을 오해하지 않아. 더구나 그 사람은 이미 죽었잖아. 죽은 사람 앞에서 오해고 뭐고가 어디 있겠어" 남편은 부드럽게 말하면서 정매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죄송해요. 정매 는남편의 옆얼굴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말했다. 정매는 설악산 여행을 다녀온 후부터 다시 예날처럼 헬스 클럽에 나갔다. 그리고 되도록 최지훈의 죽음을 잊어버리기 위해 아파트 여자들과 어울려 화투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 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하게 마구 죽이는 것이었다. 시간 죽이기에 바쁘면 바쁠수록 지나간 과거의 기억들을 돌이킬 만한 여유가 없어졌다. 그녀의 삶이 가까스로 예날처럼 다시 원상 회복을 할 즈음에 정옥 언니가 왔다. 언니는 그동안 내내 하동 친정에 있었다고 하였다. 정옥 언니는 정매의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미 국에 가 있는 형부네게 전화부터 하였다. "언닌 알아줘야겠어. 오자마자 해외 전화부터 하다니 원! 더구나 미국 시간으로 지금이 몇 신 줄이나 아우? 지금 미국은 새벽 한 시야. 곤히 주무실 형부를 깨워야 마음이 놓이겠수? 암튼 언니 극성은 알아줘야 해!" "이건 극성이 아니다" "극성이 아니면 뭐유?" "오정옥이라는 여자의 존재 확인이다" "존재확인?" "멀리 떨어져 있는 사이일수록 늘 이쪽의 존재를 저쪽에 확인 시켜 줘야 한다는 것을 모 르니? 그래야 잊지 못하거든!" "언니나 형부를 잊지 마시우" 정매는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입을 비쭉거렸다. 정옥 언니는그동안의 친정 소식이며, 그녀의 시가댁 이야기를 한바탕 푸짐하게 늘어놓고 나서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잊고 있다가 다시 생각해 내기라도 한 듯, "참, 너 지훈이 죽었다는 소식 모르고 있지?" 하고 불쑥 말을 꺼내며, 정매의 얼굴에서 땀구멍이라도 세듯 찬찬히 표정을 살폈다. "알고 있어" 정매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정옥 언니는 정매의 그런 반응에 한편 놀라고, 한편으로는 실 망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여러 가지 복잡한 눈빛을 하였다. "알고 있다니? 너한테 부고가 왔을 리는 없을 텐데?" "닥터 김이 장례식에 가보라는 것을 관뒀어" 순간 정매는 날카롭게 정옥 언니를 찔러 보았다. 문득 언니가 남편에게 최지훈의 이야기 를 한 것에 대해 배신감 같은 것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김 서방이? 그가 지훈이를 어떻게 알아서?" "언니가 다 말했었잖아" 정매는 자신도 모르게 정옥 언니를 다그치고 있었다. "내가 뭘 말했다고 그러니?" "뭐? 지훈 씨가 나 때문에 그런 사건을 저질렀다고?" 정매의 따지는 듯한 물음에 정옥 언니는 한동안 말문이 막힌 듯 멀뚱멀뚱 동생의 얼굴을 되작거려 살펴보고만 있다가, "으응, 그 이야기 난 또 뭐라고 고건말야, 미리 배수진을 쳐준 것 뿐이야. 그만한 배수진 은 쳐두는 게 네 신상에 이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만약에 말이야..." 정옥 언니는 말끝을 흐려버렸다. 차마 그 다음 말은 입 밖에 내뱉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 이다. "김 서방한테는 말을 해도 내가 했어야 해" "그렇다면 네 입으로 지훈이 이야기를 해봤니? 십 년 동안 너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면 서 그러니? 그렇지만 이제는 괜찮아. 모든 건 다 끝나버렸으니까. 그 사람이 출옥을 했다기 에 내가 속으로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아니? 그리고 더구나 네가 그 사람을 만나려고 하동 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는 또 얼마나 걱정을 하고! 그렇지만 이젠 끝났어. 이제는 아무 걱정 도 할 것이 없다. 네가 복이 있기 때문이야, 너 처녀 때 엄마가 사주를 봤더니 네 사주가 어 떻게 나온 줄 아니? 첫 번째 남자를 만나서 그 사람을 네 쪽에서 차버리고 다른 남자를 만 나 결혼을 하면 젊어서 과부가 되거나 평생 가난하게 산다고 했다더라. 네 팔자는 이 언니 가 바꿔준 거야. 그러니 네가 김서방 만나 잘사는 건 다 이 언니 덕이라고 생각해!" 정옥 언니의 말에 정매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허탈하게 웃었다. "죽은 사람한테는 안되었지만 말이야, 지훈이 인생은 처음부터 비극적이었어. 그는 태어나 면서부터 비극의 씨를 몸과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던 거야. 그런 그가 어떻게 네 인생의 동 반자가 될 수 있겠니? 오히려 자칫했다가는 네 인생까지도 망칠 뻔 했잖니. 암튼 너는 복받 은거야. 이제는 아무도 너의 행복한 인생을 방해하거나 괴롭힐 사람이 없으니까 말야" 오정매는 언니의 얼굴에 토물을 쏟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오정매는 아직까지 최지훈 때 문에 자신의 행복이 조금이라도 침해받는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최지훈이 살아 있다 해도 결코 그녀의 행복을 방해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다 만 오정매가 최지훈의 소식을 듣고 잠시나마 괴로움에 젖어들었던 것은, 그녀 자신의 양심 의 문제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 정매의 속도 모르고 정옥 언니가 그런 말을 하자 역겨움 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쩜 언니는 죽은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말할 수가 있수? 언니는 정말 비정한 사람이야. 지훈 씨가 태어나면서부터 비극적이었다니, 그런 말이 어딨어?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닥터 김이야말로 부모가 누구인지조차모르잖아" "애두 참, 아무리 그렇기로 자기 남편을 그렇게 말하는 여자가 어디 있니?" 정옥 언니가 오히려 정매를 나무랐다. "그리고... 지훈 씨 그 사람, 내 인생을 방해할 사람이 아녔어. 그 사람이 출옥했을 때도 내가 자진해서 만나러 갔던 거라구. 그렇지만 그 사람은 끝내 나를 만나주지 않았어. 그 사 람은 너무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구. 그렇기 때문에 일찍 죽었는지도 몰라. 난 지훈씨가 감옥 에만 가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과 결혼을 했을지도 몰라" 정매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고 말았다. 그 말에 정옥 언니의 표정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그런 말이 어디 있니? 너 미쳤니?" "난 언니에게까지 내 감정을 숨기고 싶지는 않아. 난 그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 마나 괴로웠는지 몰라. 이제 겨우 그 괴로움이 가라앉았더" "세상에..." 그러면서 정옥 언니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정매를 흘겨보며 혀를 찼다. "그러니 제발 내 앞에서 죽은 그 사람에게 욕된 말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알았다. 알았어. 그러고 보니 정매 너 아직도 낭만주의자로구나!" "언니는 현실주의자유?" "아냐, 난 실리주의자란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그러면서 정옥 언니는 입을 비쭉거렸다. "사람도 말이유? 언니는 사람도 실용성을 따져 존재 가치를 부여하는 거유?" "그러엄. 사람이야말로 실용성을 더 따져야지." "친구도, 가족도, 아니 형부도 실용적인 가치를 따져 관계를 유지하는 거유?" "물론이지" 그러나 오정매는 언니의 그 말이 진심이 아닌 농담이기를 빌었다. 그렇게 말하는 정옥언 니는 푸실푸실 웃고 있었고, 언니의 그말이 진심이 아니기를 바라는 정매의 얼굴은 피가 흐 르지 않는 동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래서 언니는 석우 오빠를 차버리고 형부와 결혼했군." 정매는 그 말만은 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언니의 그 비정하고 계산적인 태도에 반발을 느낀 나머지 입 밖에 내뱉고 말았다. 그러나 정옥 언니는 정매의 그 말에 조금도 기분 상해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정매는 언니의 그런 표정에 다시 한번 놀랐다. "물론 내가 네 형부하고 결혼한 것도 계산을 했기 때문이지. 생각해 봐라. 시골 가난뱅이 석우 오빠와 결혼을 했더라면 내가 지금... 어유, 생각만 해도 답답해!" 정옥 언니는 고개까지 거세게 가로 흔들어대며 말했다. "근데 석우 오빤 시방 어떻게 사신대? 석우 오빠 못 만난 지도 십년은 된 것 같네" "내가 알게 뭐냐. 나는 과거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냐, 아마 지금도 시골 학교 선생임이겠 지" "그래도 언니는 한때 석우 오빠를 사랑했으면서..." "그런 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니?" "그렇담 언니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유?" "오정옥, 바라 나 자신" "형부는? 형부를 사랑하지 않아?" "이야기 했잖니, 사랑은 필연이고 운명이라고..." "세상에..." 오정매는 한심한 눈빛으로 정옥 온니를 흘겨보았다. 정매는 언니의 위장된 껍질을 비로소 봇기고, 이기주의적이고도 실리적이면서 얼음처럼 냉엄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 러면서 정매는 정옥 언니에게서 그녀 자신을 보는 것처럼 섬뜩한 무서움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정옥 언니가 정매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 해주고 있는 듯싶기도 하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정매는 부끄러움과 함께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 때문에 정매는 언니의 말에 더 이상 역겨움을 느끼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정매 자신이야말로 철저한 이기 주의자이며 실리주의자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정매는 언니가 집에 와 있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것은 생활의 불편이라기보다 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언니와 마주앉아 있을 때마다 언니의 이기적이 고도 냉엄한 삶의 태도에 언뜻언뜻 정매 자신을 보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 때문에 정매 는 언니가 빨리 집으로 돌아가 주었으면하고 바랐다. 그러나 언니는 좀처럼 집에 돌아갈 생각은 않고 느긋하게 눌러지냈다. 게다가 언니는 거 의 날마다 미국에 있는 그녀의 남편에게 해외 전화　 하였다. 언니가 형부에게 전화를 할 때 혹 정매가 눈길을 흘기기라도 하면, "눈치 좀 주지 마라. 집에 갈 때 전화 요금 다 주고 갈 테니 걱정 말어" 하면서 발끈 신경을 곤두세우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와 정매 사이에 가벼운 충돌이 있었다. 그 것은 충돌이라기보다는 정 매 쪽에서 언니를 노골적으로 무시해버린 행동을 한 것이라고 해야 옳았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병원에서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곧 처형 모시고 나올 수 있지? 처형께서 오래간만에 우리 집에 오셨는데 함께 외식 이라도 해야 되지 않겠어?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내가 회를 사드리겠다고 처형과 약속을 했 으니까, 처형도 기다리고 계실거야. 그러니, 지금 곧 언니 모시고 나오라구" 남편의 전화를 받으면서 정매는 흘깃 언니의 표정을 훑어보았다. 전화기 옆에 앉아 있던 언니는 큰 목소리로 떠벌려대는 남편의 얘기를 들었음인지 베시시 웃음을 날리며 정매를 바 라보았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안 되겠어요. 그러니 그냥 들어오세요" 정매는 남편의 다음 말을 들은체도않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자 언니의 표 정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왜? 나 때문에 컨디션이 안 좋은 거니?" 하고 찍는 소리로 퉁겨댔다. 정매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언니는 여전히 목각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한동안 말없이 정매를 찔러보고만 있다가, "너야말로 철저한 이기주의자구나. 하기야 넌 어렸을 때부터 네 본위로 생각하고, 네 본위 대로 행동해 왔으니까..." 라고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정매는 언니가 왜 그같은 말을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언니의 말에 항의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못 올 데를 왔나 부다" 그러면서 언니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니는 돌아가지 않았다. 언니가 가방을 챙긴 지 사흘 후, 두 자매는 한바탕 언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날 언쟁 불씨 는 언니에게서 비롯되었다. 언니가 정매한테 원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 화근이 된 것 이었다. 정매는 남편과 아이들이 썰물처럼 아파트를 빠져나간 후 여느날처럼 적당한 볼륨으로 오 디오를 틀어놓고 거실의 소파에 깊숙이 파묻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자 언니가 커피 잔을 들고 정매의 맞은편에 앉더니, "정매 너 원주 성격 비뚤어지지 않게 잘 키워야겠더라" 하고 뚜벅 말을 꺼냈다. 언니의 그 말은 최지훈의 피를 받았으니 원주의 인생에도 문제가 있다 라는 의미가 묻어 있는 것처럼 들렸다. 정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언니를 쏘아보며 "무슨 말이야?" "어젯밤에 원주가 내게 뭐라고 한 줄 아니?" 언니는 두 아이들과 같은 방에서 자기 때문에, 두 아이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표정으 로 정매를 느긋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원주가 뭐랬길래 그래?" "세상에 원, 이제 초등학교 삼 학년짜리가 어쩜 그럴 수가 있니? 아유, 끔찍스러워라!" 그러면서 정옥 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도대체 원주가 어쨌길래?" "글세, 원주 그놈이 어젯밤 내게 하는 말이, 사람을 실컷 때리면 돈을 얼마나 물어주어야 하는 거냐고 묻지 뭐니?" "뭐?" 정매는 언니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건 상상도 하기 힘든 것이었따. "그래서 내가 놀라지 않은 척하고 차분히 물어봤지" "뭐라고? 뭘 물었는데?" "원주 네가 때려주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세상에 어린애한테 그런걸 다 묻다니..." "그랬더니 뭐라고 대답한 줄 아니?" "뭐?" "같은 반에 원주의 눈에 아니꼬운 아이가 있다더라. 이름이 동철이라고 하는 그 아이는 원주가 하는 행동이나 말끝에는 언제나 꼬투리를 잡고 늘어진다더라. 그래서 어저께는 학교 가 파하자 동철이라는 아이를 따로 불러 째려주려고 했는데 그 아이가, 네 아버지 돈 얼마 나 벌어놨니? 돈 많이 벌어놨으면 얼마든지 주먹질을 하라면서 얼굴을 들이밀더라나? 그러 면서 그애가 자기를 때리기만 하면 고소를 해서 벌금과 치료비를 몽땅 받아내겠다고 하더란 다. 그래서 원주는 풀이 죽어 그냥 돌아왔다더라. 그러면서 원주가 또 뭐라고 한 줄 아니?" 절매는 언니의 다음 말을 듣기가 두려웠다. "글세, 원주 그애가 말야, 아빠한테 돈을 달라고 해서 그 돈을 동철인가 하는 애한테 갖다 주고, 그 값어치만큼 패주겠다고 하지않겠니. 그리고 너무 많이 때려서 상처가 나면, 아빠한 테 그애를 고쳐달라고 하면 된다나" 정옥 언니의 말에 정매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세상에 세상에..." 정매는 아들 원주에게서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러니 너 원주한테 특별히 관심을 써야겠더라. 그러다가 혹시 그애가..." 정옥 언니는 잠시 말끝을 흐리며 정매를 바라보더니, "그러다가 그애가 또 누굴 닮아갖고 엉뚱한 일이라도 저지르면 어떡하니?" 하고 말을 이으면서 소파에서 일어섰다. "엉뚱한 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우?" 정매가 무서운 눈으로 언니를 쳐다보며 앙칼스럽게 쏘아붙였다 이때 정옥 언니 쪽에서 말을 돌려버렸더라면 그것으로 끝났을 것을 "그러다가 핏줄 닮은 값할까 걱정이 돼서 그런다 왜?" 하고 되레 따지듯 되쏘아대자 정매가 버르르 기름불 솟듯 성깔을 곤두세우고 말았다. 정 매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서 언니를 무서운 눈으로 찔러보며, "말 다 했수? 뭐가 어쩌고 어째?" 하면서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이렇게 되어 그들 자매는 한동안 심한 언쟁을 벌였고, 드 디어는 정옥언니가 이미 며칠 전에 챙겨둔 가방을 끌고 나가버린 것이었다. 정매는 언니가 집에 간다는 말도 없이 가방을 들고 아파트에서 나가는 것을 보고도 붙잡지 않았다. 정매의 성깔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원주가 언니에게 한 말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헬스 클럽에도 나가지 않고 낮잠을 자지도 않았다. 원주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날은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날이라서 11시쯤에 두 아이가 함께 돌아왔다. 정매는 원주가 돌아오자 독수리가 병아리 낚아채듯 덜미를 거머잡고 안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정매의 갑작 스럽고도 우악스러운 태도에 놀란 원주는 작은 눈을 끔벅거리며 겁에 질려있었다. "이 녀석, 뭐가 어째? 사람을 때리는 값이 얼마냐고? 아빠한테 사람 때린 값을 달라고 하 겠다고? 이런 못된 것 같으니" 오정매는 그러면서 원주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그러자 원주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싸쥐며 송곳처럼 눈심지를 빳빳하게 세우고 정매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원주는 울지 않았다. "어디 그 말 한번 다시 해봐라!" 정매의 손이 다시 원주의 뺨을 후려쳤다. 원주의 눈길이 더 날카로워졌다. "이 녀석이! 그래, 그런 눈으로 엄마를 노려보면 어쩌겠다는 게야!" 정매는 원주가 잘못했다고 빌기는커녕 날카로운 눈초리로 쏘아보는 것에 기가 질렸다. 순 간 언니가 악담처럼 내뱉은 말이 무섭게 뇌리를 후볐다. 이러다가 엉뚱한 일을 저지르게 될 지 누가 아느냐는 언니의 그 말이 자꾸만 머리 속에서 부스럭거렸다. "이 녀석이 끝내 잘못했다고 빌지 않네. 그래, 엄마가 너를 때렸으니, 엄마한테 맞은 값 달라고 할 셈이냐? 엄마가 너 때린 값을 주랴?" 정매가 큰 소리로 다그쳤지만 원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전히 빳빳한 눈초리로 정매 를 쏘아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동철이 그 자식 죽여버릴 테야. 오늘도 그자식이 나를 놀렸단말야" 원주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뭐라고? 죽이겠다고? 사람을 죽여?" 정매는 울고 싶어졌다. 온몸의 피돌기가 멎으면서 사지의 힘이 쫙 빠져버렸다. 머리가 띵 해지면서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씨, 그자식이 나한테 바보라고 했단 말야! 그래도 가만두란 말야?" 원주가 정매를 노려보며 따지듯 물었다. "바보라고 놀린다고 죽여?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그애가 너를 바보라고 놀려대 는 건, 네가 공부를 못하니까 그런거 아냐?" "다시 한번 놀려댔다가는 정말 죽여버릴 거야!" 원주는자기의 생각을 꺾지 않았다. 엄마한테 맞으면서도 여전히 동철이를 죽이겠다는 말 을 서슴없이 퉁겨대는 것이었다. 정매는 힘이 빠져 절망적인 표정으로 원주를 바라보았다. "너, 아빠한테 혼날 줄 알아!" 정매는 더 이상 원주를 윽박지를 힘마저 읺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지친 모습으로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그리고 원주에게는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병원에서 퇴근한 남편에게 원주의 이야기를 했더니, "사내가 그만한 근성은 있어야지. 요즘 같은 세상에 그만한 깡다구 없이 어떻게 살겠어?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는 폼생폼사, 깡에 살고 깡에 죽는다는 깡생깡사라는 말 몰라? 난, 네 아버지 돈 많이 벌어놨으면 얼마든지 쳐라면서 맞기를 원하는 그 동철이라는 아이가 더 무 섭게 생각되는데 그래, 그놈에 비하면 우리 원주는 순진한 거라고!" 그러면서 남편은 오히려 원주의 편을 들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원주에게, "그래 원주야, 동철이라는 애, 아빠가 치료해 줄 테니 얼마든지 패줘라. 사내는 맞기도 하 고 때리기도 하면서 꿋꿋하게 자라는 거란다" 라고 한 말에 그녀는 얼굴빛이 하얗게 엷어지고 말았다. 미숙이는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방에 들어가서 엄마가 외출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먼저 미숙이는 엄마의 머리를 빗겨주고 나서 옷 입는 것을 거들어주었다. "오늘 날씨가 추우니까 외투를 입어야겠어요" 미숙이가 낡은 밤색 외투를 꺼내 엄마에게 입혀주며 말했다. "외투는 너무 무거우니 쥐색 바바리를 입고 싶은데 그러니?" 미숙의 엄마 경옥은 딸이 입혀준 외투를 벗으려고 하였다. "아냐, 밖이 아주 추워요. 눈이 올 것 같다니까 그러네" 그러면서 미숙은 다시 엄마에게 외투를 입혔다. 미숙은 외투의 단추를 채워주고 나서 하 늘색 바탕에 흰 점이 박힌 머플러를 경옥의 목에 감았다. "이제 다 됐어. 엄마, 아주 이뻐 보여, 정말야. 내가 어른이 되면 엄마만큼 이쁘지 않겠지? 그래도 난 상관없어. 난 엄마만 이쁘면 되니까" 이제 초등학교 오학년짜리 미숙은 어른스러운 말을 하였다. 경옥은 딸의 그 말에 목구멍 이 뜨거워져옴을 느꼈다. 순간 그녀는 마음속으로 하느님을 외쳐 불렀다. 그리고 하느님 감 사합니다. 내게 이처럼 귀한 딸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고 감사의 마음을 하느님께 보냈다. "너는 준비 다 끝났니?" 경옥이가 딸을 더듬어보며 물었다. 그녀는 미숙이를 손수 이쁘게 꾸며줄 수 없음이 안타 까웠다. 미숙이가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고 손톱과 발톱도 잘라주고 더러는 가벼운 화장까지 해줄 때마다 그와 같은 안타까움은 더 컸다. "엄마, 이젠 가야겠네. 이러다가 미사 시간에 늦겠어요" 그러면서 미숙은 앉은뱅이 책상 서랍 속에서 봉헌금으로 바칠 지전과 차비를 챙겨 호주머 니에 넣고 엄마를 부축하여 방문을 나섰다. 그들은 주일 미사에 가는 길이었다. 그들 모녀는 일요일의 주일 미사만은 함께 외출을 하였다. 모녀는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는 큰길로 얗했다. 겨울인데도 햇살은 눈이 부셨다. 조금 전 미숙이가 엄마에게 두꺼운 외투를 입혀주면서 눈이 올 것 같다는 것 은 거짓말이었다. 미숙은 엄마가 감기에 걸릴까 봐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눈이 올 것 같다더니 왜 이렇께 밝니? 감각이 예민한 경옥이 비록 장님이기는해도 맑은 아침 햇살의 눈부심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또 미숙이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딸에게 고마 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서쪽 하늘엔 두꺼운 구름들이 쫙 깔려 있는걸!" 미숙은 바다 쪽의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미숙이와 경옥은 손을 꼭 잡고 정류장까지 와서 시내버스에 올랐다. 성당까지는 네 정류 장이었다. 가을까지만해도 그들은 내내 성당까지 걸어다녔으나, 겨울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차 가운 바닷바람 때문에 시내버스를 이용했다. 미숙은 시내버스 속에서 미사 때 하느님께 기도할 내용에 대해서 생각했다. 미숙은 지금 껏 하느님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두 엄마를 위한 기도뿐이었다. 미숙은 아빠와 함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하느님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숙은 아버지가 다른 여자 와 가정을 꾸미고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가 알려주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미루어 생 각한 것이었다. 아빠가 엄마와 함께 살지 않는 것은 엄마가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숙은 아빠를 나쁜 사람이라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미숙의 기도 내용은 언제나 똑같은 것이었다. 미숙의 기도는 엄마가 눈을 뜨게 해달라는 것과 아빠가 그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미숙은 엄마가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하게 되는 것보다는, 아빠로부터 버림받는게 더 두려웠다. 그 때문에 미숙은 아빠를 성가시게 하지 않기로 마음 먹은 것이었다. 너무 귀찮게 굴면 아빠가 그들을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성당으로 들어간 미숙은 마당 북쪽에 언제나 자비로운 모습으로 서 있 는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성호를 그으며 두가지의 소원을 빌었다. 기도를 하면서 성모 마리 아상을 쳐다보고 있으면 언제나 미숙이의 소원이 모두 이루어질 것 같았다. 미숙이가 성모상 앞에서 짧은 기도를 할 때 엄마는 미숙이보다 더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 고 싶어하였다. 미숙은 엄마에게 기도의 내용을 묻지 않았다. 어쩌면 엄마도 미숙이와 똑같은 내용의 기도를 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 숙은 엄마가 성모상 앞에서 고개를 쳐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미숙은 엄마가 성모상의 그 인자하고 자비로우며 사랑에 넘치는 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그것은 안타까움이라기보다느 고통이며 큰 슬픔이었다. "데보라야, 미사 끝나는 대로 엄마 모시고 수녀관으로 오거라" 미숙이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성당의 층계를 올라가는데, 키작은 글라라 수녀가 말했다. "수녀님이 왜 우리를 보자고 하실까?" 글라라 수녀의 말을 들은 경옥이 궁금해 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쁜 일은 아니겠지요, 뭐. 언제 수녀님이 우리한테 나쁜 이야기하신 적 있어요?" 경옥은 딸의 말에 적이 안심하며 자리에 앉았다. 미숙은 미사 시간에 성가를 부르면서 어찌된 일인지 자꾸만 눈물이 쏟아지려고 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감정이었다. 미숙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큰 기쁨에 도취되어 있었다. 온 몸이 후끈거리면서 벅찬 감동이 가슴의 밑바닥으로부터 뜨겁게 뻗질러오르는 것이었다. 입 당 성가를 부르던 미숙은 가슴이 뻐개질 것 같은 충만한 기쁨을 맛보면서 얼핏 엄마의 얼굴 을 쳐다보았다. 엄마의 얼굴에도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엄마의 얼굴은 조금도 슬프거나 괴로운 표정이 아니었다. 엄마의 얼굴은 봄날 아침의 햇살처럼 눈부셨다. 그날따라 신부님의 강론도 감동을 주었다. 평소에는 강론 시간이 따분하게만 느껴졌었는 데, 이 날만은 신부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어린 미숙의 뼛속 깊이 파고드는 듯싶었다. "얼마 전에 한 중학생이 자살을 했는데, 이런 유서를 남겼습니다. '나는 친구가 필요합니 다. 친구를 사랑하면서 친구와 함께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친구가 한 명도 없습니 다.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시험성적에 허우적거리느라고 친구를 가질 여유가 없는 것 같습 니다. 친구가 없는 나는 너무 외롭습니다. 친구가 없는 세상은 너무 황량합니다. 나는 이렇 게 쓸쓸하고 황량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 싫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어요. 제자의 유서를 읽은 교사가 내게 와서 고백을 했습니다. 그 교사는 삼 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하면서 아무것도 가 르친 것이 없다고 괴로워했습니다. 나는 그 학생의 죽음에 대해서는 큰 슬픔을 느꼈습니다 만, 자기의 잘못을 고백한 그 교사를 만난게 여간 기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필 요한 사람은 자기를 고백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미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이지요. 겸손은 남의 허물을 들추어 내는 것이 아니라, 허물이 있는 사람과 마음을 합하여 그 사람 을 돌봐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합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 면 얼마든지 아름다운 평화와 자유를 꽃피우게 될 것입니다. 연탄도 구멍이 맞아야 불이 타 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밑에 있는 연탄에 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 다. 우리 다 같이 밑불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밑불은 겸손이며 희생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잘난 것도 없으면서 남을 무시하려고 합니다. 남을 무시하는 얼굴은 사나우며 남을 무시하 지 않는 사람의 얼굴은 온유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흙과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네 가지 부류로 나누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부류는 돌과 같은 사람이지요. 돌과 같은 사람 은 자만심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람이지요. 두 번째는 가시덤불과 같은 사람입니다. 가시 덤불과 같은 사람은 근심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이지요. 세 번째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 가는 길과 같은 사람입니다. 재물과 명예만을 좇는 사람이지요 그들은 세속적인 삶을 살아 갑니다. 그러나 그 길은 평생을 걸어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날 따라 신부님의 강론은 여느 때와 달리 아주 길었다. 3. 천사의 눈물 신부님의 강론은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번째의 유형은 흙과 같은 사람입니다. 흙은 겸손이며 빛이며 몸 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우리가 흙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흙의 마음 은 무엇이나 다 받아들이는 포용과 사랑의 마음입니다. 흙의 마음은 깨끗한, 값진 것, 고귀 한 것, 아름다운 것만을 골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흙의 마음은 깨끗하고 더러운 것, 귀하 고 천한 것, 아름답고 추한 것, 값지고 값싼 것을 가지리 않고 모두 받아들입니다. 추하고, 값싸고, 천하고, 더러운 것을 많이 받아들이는 흙일수록 기름진 흙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흙의 마음을 가진 사람도 그렇습니다. 많이 밟힌 땅이 값비싼 땅이 되는 것처럼 고난을 많 이 당한 사람일수록 값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사람의 명동 땅이 가장 비싼 것과 마찬가지로 가장 많은 고난을 당한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 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피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을 피하거나 두려 워하는 사람은 값진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흙은 곧 몸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육신 과 같은 것이지요. 흙은 곧 몸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육신과 같은 것이지요, 흙과 같은 육 신은 겸손하고 희생할 줄 압니다. 자, 우리들 몸을 보십시오. 우리 몸에는 여러가지 지체 가 있으며 저마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몸의 부분은 결코 자신을 위해 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몸의 부분은 결코 자신을 위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예 를 들어 손가락은 손가락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눈은 눈을 위해서 움직이고 수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각기 다른 것들을 위해서 수고하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희생과 봉사와 사랑의 정신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 몸의 신비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흙과 같은 마음, 흙과 같은 육신의 신비를 알게 되면 사는 것이 무엇 이며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은, 나는 왜 사 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거나, 나는 살기가 싫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가난하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 육신이 불구이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사람 들을 만나보라는 말을 해줍니다. 나는 왜 태어났느냐,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나를 필요 로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큰 선물이고 신비입니다. 나의 형제, 나의 아들 딸, 나의 부모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같이 귀한 선물을 어떻게 함부로 할 수가 있겠 습니까? 오히려 경건과 존경으로 대해 주어야겠지요. 우리 자신을 낮추어 서로 존경하는 법을 배우도로 합시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삶인 것입니다. 사랑의 삶이란 돕는 삶, 나누 는 삶, 기도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은 나는 너를 위해 살고, 너는 나를 위해 산 다, 라는 의미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흙의 몸에서 빛이 나게 됩니다. 육신 의 빛은 바로 그리스도의 빛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빛은 밝고 따뜻합니다." 미숙은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여러 차례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때마다 엄 마의 얼굴은 감동와 기쁨의 빛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미사가 끝난 후 성당 안이 텅 비게 될 때까지 그대로 앉아서 참으로 기쁨에 충만된 마음 으로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나서야 그들 모녀는 수녀관으로 글라라 수녀를 찾아갔 다. 글라라 수녀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데보라야, 네 엄마한테 아주 좋은 소식이 있단다." 글라라 수녀는 미숙이 모녀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그때 미 숙은 엄마의 손을 꼭 쥐며 마음속으로 그것 봐, 수녀님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좋은 소식만을 알려주시잖아, 하고 말하고 있었다. 미숙이 모녀는 글라라 수녀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 다. "우리 교구에서 이번에 사랑의 빛 찾아주기 운동을 벌이기로 했답니다. 맹인들에게 빛을 주어 밝은 눈으로 새해 아침을 맞게 하려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 본당에서는 데보라의 어 머님을 추천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주일까지 교구청으로 나가서 신청을 하고 개안 수술을 하게 될 날짜를 정하세요. 물론 수술을 해서 빛을 찾을 수 잇을지의 여부는 진찰을 받아봐야 알겠지요. 내 생각엔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 같으니 열심히 기도를 하세요. 그 리고 눈을 뜨게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줄어들지 않도록 하세 요. 만약 눈을 뜨게 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빛은 마음속에서 더욱 찬란한 영광으로 충 만할 것입니다." 글라라 수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숙이 모녀의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 은 속으로 볓 번이고 하느님을 외쳐 불렀다. "자, 그만 가보세요. 데보라야, 다음주 일요일까지 엄마 모시고 교구청에 가는 것 잊지 말도록 해야 한다." 글라라 수녀의 말에 미숙 모녀는 천천히 일어서서 수녀관을 나왔다. 그들은 너무 감격하 여 글라라 수녀한테 고맙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미숙은 엄마의 손을 잡고 성당 마당에 있는 성모상 앞으로 갔다. 그리고 그들 모녀는 그 들의 마음이 하늘에 닿을 만큼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들은 반 시간 동안이나 성모상 앞 에 서 있었다. 미숙이는 엄마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성당 안을 둘러보았다. 3년 동 안 드나들었던 성당이었는데도, 그날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모든 것이 성스럽고 아름답게 보였다. 성모상 주변의 잎이 떨어진 느티나무며, 붉은 벽돌 건물, 그리고 건물의 정면에 대리석으 로 박힌 십자가와 성당 안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심지어는 성당 건물 위에 떠 있는 작은 구 름 조각들과 눈부신 햇살이며, 삽삽한 겨울 바람까지도 성스럽고 아름답게 보였다. 미숙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와 성모상과 찬송가와 기도가 넘치 는 성당이라고 생각했다. "미숙아, 오늘은 걸어가자. 했빛을 좀 쏘이고 싶구나. 바람도 쏘이고 싶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끝낸 엄마가 말했다. "나도 걸어가도 싶어, 엄마!" 미숙이도 엄마의 기도가 끝나면 그 말을 하고 싶었었다. 그런데 엄마가 먼저 그 말을 하 자 마음속으로 어쩌면 이렇게도 두 사람의 마음이 딱 들어맞을 수 있을까 하고 신기해 하였 다. "엄마, 바람이 참 향기롭지?" 성당문을 다와 걷기 시작하면서 미숙이 말했다. "정말 바람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구나. 햇빛도 참 부드럽고!" "이제 엄마도 햇빛을 볼 수가 있을 거야.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야." "글쎄다. 하지만 엄마가 젤루 보고 싶은 것은 햇빛도 바람도 아닌란다." "그럼 뭐야? 뭐가 제일 보고 싶어?" "그러야, 이세상에서 가장 귀하고도 신비로운 선물." 경옥은 신부님의 강론 내용을 떠올리며 말했다. 미숙이도 엄마의 그 말뜻을 알고 있었기 에 더 묻지 않고, "아빠는? 아빠도 귀한 선물이잖아." "글쎄, 그렇구나. 특히 우리 미숙이한테는 말이다. 미숙이는 아빠가 아니었으면 이 세상 에 태어날 수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엄마에게는? 엄마에게는 선물이 아냐?" "물론 엄마한테도…" 말끝을 흐리는 경옥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김원철이라는 사람도 분명 하느님이 주신 신비롭고 귀한 선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 있게 대답을 못하 는 자신이 얄미웠다. 한때 김원철은 경옥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였었다. 그러나 지 금은 두 사람의 만남의 결과가 그렇게 신비로운 것으로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참, 미숙이 너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경옥은 여전히 무거운 마음으로 말했다. 그녀는 개안 수술을 받도록 기회를 주신 하느님 에 대해서 눈물겨울 만큼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눈을 뜬다는 사 실이 두렵기까지 한 것이었다. 눈을 뜨고 난 이후에 겪어야 할 일들이 두려운 것이었다. "왜 그래? 왜 아빠한테 비밀로 해야 해? 지금껏 아빠가 병원에 한 번도 데리고 가지 않아 서 그런 거야? 아빠가 한번쯤은 엄마를 병원에 데리고 가서 진찰을 받아보게 했어야지, 안 그래?" 경옥은 미숙의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어린 미숙이가 속으로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구 나 싶자, 걱정에 앞서 울컥 눈물이 쏟아지려고 하였다. "아니야. 네가 몰라서 그래. 네가 어렸을 때 아빠가 여러 차례 안과에 데리고 가서 진찰 을 받았단다. 그러나 그땐 안 된다고 했단다." 경옥은 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성당에서 집에 돌아온 경옥은 마치 어른이 되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큰 두려움으로 가슴이 떨렸다. 그녀는 자신이 눈을 뜨게 된다고 해도 조금도 기쁠 것 같지 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게 더 없이 두려웠다. 차 라리 경옥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어둠 속에서의 삶이 마음 편할 것만 같았다. 그것은 지난 12년 동안 자신이 어둠의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졋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숙아, 엄만 눈을 뜨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구나. 엄마는 차라리 이대로 미숙이 손 잡 고 살고 싶단다. 엄마는 돌아오는 일요일에 교구청에 가고 싶지가 않다." 경옥은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입밖에 내놓고 말았다. 미숙은 엄마의 그 말에 깜짝 놀랐 다. 글라라 수녀님으로부터 엄마가 개안 수술을 하여 눈을 뜨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 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눈물이 쏟아지기까지 하였는데, 엄마가 그런 말을 하여 이만저만 실망이 아니었다. "엄마도 참. 엄마는 왜 눈을 뜨지 않겠다는 거지? 엄마는 아직도 내 얼굴을 모르잖아. 엄 마는 미숙이가 어덯게 생겼는지 알고 싶지 않아? 엄마는 미숙이 얼굴이 보고싶지 않은 거 지?" 미숙이는 불만 섞인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미숙이는 엄마가 눈을 뜨고 밝은 세상을 다시 보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눈을 뜨기 싫다고 하 니 모든 희망이 절망의 깊은 늪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울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이었다. 미숙 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엄마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엄마가 눈을 뜨지 않겠다면 아빠한테 이르고 말거야." 미숙이가 토라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것은 미숙이의 진심이기도 하였다. 만일 다음 일요일에 엄마가 교구청에 가지 않겠다면, 아빠한테 말을 해서 억지로라도 끌고 갈 생각이 었다. "다음 일요일에 내가 꼭 엄마를 모시고 교구청에 가겠어요. 그러니 딴생각은 마셔요. 그 러면 아빠한테 말하지 않을게요." 경옥은 미숙의 그말에 적이 놀랐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5학년밖에 안 된 아이가 그런 옹골찬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미숙에게 다른 할말이 없었다. 그녀는 미숙이가 괜히 허투루 그런 말을 한 것이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 일요일에 그녀가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 일요일에 그녀가 교구청에 진찰을 받으러 가지 않겠다면, 미숙은 아빠한테 연락을 하 여 억지로라도 끌고 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엄마, 다음 일요일에 꼭 진찰을 받는 거지? 눈을 뜨기 싫다는 말은 괜히 한번 해본 거 지?" 미숙은 엄마에게서 다짐을 받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힘을 주어 거듭 물었다. "엄마, 약속이야. 눈 뜨기 싫다는 말 다시는 안 하기야?" "그래 알았다." 경옥은 미숙에게 약속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숙이는 엄마를 힘껏 끌어안았다. "엄마, 고마워요." "어이구, 우리 미숙이가 불쌍한 엄마 눈 뜨게 하려고 속을 태운 모양이구나. 참말로 우리 미숙이가 효녀 심청이로구나. 이런 미숙이가 없다면 엄마는 어쨌을꼬" 경옥이도 미숙이를 끌어안고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녀에게 미숙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였다. 그런 미숙이를 김원철에게 보낸다는 것은 경옥이 자신의 살점을 도려내 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경옥은 김원철에게 미숙을 데려가라고 하였다. 그것은 어쩌면 그녀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곧 경 옥이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경옥에게 있어서 미숙이의 존재는 그녀의 생명이며 희망이었다. 경옥이가 지금껏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의 극단적인 절망과 죽음보다 더 처절한 고통 속 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생명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미숙이가 힘이 되어주었 기 때문이다. 미숙이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지금껏 이 땅 위에 살아 숨쉬고 있지 못할 터였다. 경옥은 때대로 죽음을 생각하다가도 미숙이의 숨소리를 듣고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자신을 꾸짖 곤 하였다. 그때마다 경옥은 아이고 나봐라, 내가 없으면 미숙이가 어찌 되겠는가 하는 생 각과 함께 죽음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엄마, 엄마가 눈을 뜨게 되면 말야, 나는 엄마만 따라다닐 거야. 엄마가 눈을 뜨면 나를 데리고 여름에 해수욕장도 가고… 그리고 또…" 미숙은 벌써부터 눈을 뜬 엄마와 함께 구경 나갈 생각에 부풀어 있는 듯싶었다. "그러구말구. 우리 미숙이 데리고 다니고말고…" "엄마, 난 엄마가 빨리 미숙이 얼굴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엄마는 아빠 얼굴은 알지 만 미숙이 얼굴은 모르잖아." 미숙이는 손으로 엄마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미숙은 엄마의 머리에서부터 이 마와 눈썹을 차례로 만지다가 갑자기 손의 움직임을 멈추어버렸다. 손끝이 엄마의 눈두덩 에 닿았을 때, 앞을 볼 수 없는 엄마의 고통이 손끝을 타고 심장 깊숙한 곳까지 느껴져왔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우리 미숙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단다." 경옥은 미숙이의 손끝이 자신의 눈두덩 위에서 멈추어버린 이유를 헤아리고 그렇게 말했 다. "정말?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안단 말야?" "그럼 알고말고 눈은 새벽별같이 빛나고, 코는 적당히 높고, 두볼은 목련꽃잎처럼 부드러 우면서도 탐스럽고, 입술은 은행알처럼 야무지고… 그리고 또 턱은 달걀처럼 동그스름해서 어른이 되어서 부자로 살겠고…" 경옥은 머리 속으로 미숙이의 모습을 수없이 그려보았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머리 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미숙의 모습은 경옥이 자신의 어렸을 때 얼굴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미숙이를 생각할 때의 그녀 자신과 함께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하였다. 그 때문에 그녀 는 미숙이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미숙이와 같이 있는 동안만은 세상이 어둡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미숙이가 그녀에게는 바로 빛이며 눈이고 삶이었다. 작년에 미숙이는 엄마에게 미숙이 자신의 눈을 서로 하나씩 나눠갖자고 했었다. 미숙이 는 한쪽 눈만으로도 자신 있게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다고 했다. 그 말에 경옥은 너무 감 격하여 온 종일 울었다. 그때 비로소 경옥은 미숙이가 자신의 분신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미숙이는 경옥이 자신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절감했다. 어린 미숙이가 자신의 눈 하나를 엄마에게 주고 싶다고 했을 때, 미숙이의 그 착하고 아 름다운 모습이 마치 하느님의 은총처럼 그녀의 가슴을 눈부시게 밝혀주는 듯싶었다. 미숙 이로부터 정말로 눈을 이식받은 것만큼이나 마음이 밝아지는 것이었다. 그후부터 경옥은 옆에 미숙이가 있는 한 눈을 뜨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였다. 미숙이만 옆에 있어준 다면 어둠이 어둡게 느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미숙이가 바로 경옥이 자신의 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이제 새삼스럽게 개안 수술을 한다는 것이 경옥으로서는 그렇게 기쁘지가 않은 것이었다. 경옥은 어쩌면 새로운 세상을 대하기가 두려운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의 눈이 멀지 않았을 때까지 보아왔던 세상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동안에 보아왔던 세상의 기억만으로도 머리 속이 넘치는 듯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 속이 백지처럼 흰 공백으로 텅 비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섯 살 때 고아원에 들어가 김원철을 만났던 일이며, 그를 따라서 처음으로 고아원을 떠 나 도시의 끝까지 걸어가 보았던 일, 그리고 여학교에 다닐 때 김원철의 자취방에서 함께 밤을 보냈던 그 신비롭고 황홀했던 추억이며,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않기 위해 결혼을 약속 했던 날 함께 산에 올가가서 무릎을 끓고 엎드려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던 일이 아직 도 그녀의 머리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경옥은 자신이 비참하거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 반추해 보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소중한 그 추억들처럼 자신의 삶이 귀하게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 기억들은 그녀에게 생명의 빛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더 많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장 고통스러 웠던 때는 미숙이가 태어나서부터 그녀의 지팡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자랄 때까지였다. 그 무렵 경옥은 마치 자신이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셋방살이 하던 주인집의 할머니가 아니었더라면 경옥은 지옥과도 같았던 그 시절을 헤쳐나 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미숙이가 자라서 그녀의 지팡이 역할을 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 경옥은 비로소 지옥과도 같은 고통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다. 경옥은 미숙이가 그녀의 손을 잡고 문 밖 출입을 하게 되었을 때부터 모든 것을 딸에게 의 지하며 살아왔다. 미숙이는 자라서 밥도 짓고 엄마를 데리고 성당에도 나갔다. 구리고 도 시 구경도 시켜주었다. 미숙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걸을 때는 잠시도 입을 가만두 지 않았다. 미숙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경옥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어디에 몇 층 건물이 있으며, 어디쯤에서 새로 길을 넓히는 공사를 하고 있고. 시내버스 정 류장은 어디에 있으며, 성당의 모습이며, 처음 만나는 사람의 입성이며 생김새 등등, 마치 말로 그림을 그리듯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미숙이가 경옥이의 눈이 되어준 것이었다. 미숙이가 경옥이의 눈 역할을 해주게 되면서부터 그녀는 살아가는 데 별 로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미숙의 아빠 김원철은 경옥이가 앞을 못보게 되자 기숙숙사에서 생활하면서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경옥을 찾아오곤 했었다. 그러다가 그가 지금의 부인과 결혼을 하자 한동안 경옥이 모녀를 외면해 버렸다. 경옥은 그 무렵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김원철은 미숙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어서야 그들 모녀를 부산으로 데려와 다시 보살펴주기 시작했다. 경옥이가 부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곤 바다가 있고 큰 배들이 드나드는 항구 도시 라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학교에 다닐 때 배웠던 교과서적인 지식에 불과한 것이 었다. 눈이 멀기 전에 부산 구경을 한번도 못해 보았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부산을 떠올리 려고 하면, 우리나라 지도와 그 지도의 토끼 꼬리 밑부분의 한 지점이 머리 속에 그려질 뿐 이었다. 그녀는 미숙이의 입을 통해서만 그들 모녀가 옮겨와서 살게 된 고장의 분위기를 그녀의 깜깜한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머리 속에 그려진 그림은 수채 화처럼 밝았다. 그녀가 머리 속에 그린 부산은 파도와 갈매기와 바닷바람과 선박들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항구의 모습이었다. 경옥은 때때로 파도 소리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녀는 파도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파도가 태풍처럼 그녀에게로 몰려와서 그녀를 망망대해의 한가운데로 휩쓸어가 버릴 것 만 같았다. 처음 부산에 왔을 때 그녀는 한동안 파도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틀어막곤 하였다. 그리고 밤마다 무서운 파도에 휩쓸어가 버리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지금도 경옥은 파도 소리가 두렵기만 했다. 개안 수술을 하게 된다고 하니, 파도 소리가 더 두렵게 느껴졌다. "미숙아, 무서운 짐승처럼 으르렁거려쌌는 저놈의 파도가 어떻게 생겼느냐? 호랑이같이 생겼느냐, 사자같이 생겼는냐?내 생각에 파도의 발톱은 마치 날이 퍼렇게 선 도끼 같고, 파 도의 이빨은 제재소의 동근 톱날 모양으로 생겼을 것만 같구나." 경옥은 미숙에게 파도의 모양을 설명해 달라고 하였다. 경옥이 그말에 미숙이 푸실푸실 웃었다. 그러나 미숙은 곧 웃음을 멎고, "파도가 무서운 짐승이라고, 엄마도 참!" 하면서 앞을 볼 수 없는 엄마의 눈언저리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미숙은 엄마가 파도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마음 아플 수가 없었다.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르는 엄마가 그렇게 불쌍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엄마 생각에는 파도가 무서운 짐승으로만 생각되는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 고 거대한 짐승으로 말이다." "공룡 같은거?" "그래 공룡. 파도가 공룡처럼 생긴 것 같구나." "엄마, 파도는 짐승이 아니야. 파도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데, 공룡이라니." "그렇다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설명을 좀 해주겠니?" 경옥은 제재소의 둥근 톱날처럼 날카로운 이빨로 그녀의 심장을 물어뜯을 것만 같은 파도 소리를 가늠하며 미숙에게 부탁했다. "파도는 짐승도 아니고 무섭지도 않아. 파도는 그냥 바닷물이 움직이는 것뿐이야. 파도 가 칠 때는 물방울들이 하얗게 부서지는데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 이제 엄마도 눈을 뜨 게 되면 파도가 얼마나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그러니 조금만 더 참아. 엄마는 꼭 파도를 보게 될 거라구. 직접 엄마의 눈으로 말야." 그러면서 미숙이는 파도를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다. "미숙이 너는 처음에 파도를 봤을 때 무섭지 않더냐?" 경옥은 궁금한 표정으로 딸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섭기는, 그 물기둥은 마치 분수처럼 아름다웠어." 경옥은 미숙의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리 속에 그려진 파도는 분명 무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짐승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 마 력을 지니고 있는 듯싶기도 하였다. 12년 전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던 그 순간에도, 그녀는 분명 자신의 몸을 끝없는 암흑의 바다 한가운데로 휩쓸어가는 듯한 무서운 파도 소 리를 들었었다. 그소리에 그녀의 온몸이 가루가 되어버린 듯한 처절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 이다. 그것은 여름날이 벼락치는 소리보다 더 무서웠다. "엄마도 눈을 뜨게 되면 파도 소리가 좋아질 거야." 미숙의 말에 경옥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은 부산으로 옮겨온 이후로 그 파도 소리 때문에 깊은 잠을 못 자고 버르적거리면서 파도에 떠밀려가는 흉몽에 시달리지 않는가. "그렇게 될 것 같지가 않구나. 엄마는 저놈의 파도 소리 때문에 살이 빠지고 있단다. 미숙이 너도 엄마가 앙상하게 말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그것이 모두 저놈 의 으르렁대는 파도 소리 때문이란다." 미숙은 엄마의 그 말에 소리내어 울고 싶을 뿐이었다. 글라라 수녀님으로부터 개안 수술을 받으라는 말을 들은 그날밤 경옥은 잠을 이루지 못하 고 밤새도록 뒤척였다. 그날 밤 그녀가 잠을 못 이룬 것은 파도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을 뜨게 될 거라는 기쁨 때문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날 밤 그녀는 머리속에 간직되어 이 씨던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파도에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안타까움 때문에 괴로웠다. 그 때문에 그녀의 머리속이 하얀 공백으로 텅 비어버린 듯싶었다. 경옥은 늦잠을 자고 말았다.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잠에서 깨어보니 미숙이 아침을 지어놓고 엄마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몇 시나 되었냐?" 잠에서 깨어난 경옥은 코끝을 간지럽히는 구수한 된장국 냄새에 식욕을 느끼며 물었다. "어서 세수하세요. 세수하고 아침 드셔야죠." "아니, 벌써 아침밥을?" 여느 때 같으면 잠에서 깨어나서도 한 시간쯤 있다가 아침을 먹었으므로 경옥은 그렇게 물었다. "엄마도 참, 벌써 열 시야." "열 시? 왜 깨우지 않았어!" "엄마가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았거든. 난 엄마가 이렇게 늦 잠 주무시는 걸 오늘 처음 봤어." "그나저나 너 학교 늦어서 어쩔래?" "참 엄마도, 겨울방학 했잖아.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늦잠을 주무셔도 괜찮아요." "그렇구나. 나는 미숙이가 방학한 줄도 모르고 있었구나." "오늘이 십이 월 이십이 일이야. 모레가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것도 몰라요?" 그러면서 미숙은 엄마를 부축해 부엌으로 나가서, 미리 데워놓은 따뜻한 물로 엄마의 얼 굴을 씻어준 다음 타월로 물기를 닦아주었다. 미숙은 아침마다 이렇게 엄마보다 일찍 일어 나서 아침밥을 지어놓고, 엄마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세수를 시켜주곤 하는 것이었다. 경옥이가 한사코 스스로 세수를 하겠다는데도 미숙은 엄마의 말을 무시하다시피 하며 고집 을 부렸다. "일요일이 되려면 아직 여섯 밤이나 더 자야 하는데,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밥을 먹으면서 미숙이가 약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요일이 그렇게 기다려지니?" "그럼요." "하기야 너는 언제나 일요일을 기다리지 않았니? 성당에 가려고 말야." "그건 엄마랑 함께 걸을 수 있으니까 그렇지. 나 혼자 성당에 가라면 즐겁지 않을 거야." 미숙이가 기다리는 일주일은 하루의 태양 두 개씩 겹쳐놓은 것처럼 길고도 지루했다. 그 동안 미숙은 여러 차례 엄마가 눈을 뜨는 꿈을 꾸었다. 눈을 뜬 엄마와 함께 꿈속에서 해수욕장에 가고, 기차를 타고 먼 곳까지 여행도 하였다. 꿈속에서 엄마와 함께 여행을 할 때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경치들을 구경했다. 미숙은 엄 마가 그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되어 연방 탄성을 지르는 것을 보면서 행복감에 젖었다. 꿈 속에서 가본 해수욕장에서 엄마는 모래사장을 달렸다. 엄마는 바람처럼 빨리 달렸다. 미숙 이가 따라잡을 수가 없을 만큼 빨리 달렸다. 바닷가를 달리면서 엄마는 파도를 향해 손짓 을 하였다. 꿈속에서 엄마와 미숙은 참으로 행복했다. 그 행복감은 꿈에서 깨어나서도 한 동안 그대로 가슴의 밑바닥에 흰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다음날 아침 미숙이가 엄마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는, "미숙아, 엄마는 말이다, 언제나 어둠 속을 달리고 있단다." 하고 미숙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 "아니, 앞을 못 보는 엄마가 어떻게 달리기를 할 수 있다는 거야?" 미숙이가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엄마는 두 다리로 달리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달리기를 한단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빨 리 달릴 수가 있는 거란다. 엄마가 기분이 졸을 때는, 네 꿈에서처럼 정마로 바람처럼 빨리 달릴 수가 있지." 하고 말했다. 그러나 미숙은 엄마의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음으로 달리기를 한다 는 것은 엄마한테서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숙은 엄마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 다. 그것은 엄마의 그 말을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가는 엄마가 더 어려운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미숙은 다만, "그렇다면 엄마가 달리기를 잘할 수 있을 때가 언제야?" 하고 엄마의 말을 이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물었다. "미숙이와 같이 있을 때. 엄만 미숙이와 같이 있을 때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날아갈 것 같단다. 아마 미숙이 방학 동안에는 엄마가 매일 달리기를 하게 될 거다. 정말 새처럼 하 늘을 나는 기분이 될 거야." "정말? 정말로 새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 될 수 있어?" "그렇고말고 새가 된 기분이지." "무슨 새?" "엄마는 갈매기가 된 기분이란다. 갈매기가 되어 바다 끝까지, 아니 이 세상 어디라고 가 고 싶은 곳이 있으면 다 가볼 것 같은 그런 기분." 미숙이는 엄마의 말에 속으로 웃었다. 엄마는 갈매기가 바다에만 사는 겨울새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요일을 사흘 앞둔 목요일 아침에 미숙은 공중전화가 있는 삼거리까지 나와 아빠의 병원 으로 전화를 하였다. 그날은 아빠가 미숙이한테 병원 구경을 시켜주기로 약속을 한 날이었 기 때문이다. 미숙의 전화를 받은 아빠는 대뜸, "무슨 일이냐?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겼느냐?" 하고, 마치 엄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약간 흥분한 목소 리로 물었다. "아녜요. 오늘 아빠가 병원 구경 시켜주기로 했잖아요. 그래서 친구들이랑 아빠한테 가 려구요. 지금 가도 되죠?" 미숙이가 송화기에 입을 바짝 대고 빠른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아빠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는 듯싶더니, "꼭 오늘이라야 되겠니? 오늘은 아빠가 바빠서 말야…" 하고 꽁무니를 빼며 말끝을 흐려버렸다. 미숙이는 이내 시무룩해졌다. "미안하다. 그 대신 아빠가 내일은 다른 때보다 한 시간 빨리 갈게. 우리 미숙이 아빠 말대로 하는 거지?" 아빠의 그말에 미숙은 힘없는 목소리로, 그것도 아주 짧게, "알았어요." 하고 대답하고는 송수화기를 놓아버렸다. 미숙은 실망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미숙은 아빠 의 그런 점이 싫었다. 아빠는 언제나 쉽게 약속을 해놓고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런데도 미숙은 그런 아빠에게 불만을 표시할 수 없다는 게 슬펐다. 만일 불만을 표시했다 가는 아빠가 그들을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빠가 맛있는 초콜릿과 바나나를 듬뿍 사가지고 오셨는데도 미숙은 조금도 기쁘 지가 않았다. 매주 금요일 오후 4시에는 아빠가 의무적으로 엄마와 미숙이를 만나러 오신 다는 것을 알고 있는 미숙이로서는 다른 날보다 한 시간쯤 빨리, 그리고 먹을 것을 좀 사가 지고 왔다고 해서 그렇게 감격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숙이로서는 아빠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친구들에게 실망을 안겨준 것만이 슬픔과 분노 의 껍질처럼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아빠가 오셨는데 왜 그렇게 조용하니?" 다른 때 같았으면 아빠가 왔다고 좋아라 기뻐 날뛰면서 호들갑을 떨었을 터인데, 그날은 미숙이가 조용하기만 하자 웬일인가 싶어 경옥은 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미숙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미숙은 긴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에 이르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양지 쪽의 블록 담벽 밑 에 앉았다. 미숙은 아빠가 돌아가지 전에 집에 들어가지 않을 결심이었다. 미숙은 겨울 해가 차갑게 느껴지는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보면서 담벽 밑에 쪼그 리고 앉아 있었다. 해가 바닷속으로 소리도 없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미숙의 눈 시울이 평젖었다. 어쩐 일인지 자꾸만 슬퍼졌다. 아빠가 오셨는데도 집을 뛰쳐나와 버린 자 신이 밉기까지 하였다. 날이 어두워서야 집에 돌아온 미숙은 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서운한 생각에 다시 짜증이 났다. 아버지가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왔으면서도, 막상 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미숙은 그런 자신이 더욱 미웠다. "아빠가 오셨는데 뭣 때문에 집을 나갔다가 이제야 돌아오는 거니?" 미숙이가 어둠과 함께 풀이 죽어 집에 돌아오자 엄마가 나무람하였다. 미숙은 대꾸하지 않고 저녁밥 준비를 하였다. "아빠랑 같이 있으면 엄마가 개안 수술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해버릴 것만 같아서 부러 자리를 피한 거야." 미숙은 영악스럽게도 거짓말을 잘도 나불러겼다. 미숙은 엄마에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 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크게 실망하였다. 미숙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엄마만은 속 이지 않고 싶었다. 기실 미숙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엄마를 속여본 일이 없었다. 앞을 못 보는 엄마를 속인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보다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두 선물까지 사오셨는데 나가버리다니, 네가 잘못한 거야. 오늘은 특별히 네가 보고 싶어서 한 시가이나 앞당겨서 오셨다더구나." 미숙이는 엄마가 자기의 말을 믿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요, 제가 아빠한테 잘못했어요. 엄마한테두요." "엄마한테는 잘못한 거 없다." "잘못했다고 아빠한테 전화하겠어요." 미숙이는 아빠한테 전화를 걸어 잘못을 빌기라도 해야 비에 흠씬 젖어버린 듯한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전화를 하다니 어디로?" "아빠네 집으로요." "뭐라고? 아빠네 집으로?" 경옥은 미숙의 그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경옥은 미숙에게 아빠는 병원 일이 바빠서 병 원에서 살고 있다고 여러 번 말했었는데, 미숙이 그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자 크 게 놀란 것이었다. "아빠네 집이라니 무슨 소리야?" "엄마, 이제 미숙이도 열두 살이라구요. 알 것은 다 알아요." 경옥은 딸의 그 말에 더 할말이 없었다. 경옥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 떨한 기분이 되어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였다. 경옥은 순가 자신은 미숙의 얼굴만 못 본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여러 차 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이렇듯 마음이 콘크리트벽 속에 갇힌 것처럼 답답히 본 일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미숙이는 아빠가 다른 여자하고 산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한테 오시는 건 어쩔 수 없이…" 미숙이는 하기 싫은 말을 입밖에 쏟아버리고 말았다. 그 말을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진 듯싶었다. 미숙이가 아빠의 이중 생활을 알게 된 것은 벌써 오래 전이었다. 4년 전의 일이었다. 미숙이는 짝꿍 생일 초대를 받고 학교 옆에 있는 아파트에 간 일이 있었다. 그들은 아파트에서 생일 잔치 음식을 먹은 다음, 짝꿍의 아빠 차를 타고 극장으로 만화 영화를 구경하러 갔다. 극장에서 미숙이는 아빠를 본 것이었다. 아빠가 미숙이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두 사내애와 잘생기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를 차에 태우고 극장 앞 에서 내린 다음,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것이었다. 미숙은 하마터면 큰 소리로 아빠를 외쳐 부를 뻔했었다. 어린 미숙은 너무 충격을 받아 영화도 구경하지 않고 극장 밖에 서 있다가, 영화가 끝나기를 기다려 아빠가 다시 아이들과 잘생긴 여자를 차에 태우고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숙은 이 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 른다. 온몸의 물기를 쥐어짜듯 많은 눈물이 흘렸다. 어린 미숙이의 생각에도, 앞으로는 이 보다 더 큰 슬픔을 당하지 않을 것만 같았었다. 미숙은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버스를 타고 집에까지 오는 동안 잠시도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숙은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엄마를 슬프게 해주고 싶 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숙이 혼자만의 슬픔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미숙은 늘 왜 아빠는 한집에서 같이 살지 않는 것일까 하 는 의문을 느끼곤 하였다. 그랬던 것이 아빠가 다른 여자며 애들을 데리고 극장에 온 것을 본 후로는 그런 의문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미숙은 엄마와 그 자신이 아빠로부터 버 림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미숙은 아빠에게 그것을 따질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아빠가 그들 모녀를 외면해 버린다면 살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숙이의 갑작스러운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경옥은 딸에게 할말을 잃은 채 침통한 얼굴로 괴로워하였다. 미숙은 엄마의 그 괴로워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읽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미숙은 엄마한테 그 말을 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미숙아" 경옥은 한참 후에야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러나 간절하게 딸의 이름을 불렀다. 미숙은 대 답을 하지 않고 잠자코 한참 동안이나 엄마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아빠한테는 아빠 사정이 있단다. 엄마나 미숙이한테 사정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 니 미숙이는 아빠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엄마 말 알아듣겠니?" "아빠 사정이라는 것이 뭔데요?" 잠자코 있던 미숙이가 뚜벅 물었다. 경옥은 그런 미숙이가 두려워졌다. 어린애로만 여겨 왔던 미숙이의 어느 구석에 그런 칼날 같은 생각을 감추고 있었는가 싶자 갑자기 딸이 두렵 게 느껴진 것이었다. "아빠 사정이라는 건…" 경옥은 말을 꺼내놓고 나서 얼버무리고 말았다. 다음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숙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빠 사정이라는 건 말이다…" 끝내 경옥은 말을 잇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 엄마가 얼마나 안타깝게 보였던지 미숙은, "아빠 사정이라는 것이 뭔지 엄마가 말해 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요." 경옥은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만, "그렇다고 아빠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아빠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 하는 말로 대신하였을 뿐이다. "나도 아빠를 사랑해요. 그러니까 더 아빠가 미웁다구요." 경옥은 미숙의 그와 같은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 자신도 마찬가 지였다. 그리고 김원철을 그녀로부터 자유롭게 놓아주고 싶은 것도 그만큼 사랑과 미움의 갈등의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를 완전히 놓아주지 않고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사 랑 대신 미움의 비중만 더 커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차라리 포기해 버린다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미움이 사라져 사랑만 남게 될 것 같았던 것 이다. "미숙이는 아빠하고 살고 싶으냐, 엄마하고 살고 싶으냐?" 경옥은 그렇게 묻고 나서 이내 후회하였다. 그녀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바보 같은 질문 을 한 것이었다. 경옥은 미숙의 대답을 듣지 않더라도, 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들으나마나 미숙이는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다. 그러나 미숙의 대답은 경옥이가 집작했던 것과는 달랐다. "난 엄마하고만 살고 싶어." 미숙이는 '엄마하고만'이라는 대목에 힘을 주어 분명하게 말했다. "아빠는?" 경옥이가 약간 당황하여 반문했다. "아빠한테는 아빠 사정이 있잖아." 경옥은 미숙의 그 같은 말에 가슴이 덜컹거렸다. 경옥은 미숙에게 아무 말도 묻고 싶지 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대답을 듣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열두 살인 지금 그런 말을 하 고 있는데 앞으로 더 성장하게 되면 어떻게 변할까 하고 생각하자 덜컹거리던 심장의 고동 이 멈추어버릴 것만 같았다. 경옥은 그날 미숙이가 무엇 때문에 아버지가 왔는데도 집을 뛰쳐나갔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미숙이의 말로는 경옥이가 개안 수술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는 말을 아빠한테 털어놓게 될까 봐서 자리를 피했다지만, 그런 미숙이의 말을 믿고 싶지가 않은 것이었다. 어찌했건 아빠가 왔는데도 집을 뛰쳐나갔다는 사실은 미숙이의 새로운 변 화였던 것이다. 그것은 미숙이가 아버지를 거부하기 위한 작은 반란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옥은 그런 미숙이가 두려운 것이었다. 열두 살 나이에 어른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딸 에 대해서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그와 같은 정신적 성숙이 조금도 반갑지가 않았다. 이대 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안 되겠구나 하고 경옥은 생각했다. 경옥은 미숙이와 김원철의 사이가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부녀간의 사이가 멀어져서는 안 된다 는 생각이었다. 결국 경옥이는 미숙을 위해서라도 눈을 떠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삶 때문이 아니라 미숙이의 장래를 위해서, 그리고 그들 부녀간의 견고한 관계를 지속시켜 주 기 위해서 눈을 떠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는 경옥이 자신이 미숙이의 삶을 보살펴주어 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숙아, 오늘이 무슨 요일이니?" "것두 몰라? 오늘이 아빠 오시는 날인데 한 시간 앞당겨 오신거라구 아까 말해 놓구선." "참 그렇구나. 아직도 일요일이 되려면 두 밤이나 더 자야겠구나." 경옥은 자신이 일요일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다. 그러자 미숙이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엄마도 일요일이 기다려지지?" 하고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일요일이 기다려지는구나." "이럴 땐 하루가 스물네 시간이 아니라 열두 시간, 아니 한 시간이었으면 좋겠어." "시간이 고무줄이니?" 경옥은 그렇게 말하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일요일이었다. 경옥은 새벽에 일어났다. 그녀는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파도처럼 뒤 척이다가 괘종시계가 2시를 쳐서야 얼핏 잠이 들었고 5시에 깨어났다. 같은 잠이 들지 못 했기에 괘종시계가 다섯 번 종을 치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었던 것이다. 경옥은 잠에서 깨어 누운 채로 미숙이의 자리를 더듬어보았다. 미숙이가 손에 잡히지 않 았다. 온 방안을 두루 더듬어보았으나 미숙은 그녀의 손 끝에 닿지 않았다. "미숙아, 미숙이 어디 갔니?" 경옥은 나지막한 소리로 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러나 미숙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 다. "미숙이 어디 있느냐?" 경옥은 다시 조금 전보다 좀더 큰 소리로 불러보았다. 그래도 미숙의 대답 소리는 들리 지 않았다. 경옥은 더듬거리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았으나 미숙이의 기척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간밤에 경옥은 분명 미숙이가 잠든 후에야 잠자리에 들었었는데, 이른 새벽에 어디를 갔 는지 집 안에 없음을 알게 되자 걱정이 되었다. 미숙이가 집에 온 것은 벽시계가 6시를 치고도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숨소리를 헐근거리 는 것으로 보아서 바쁘게 뛰어온 것이 분명한 듯싶었다. "미숙이냐? 너 어디를 갔다 이제 오는 게냐?" 경옥은 미숙이가 방으로 뛰어 들어오자 물었다. " 성당에 갔다 왔어요." "이 새벽에?" 경옥은 미숙이가 새벽에 성당엘 나간 적이 없었기에 놀라는 목소리로 물었다. "새벽 기도를 하려고요." "새벽 기도를 하러?" "오늘 엄마가 교구청에 가서 눈을 뜰 수 있는지 뜰 수 없는지 진찰을 받는 날이잖아요. 그래서 하느님께 엄마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어요." "얘두 참.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구나. 기도할 때는 하느님에게 부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 않았느냐." "알아요. 그런 일로 하느님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말예요. 그렇지만 처음 부탁인 걸요. 하느님은 제 부탁을 귀찮아하시지 않으실 거라구요." 경옥은 미숙이의 말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런 미숙이를 탓 할 수가 없었다. "하느님이 제게 말씀하셨어요." 미숙이가 아침을 짓기 위해 쌀을 양은 그릇에 퍼들고 부엌으로 나가려다 말고 경옥이 옆 에 앉으며 비밀을 털어놓듯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하느님께서 말씀을 하셨다니?" 경옥은 미숙이가 너무 쉽게 하느님을 입에 담고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며 물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미숙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비밀스럽게 속삭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게냐? 너는 왜 하느님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게냐?" 경옥은 부드럽게 딸을 나무랐다. "정말이어요. 내가 기도를 하고 있을 때 하느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하느님의 목소 리가 어땠는지 알아요? 꼭 꿈속에서 듣는 노랫소리 같았다구요. 너무 기뻐서 눈물이 쏟아 지려고 했다니까요." "미숙이 너 기도할 때 또 자울자울 존 게로구나." "조금 졸았어요. 새벽에 일찍 일어났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분명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 었다구요. 거짓말이 아녜요. 하느님의 목소리에 눈을 떠보았더니 졸고 있지 않겠어요? 그 렇지만 확실하게 들었어요." "그래, 뭐하고 말씀하시더냐?" 경옥은 미숙이의 말을 시답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엄마가 눈을 뜨실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 알았다. 어서 아침밥이나 지어라." 미숙은 엄마가 자기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 같은 눈치에 약간 시무룩한 표정으로 쌀그 릇을 들고 부엌으로 나갔다. 경옥은 미숙이가 부엌에 나가 아침을 짓는 사이에 방을 치우고 나서 잠시 조용히 앉아 마 음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하여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하느님이 그녀 자신의 마음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시리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눈을 멀게 한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왔던 것같이, 앞으로 눈을 다시 뜨거나 뜨지 못하거나,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뜨게 될 경우를 미루어 생각해 보고 싶었다. 다행히 눈을 뜨게 된다 면 김원철의 그늘에서 멀리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그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눈만 뜨게 된다면 미숙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을 뜨지 못 하게 될 경우엔 미숙이와 함께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김원철뿐만 아니라 미숙이에게서도 떠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께 매달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녀도 미숙이처럼 자신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약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약해진 마음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시피지가 않았다. 아침을 먹은 경옥은 미숙이를 따라서 버스를 타고 교구청에 갔다. 그날 교구청에 온 맹 인들은 경옥이를 합해 스무 명 남짓 되었다. 경옥은 젊은 수녀의 안내로 사랑의 빛 운동 창구에 가서 이름과 주소, 주민등록번호 등을 말하고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한 시간쯤 후 에 젊은 수녀의 안내를 받으며 미니 버스를 타고 교구청에서 멀리 떨어진 안과병원으로 갔 다. 안과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미숙은 잠시도 엄마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맹인들은 병원의 복도에 놓여 있는 긴 나무 의자에 앉아서 진찰 순서를 기다렸다. 젊은 아가다 수녀는 진찰 순서에 따라 맹인 한 사람씩을 데리고 진찰실로 들어갔다가 진 찰이 끝나면 다시 데리고 나왔다. 엄마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있는 미숙은 맹인들이 진찰실 에서 나올 때의 표정을 열심히 지켜보았다. 그들 얼굴에서 미숙은 나는 눈을 뜰수 있답니 다,라든가 아니면 나는 평생 눈을 뜨지 못한답니다,라는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세 사람 중에서 두 사람 정도는 눈을 뜰 수 있다는 밝은 표정이었다. 어린 미숙은 엄마 의 순서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떨렸다. 엄마는 그보다 더 떨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미숙 은 만약 의사가 엄마는 눈을 뜨지 못한다는 진단을 내린다면 어쩔까 싶어 마음이 조릿조릿 죄어드는 듯싶었다. 그렇게 되면 미숙이보다 엄마가 더 실망할 터인데, 그런 엄마를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엄마, 의사 선생님이 엄마 눈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해도 실망하지 말어. 엄마한테는 미 숙이가 있잖아." 미숙이가 엄마의 귀에 입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엄마는 상관않는단다." 경옥이도 미숙이의 귀에 대고 속삭여주었다. 미숙은 비로서 엷은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경옥이의 바로 앞 순서인 할머니니 맹인이 아가다 수녀의 안내를 받으며 진찰실로 들어가 는 것을 본 미숙은 엄마의 차례가 된 것을 알고 더 마음이 떨려왔다. 미숙은 다음이 엄마 차례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그 대신 미숙은 손가락으로 엄마의 흐트러진 머리칼 을 긁어서 가지런히 빗겨주었다. "황경옥 씨." 아가다 수녀가 맹인 할머니를 부축해 진찰실을 나오면서 출렸다. 경옥은 아가다 수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미숙이가 엄마의 손을 잡아 일으 켜주었다. "수녀님, 저도 진찰실에 들어가면 안 되나요?" 미숙이가 아가다 수녀에게 매달리는 목소리로 사정을 하였다. "넌 밖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네 엄마는 내가 잘 보살펴주겠다." 아가다 수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미숙은 진찰실 문께까지 엄마의 손을 잡고 갔다가 엄마 가 진찰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손을 놓고 돌아섰다. 아가다 수녀의 부축을 받고 진찰실에 들어간 경옥은 앉으시오, 라는 굵고 나지막한 목소 리를 듣고 나이가 지긋한 난자 의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았다.. 둥 글고 딱딱한 나무의자라는 것을 감촉으로 알았다. 그녀는 되도록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 려고 애를 썼다. "언제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까?" 의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의사가 자기의 눈을 작은 플래시로 비추어보 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열두 살 된 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하더니 아이를 낳고 나서 아주 안 보였습니다." 경옥의 말에 의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때 안과에 가시지 않았습니까?" 의사가 한참 후에 다시 물었다. "갔었지요. 그때 의사 선생님은 아기를 낳게 되면 눈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랬어요?" "네. 그래서 주변에서는 아기를 떼어버리라고 했지만 저는 아기를 낳고 말았어요. 아기를 낳고 나자 그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눈이 안 보이게 되었습니다." "임신중독 때문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의사가 천천히 말했다. "선생님, 수술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경옥의 옆에 서 있던 아가다 수녀가 물었다. 경옥은 처음부터 그 말을 묻고 싶었지만 참 았던 것이다. "글쎄요. 아무래도 각막 이식을 해야 되겠는데요. 부모님 중에 결핵을 앓은 분이 계셨습 니까?" "어려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잘 모르겠네요." 경옥은 자신이 어려서 고아원 앞에 버려졌다는 말을 하기가 싫었다. "진작에 각막의 혼탁을 제거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왜 여지껏 이대로 내버려뒀습니까?" "이식 수술이 가능합니까?" 아가다 수녀가 다시 물어주었다. "해봅시다. 다른 사람의 안구에서 동공령(瞳孔鈴)을 적출하여 이식시켜 주어야겠지만, 그 것이 불가능하다면 인공 각막을 쓰는 수밖에 없겠지요. 자, 돌아가셨다가 다음주 월요일 오 전 중에 각막 이식 수술을 할 테니 그때 다시 나오시죠" 경옥은 의사의 말에 잠시 할말을 잃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무슨 말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4. 갈등의 끝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하늘의 어느 한국석이 무너져내린 것처럼 술술 내렸다. 눈은 마치 흘러간 노래의 가사처럼 적당히 바람에 흔들리면서 내렸다. 오정매는 가벼운 팝송을 들으면 서 눈 오는 모습을 감상하였다. '내 사랑 어디에'라는 감미로운 영화 음악이 경음악으로 실내를 조용하게 적셔주고 있었다. 그녀는 음악을 들으면서 러시아의 광막한 벌판이 끝없이 흰눈에 덮인 장면을 떠올렸다. 그리고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아름다운 감상에 젖었다. 하동포구의 섬진강이 떠오 르면서 희미하게 최지훈의 얼굴이 살아났다. 그러나 죽은 최지훈에 대한 감정은 그렇게 아 름다운 것도 절실한 것도 아니었다.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답답할 뿐이었다. 그나마 이제 모습을 떠올리려고해도 윤곽조차도 확실해지지가 않았다. 오정매는 주황빛 커튼 사이로 내다보이는 바다에 눈길을 던졌다. 코발트 색 바다 위에 흰 눈이 내리는 모습에서 순결의 허무함을 느꼈다. 그 희디흰 순결을 한순간에 용해시켜 버리 는 거대한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의 몸이 알 수 없는 거대 한 형체속으로 녹아 없어지는 듯한 허무하고도 감미로운 슬픔을 느꼈다. 그녀는 눈 오는 날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짙은 남색 바탕에 하얀물방을 무늬의 머플러를 머리에 매고 외투깃을 세웠다. 그녀는 파출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파출부가 오는 대로 어머니의 예순다섯 번째 생신을 맞기 위해 친정에 가야 한다. 두 아이들은 아침 부터 전자 오락실에 가고 없었다. 처음에 그녀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갈 계획이었으나, 하룻 밤만 자고 돌아올 생각에서 혼자 떠나기로 한 것이다. 시계를 보니 9시 50분이나 되었다. 파출부가 출근하는 시각이 어느 때보다 늦다. 아마 또 언젠가처럼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오정매는 창문 밖 바다위에 내리는 눈을 구경하다가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송수화기를 들 었다. "나야,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데 괜찮겠어? 길 미끄러울 텐데 기차로 가지 그래." 남편이었다. 이제 막 병원에 도착했을 시간인데 외투를 벗어 걸기가 바쁘게 전화를 한 모 양이었다. 정매는 그런 남편이 고마울뿐이었다. "염려 말래두요. 내 걱정 말고 오늘 집에 일찍 들어오시는 거 잊지나 마셔요. 당신이 일찍 들어와서 아이들을 돌봐주셔야죠. 지금 전자 오락실에 갔으니까 집에 전화도 좀 자주 넣어 보시고요. 전 내일 아침에 오겠어요."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어쩐지 목소리가 부드럽지 못했다. 정매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여보, 그럼 나 다녀올께요." 하고 찐득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송수하기를 놓았다. 오정매가 남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고 다시 코발트 색깔의 겨울 바다를 바 라다보기 시작할 즈음, 딩동댕 딩동댕부저가 다급하게 울렸다. 정매는 파출부가 이제야 온것 이라고 생각하고 큰 소리로 문 열렸어요, 하고 소리쳤다. 그런데도 계속 부저가 울렸다. 정매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얼굴을 밖으로 내밀었다.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은 파출부가 아니고 우체부였다. "등기요, 오정매 씨한테 온 거요." 역삼각형의 세모꼴 얼굴에 주근깨가 많은 젊은 우체부가 기계적은 목소리로 퉁겨댔다. 오정매는 현관의 편지꽂이 속에 넣어둔 빨간 빛깔의 도장을 껴내 우체부에게 건네주며 등 기 편지를 받아들었다. 순간 그녀는 온몸의 피돌기가 멎으면서 사지가 흐물흐물 녹아 내리는 듯한 아찔한 현기증 을 느꼈다. 편지의 겉봉의 씌어 있는 발신인은 분명 최지훈이었다. 청색 볼펜으로 쓴 최지훈이라는 한자(漢子) 석 자가 꽃뱀처럼 살아서 혀를 널름거리는 것 만 같았다. 그녀는 너무 놀라 우체부에게서 도장을 되돌려받는 것조차 잊은 채 멍하게 서 있었다. 그러자 우체부가 오정매의 빨간 수정 도장을 신발장 위에 놓고 문을 닫았다. 오정매는 등기 편지를 받아들고 한동안 멀뚱한 표정으로 현관입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다시 여러 차례 부저가 울렸지만 문을 열어주는 것조차 잊고 그대로 허수아비처럼 서 있기 만 했다. "문이 열려 있었고마. 그란듸 사모님은 어째 그라고 서 계싱교? 지 때문에 화가 나셨능 교? 참말로 죄송합니데이. 우리 막둥이가 급작스럽게 배가 아파서예..." 그제야 오정매는 파출부한테는 대꾸도 않은 채 침실로 들어가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들고 침대 위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그녀는 편지를 뜯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죽은 사람한테서 편지가 오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편지 봉투를 뜯으면 봉투 속에서 죽은 최지훈이 불쑥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두려운 생각에 편지를 침 대 위에 팽개쳐버렸다. 팽개친 편지를 한참 동안 두려운 눈으로 바라바고 있자니 그 편지가 꿈틀꿈틀 상아서 움 직이는 것만 같았다.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파출부가 조심스럽 게 방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사모님, 시장에 갔다 올까예?" 파출부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정매에게 물었다. 정매는 대답이 없었다. "깍두기를 좀 담을까예?" 파출부가 다시 물었을 때에야 정매는 넋나간 얼굴로, "그러세요" 하고 겨우 말했을 뿐이었다. 그때까지도 정매는 침대 위에 팽개쳐 둔 흰 봉투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파출부는 정매가 시장 볼 돈을 주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나 지금 가겠어요." 정매가 애매하게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편지를 집어 검정색 털코트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아줌마, 저 시골에 좀 갔다가 내일 오겠어요, 아이들이 전자 오락실에 갔으니까 언제 올 지 몰아요. 그러니 애들이 들어올 때까지 집을 비우지 마세요." 정매는 끈이 긴 숄더백을 왼쪽 어깨에 메고 아파트를 나서며 파출부에게 말했다. 그녀는 파출부의 잘 다녀오라는 인사말을 꿈속에서처럼 어렴풋하게 들으며 엘리베이터에 몸 을 실었다. 그녀는 마치 하얀 공백으로 텅 비어버린 듯한 마음으로 택시를 잡고 터미널로 향했다. 그 녀는 택시를 타고 터미널까지 가는 동안 바람에 날리는 눈발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코트 주머니의 편지에 대한 생각을 잊어보려고 애썼다. 습기 때문인지 택시 안에서는 석유 냄새 가 짙게 풍겨왔다. 정매는 버스가 터미널을 출발하여 만덕터널을 지나서야 덜컹거리는 마음을 다독이며 코트 주머니에서 최지훈의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기 전에 발신임을 다 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이름은 분명 최지훈이었는데, 발신인의 주소가 진주교도소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꾸적꾸적해진 겉봉투의 우표에는 '89.9.4'라는 소인의 날짜가 찍혀져 있었다. 그제야 정매는 그 편지가 최지훈이 교도소에 있을 때 부친 편지라는 것을 알았다. 날짜대로라면 최지훈이 교도소에서 병보석으로 출감하기 한 달 전쯤이었다. 그녀는 최지훈이 출감하기 전에 부친 편지가 왜 이제야 배달된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오정매는 최지훈이 죽기 전에 교도소에서 쓴 편지의 겉봉을 뜯었다. 그리고 내용을 꺼내 들었다. 나의 영혼이며 희망인 정매 편지는 이렇세 시작하고 있었다. 정매는 첫대목을 읽다 말고 잠시 눈을 창밖에 던졌다. 눈발은 여전히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차갑게 녹아내리고 있는 듯싶었다. 잠시 후 정매는 다시 창밖으로부터 시선을 회수하여 최지훈의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마치 최지훈이 살아서 그녀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쩌면 정매를 다시 보지 못하게 될 것 같소, 나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오, 나의 육 신이 먼지처럼 부스러져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오. 그런데도 내 영혼만은 횃불처럼 뜨겁게 타오르면서 나의 육신을 불사르고 있소, 어쩌면 나의 육신은 영혼을 밝히기 위한 장작이거 나 기름덩이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오. 그러나 나는 나의 육신이 스러져가고 있다는 것이 조금도 아쉽거나 두렵지가 않다오. 육신이 불타서 영혼을 보다 밝게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하 면 오히려 희열을 느끼게 된다오. 더구나 나의 썩어가는 육신을 불태워 밝히게 될 나의 영 혼이 정매를 향한 사랑의 불화살이라고 생각하면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가 않다오. 나의 영 혼이며 생명인 정매, 그 동안 우리는 이렇게 떨어져 있고 또 앞으로도 다시 만날 수 없게 될지라고, 정매는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 아니 나의 뜨거운 영혼속에 살아 있었고, 또 영 원히 살아남게 될 것이오. 정매는 거기까지 읽고 나서 다시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정매는 편지를 핸드백 속에 넣고 다시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눈을 감자 최지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떠오르는 그의 모습을 애써 지우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가능한 한 최지훈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그에게 좋은 감정을 가졌던 기억들을 생각해 보려고 애를 썼다. 그의 옆에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웠다. 조금도 불안하지가 않았다. 그가 정매 자신을 해치 게 되리라는 두려움 느껴본 일은 단 한번 도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같은 과의 남학생들 과 함께 있다 보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하지가 못했다. 그녀는 언제나 다른 남자들 앞에서 는 자신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버리곤 하였다. 그렇지만 최지훈의 옆에 있으면 한없이 자유 로웠으며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지껄일 수가 있었다. 그냥 그의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 하고 자유롭고 부담감이 없었다. 그것은 정매가 그를 믿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대학교 2학년 때 여름이었다. 정매는 최지훈과 함께 학교 뒷산에서 밤을 밝힌 일이 있었 다. 학교 근처에서 함께 저녁을 먹은 후에 커피숍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학교 뒷산으로 산책 을 나갔다가, 다리가 아파서 풀섭에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그만 밤이 너무 깊어버린 것이었 다. 지취방에 가봤자 방문을 열어놓을 수가 없기에, 더위에 땀을 흘려야 할 터였다. 하지만 학교 뒷산은 바람도 넉넉하게 부는데다 조금도 덥지 않았다. 게다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들을 마음대로 처다볼 수 있어 좋았다. 그 때문에 정매 쪽에서 먼저 산에서 밤을 새우자고 제안했었다. 최지훈은 그냥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정매가 떼를 쓰다시피 하여 밤 을 밝히기로 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몸을 바짝 붙이고 어둠 속에 앉아서 밤이 깊어 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그러다가 새벽녘이 되자 그들은 풀섶 위에 나란히 누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노래를 불렀다. 다소 새벽 공기가 삽삽해지자 최지훈은 그의 와이셔츠를 벗어서 정매를 덮어주기까지 하엿다. 그리고 그녀는 최지훈의 팔을 베고 누운 채 새벽녘에 어핏 잠 이 들고 말았다. 그날 밤 최지훈은 정매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기껏 그의 팔으 베게 해준 것뿐이었다. 어쩌면 정매 쪽에서 은근히 최지훈이 그녀의 몸에 손을 대주기를 기대했었는지도 몰랐다. 정매가 얼핏 잠이 들었다가 깨었을 때는 미명의 어둠이 서서히 허물을 벗기 시작하고 있 었다. 그때가지도 최지훈은 자지 않고 있었다. 정매가 그에게 왜 한숨도 눈을 붙이지 않고 말똥말똥 밤하늘만 쳐다보고 밤을 새웠는냐고 물었더니 그는, "잠을 자기가 너무 아까워서." 하고 정매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그는 말없이 싱긋이 웃을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편안한 마음과 자유스러운 기분을 사랑의 감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더욱이 그녀는 꽁생원처럼 꼼꼼하고 자제력이 강한 그에 대해 서 오히려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그의 말은 언제나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정매가 그에게, "도대체 지훈이는 감정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내가 알기로 가장 인간적인 사람은 감정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지훈이는 비인간적인 사람이야. 솔직하지 못 하다는 거야, 내 말은." 하고 말했더니, 그는 버릇처럼 소리 없이 싱긋이 웃곤, "정매는 내가 감정대로 살기를 원하나? 그렇게 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 게 된다구." 하고 애매한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 무렵 정매를 좋아하는 남학생이 있었다. 시를 쓴다는 그 남학생은 최지훈에 비해 감정 이 너무 풍부해, 걸핏하면 울고 싶다는니 죽고 싶다느니 하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장문의 편 지를 보내 사랑의 고백을 해왔다. 정매가 그 편지를 최지훈에게 보여주었더니 그는 씨익 웃 으며 이 친구가 부럽구나, 할 뿐이었다. 장문의 편지를 보내 사랑을 고백한 그 남학생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은 정매는 거리 낌없이 해운대로 나갔다. 둘이는 바닷가 모래밭을 거닐었다. 그리고 다시 송림 속으로 들어 갔다. 그때 그 남학생이 키스를 하고 싶다면서 그녀를 껴안으려고 하였다. 그 순간 정매는 갑자 기 그가 징그럽게 느껴졌다. 그의 달콤한 말들에도 역겨움을 느꼈다. 정매는 다시 그를 만나 지 않았다. 그가 계속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지만, 그가 써보낸 편지의 내용들이 모두 공허하 게만 느껴졌을 뿐이었다. 시를 쓴다는 그 깡마른 남학생이 정매에 대해서 열을 올리고 있을 바로 그 무렵, 최지훈 은 끔찍한 사고를 저질렀으면, 피를 흘리고 그녀의 자취방으로 뛰어 들어와 정매의 몸을 소 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가 정매를 요구했을 때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 를 맞아주었다. 그렇지 않고 며칠 전 해변에서 그의 요구를 거절한 탓으로, 마음이 무거워 있던 터였다. 더욱이 그가 피 흘리는 몸으로 미친 듯 달려들자 그녀는 가슴 저미는 연만과 동정심으로 그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그녀는 사랑의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 지는 않았다. 다만 어렸을 때 친구들과 소꿉놀이를 했던 것처럼 아무런 부끄러움도 특별한 감정도 없이 그냥 그것을 경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고, 그 대상이 오래 전부터 친구로 지 내온 최지훈이었다는 것에 마음이 놓였다. 그렇다고 정매가 다른 남자에 대해서 그 같은 감정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 남편에 대해서도 그런 신비롭고 은밀하고 황홀한 사랑의 감정을 가져본 일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남편의 옆에 있는 것이 옛날 최지훈의 옆에 있을 때보다 더 마음이 편안하지도 자유스럽지도 않았다. 남편 곁에 있을때는 이상하게도 자존심이 꿈틀거리면서 체면을 차리고 싶었고, 남편에게 그녀의 약점이나 결점 같은 것을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최지훈의 앞에서는 그렇지 않았었다. 그의 앞에서 결점이나 약점을 감추고 싶지가 않았었다. 그렇다면 감정의 비중이 누구에게 더 쏠려 있단 말인가? 정매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확실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편안함과 자유로움이 사랑의 감정이라면 분명 최지훈 쪽이 더 확실했지만 말이다. 버스가 하동에 도착하자 정매는 서둘러 역 앞으로 향했다. 집에 가기 전에 역전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최지훈의 어머니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상하게 최지훈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연만의 정을 갖고 있었다. 굳이 최지훈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의 어머니의 삶에 대해 오래 전부터 연민의 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점심때가 지남 식당에는 손님이 없었다. 지훈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 계셨던 나이 많은 아주머니 그만두셨습니까?" 정매는 점심을 먹을 양으로 국밥을 주문하고 너서 뚱뚱한 식당 여주인에게 지훈 어머니에 대해 물었다. "나이 많이 아주머니라면 점백이 할매 말잉교?" "점백이 할머니? 아 예, 그래요, 떡장수 점백이 할머니 말입니다." 정매는 친정 어머니가 지훈 어머니를 점백이네라고 부르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렇게 말했 다. "그만뒀다 아입니꺼." "그만두셨다구요?" "아들 죽은 후부텀 시들시들허드니 몸져눕고 말았지예." "그래 어디가 어떻게 편찮으시답니까?" "병원에도 가봤다는듸... 특별히 나쁜 곳은 없다 카는데도 기력이 없어갖고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캅니다." 정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국밥을 몇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식당을 나 와 서둘러 지훈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지훈의 집 가까운 가게에서 선물용 과일 꾸러미를 사들고, 지훈과 함께 다녔던 모교 앞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빼기 위로 올라갔다. 식당 주인의 말로는 탱자 울타리 집도 열흘 전쯤에 팔고, 이달 안으로 집을 비워주게 되었다는 것을 보 면, 아직 지훈의 어머니는 그 집에 눌러살고 있는 듯싶었다. 탱자 울타리가 둘러 있는 집은 빈 집처럼 썰렁하게 느껴졌다. 지난 초겨울 박문호와 같이 왔을 때는 닭이라도 몇 마리 마당을 지키고 있었는데, 지금은 눈을 뿌리고 난 후의 하늘처 럼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었다. 마당에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정매는 대문도 없는 탱자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서 잠시 집 안을 둘러보았다. 토마루에 흰 고무신 두 짝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보니 방안네는 지훈의 어머니가 누 워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토마루 가까이 걸어가서 큼큼 헛기침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목 소리를 가다듬어, "아주머니 계십니까?" 하고 통기를 하였다. 그러나 방안에서는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정매가 목소리를 조금 높여 다시 통기를 하였다. 최지훈의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병색이 짙은 얼굴을 내민 것은 그로부터 10여 분이 지나 서였다. 지훈의 어머니는 첫눈에 정매를 알아보지 못하고, "누가 왔능교?" 하고 뜨악한 목소리로 물었다. "접니다. 정매예요." 그녀가 토마루에서 방문 쪽으로 허리를 꺾고 큰 소리로 말해서야 지훈 어머니는 정매를 알아보고는 병색으로 찌든 얼굴에 반가움을 나타냈다. "아가씨가 어쩐 일잉교?" 지훈 어머니는 반색을 하며 비척비척 일어섰다. "일어서실 것 없어요. 제가 들어갈게요." 정매는 다급하게 말하고 방안으로 들어가 문지방을 잡고 겨우 일어선 지훈 어머니를 부축 했다. 냉습한 방안에서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저분한 살림이며 헌 옷가지 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앉으시지요." 정매는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낡은 이불을 한쪽으로 밀치고 지훈의 어머니를 부축하여 앉혔다. "어디가 아프셔요? 식당에 들렸더니 편찮으시다기에 왔어요." 정매가 지훈 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 물었다. "죽고 싶은 생각뿐이라예. 내같이 지지리 복조가리도 없는 년 더 살아서 머허겠능교 하루 라도 어서 눈 감고 땅 속에 묻히고 싶은 생각뿐이라예." 그러면서 지훈의 어머니는 슬픈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한동안 오열했다. 정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훈 어머니를 위로해 줄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기실 생각해 보면 위 로해 줄 말도 없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희망을 가지세요." 정매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밷은 그 말도 공허할 뿐이라는 것 을 알고 있었다. "희망이라니, 나같이 박복한 년한테 희망이라니..." 지훈 어머니는 손둥으로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정매는 최지훈의 어머니를 통해서 비극적인 여인의 한 전형을 보았다. 갑자기 인간의 삶 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느꼈다. 평생을 통해서 단 한 번도 행복한 시절을 경 험해 보지 못한 이 비극적이고도 처절한 한 여인의 모습에서 죽음보다 더 쓸쓸한 삶을 느낀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부끄러움과 괴로움이 동시에 자신을 압박해 왔다. 지훈 어머니 가 이렇듯 비참해진 것이 정매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절감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나는 죽어야 허는구만. 살아갈 낙이 없다 아닝교. 그래도 우리 지훈이 그노마가 감옥에서 래도 살아 있을 때꺼정만도 이러케 눈 앞이 캄캄허지는 않았다 아입니꺼. 그란듸 그노마 자 석이 뒈진 후부텀은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그냥 칵 죽고만 싶은 거라예." 지훈 어머니는 온몸을 비틀어 물기를 쥐어짜듯 어깨를 들먹이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 녀의 서러움에는 끝이 없어 보였다. 그런 지훈의 어머니를 마주보고 앉아 있는 정매는 가슴 이 메어왔다.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지훈 어머니는 영락없이 죽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이 집도 팔아치웠지예. 아무 낙도 없이 혼자서 집 지키고 사는 것도 싫고 해서... " 지훈 어머니가 눈물과 콧물을 한꺼번에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이 집을 팔고 어찌하시려구요?" "지훈이 약값 대느라고 빌린 돈이나 갚고 죽어야 할 것 아닝가예. 그래서..." "어디 가 계실 데는 있어요? " "우리 지훈이 따러가야 하지 않겠능교. 아 세상에 그기밖에는 갈 데가 또 어디 있겠능교. 지훈이 그노마도 에미가 빨리 오기를 기다릴 꺼라예." "왜 그런 말씀을 하셔요. "아니라예. 내 소원은 그것뿐이라예. 어서어서 지훈이한테로 가는 것이 소원이라." 정매는 답답했다. 그렇다고 지훈 어머니를 이대로 외면하고 발길을 돌려버리고 싶지는 않 았다. 그녀는 사색이 되어 겨우 마지막 꺼져가는 불처럼, 눈빛만 남아 있는 지훈 어머니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살아 있는 부분은 눈빛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눈빛 속에는 슬픔과 원망과 고통과 절 망이 엉켜 있었다. 사람이 일생을 산다는 것이 이처럼 고통스럽고 허무한 것이라면, 무엇 때 문에 아등바등 숨가쁘게 매달리며 사랑하고 미워해야 하는 것인지 허무한 생각만 들었다. "그래도 아주머니, 지훈 씨도 아주머니께서 이러시는 것을 원치 않으실 거예요. 그러니 기 운을 차리셔야 해요." 정매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무거운 마음으로 힘겹게 고개를 들어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 녀의 짐작에 지춘 어머니는 입에 곡기를 끊고 있는 것 같았다. 아예 식음을 폐하고 죽기를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주머니, 끼니는 어제 때우셨어요? 오늘 점심은 드셨어요?" 정매가 물었으나 지훈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아침은 드셨나요?" 정매가 다시 큰 소리로 물었다. 정매가 보기에 지훈 어머니는 아침은커녕 며칠 동안 전혀 음식을 입에 넣지 않은 듯싶었 다. 그녀는 우선 지훈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엌으로 나갔 다. 부엌에는 음식을 마련할 재료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쌀이 어 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지훈 어머니는 쌀이 없다고 하였다. 지훈 어머니의 그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정매 는 다시 부엌으로 나가 석유 곤로에 불을 피우려고 하였으나 곤로에는 석유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았다. 천장을 열어봤으나 먹다 남은 반찬도 없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칼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그녀가 사온 사과를 깎아서 즙은 냈다. 양은 그릇에 사과즙을 만든 정매는, "자, 아주머니, 이거라도 접 마셔요. 그리고 기운을 차리셔야지요." 하면서 지훈 어머니 앞에 들이밀었다. 처음에 지훈 어머니는 아무 것도 먹기 싫다면서 고개 를 가로저었다. "그러지 마시고 어서 드셔요. 제 성의를 봐서라도 좀 드시고 힘을 내셔야지요." 정매가 사과즙이 반쯤 담긴 양은 그릇을 들고 말하자 지훈 어머니는 마지못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정마를 바라보더니, "아기씨 성의를 봐서 마시는 거라예." 하고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저의 성의를 봐서 마시세요. 그리고 이제부터 저한테 아기씨라고 하지 말아요. 그냥 정매라고 하시든가 아니면 원주 엄마라고 하세요." 정말이지 정매는 지훈 어머니로부터 아기씨라는 말을 듣기가 거북스러웠다. "원주 엄마라고예?" "그래요. 원주 엄마라고 부르세요. 원주가 큰 아이거든요." "몇 살잉교?" "열 살입니다." "원주 엄마..." 지훈 어머니는 희미하게 말하고 나서 여러 차례 나누어 사과즙을 마셨다. 지훈 어머니는 사과즙을 마시고 나서 트림을 하였다. "벌써 열 살 된 아들이 있구만." 지훈 어머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결혼한 지 십 년이나 지났으니까요." 10년, 정매는 그 10년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10년이라는 세월 은 그녀가 변신하기에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 잠깐 나갔다 오겠어요." 정매가 일어서며 말하자 지훈 어머니는 따라 이렁서려다 말고 비척거리다가 힘없이 주저 앉고 말았다. "잠시 나갔다 오겠으니 그냥 누워 계세요." "다시 오실 필요 없는 기라. 그냥 가보이소." 지훈의 어머니는 정매가 다시 오겠다는 말에 오히려 부담감을 느끼는 듯하였다. 정매는 코트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년느 지훈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좀 마련해 주고 싶었다. 그 녀는 언덕빼기를 내려가 가게가 있는 큰길로 나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있 었고 햇살이 넉넉하게 쏟아져내렸다. 바람은 차가웠으나 햇살은 겨울답지 않게 따사로웠다. 그 따사로운 햇살 때문에 눈이 녹느라 길바닥이 질퍽거렸다. 가게로 나온 정매는 쌀과 석유와 쇠고기 등을 사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사가지고 온 것들을 부엌에 놓고 방에 들어가서 코트를 벗었다. "그냥 가시라니께 왜 다시 돌아왔능교?" 정매가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방으로 들어가자 지훈 어머니는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가 힘겹게 일어나며 가래 끊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이불을 한쪽으로 밀쳤다. "일어나지 마시고 그냥 누워 계시래두요." 정매는 억지로 지훈 어머니를 뉘고 이불까지 덮어준 후 부엌으로 나갔다. 그녀는 석유 곤 로에 기름을 붓고 불을 피운 다음 밥을 안치고 쇠고기를 잘게 썰어 국거리를 만들었다. 그 녀는 지훈 어머니를 위하여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어쩌면 10년 전에 지훈이가 그 사건을 저지르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의 아내가 되어 지훈 어머 니의 음식을 마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정매는 석유 곤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밥물이 보그르르 넘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밥이 넘자 그녀는 밥솥을 내리고 쇠고기 국을 끓이기 위해 냄비를 얹었다. 그녀는 국이 끓 기를 기다리며 그대로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방안에서 지훈 어머니가 쏟아내는 기침 소리 가 들렸다. 그녀는 잠시 아파트와 그의 가족들을 잊었다. 반쯤 열어놓은 부엌문 밖의 마당에 겨울 햇살이 꽃잎처럼 화사하게 꽂혀내렸다. 휘익 찬바람이 한 움큼 햇샇에 실려 부엌문을 밀고 들어왔다. 등짝이 시려왔지만 참았다. 그녀는 부엌 살림들을 둘러보았다. 부엌이 마치 포장마차 속처 럼 초라해 보였다. 한쪽 문이 떨어져나간 낡은 신장 같은 찬장 외에 둥근 알루이늄 밥상이 며 석유 곤로와 작은 알루미늄 밥솥, 그리고 찌그러진 냄비와 양동이, 플라스틱 도마와 자배 기 등이 부엌 살림의 전부였다. 혼자 사는 늙은 여자의 부엌은 너무 노촐했다. 삶의 고달픈 흔적처럼 조촐한 분위기 때문에 마음이 음울해지기까지 하였다. 그런 기분과 함께 정매는 지훈 어머니에 대해 다시금 뜨거운 연민의 정은 느꼈다. 정매가 노란 알루미늄 상에 음식을 차려들고 방으로 들어섰을 때, 지훈 어머니는 이불을 걷고 등을 벽에 기댄 채 밥상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한껏 목을 길게 늘이고 앉아 있었다. "자, 밥도 짓고 고깃국도 끓였으니 좀 드셔요." 정매가 밥상을 지훈 어머니 앞에 놓으며 말했다. 지훈 어머니는 말없이 넋나간 얼굴로 정 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드셔요. 간이 맞을는지 모르겠네요." 정매는 그러면서 숟가락을 지훈 어머니의 손에 쥐어주었다. 지훈 어머니는 여전히 말 한 마디 없이 정매를 찬찬히 들여다보기만 하였다. "왜 그렇게 들여다보셔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그러자 지훈 어머니는 눈시울이 펑 젖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서 드셔요. 드시고 기운을 차리셔요. 지훈씨도 아주머니가 이러신느 것을 원치 않을 거 예요. 지훈 씨가 알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정매가 여러 말을 하면서 음식을 권했지만 지훈 어머니는 정매가 쥐어준 숟가락을 든 채 여전히 젖은 눈으로 그녀를 오랫동안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는 힘없이 숟가락을 놓 아버렸다. "왜 이러셔요?" "아기씨... 아니 원주 어머니, 참말로 고맙구만요. 허지만 나는 더 살고 싶지가 않은 거라 예. 원주 어머니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더 살아서 멋허겠능교. 나한테는 인제 아무 희망도 없는데, 더 살아서 어쩌겠능교. 그리아 내 걱정은 그만하시이소. 나 같은 거 죽든지 살든지 내비두이소 내는 그저 하루라고 빨리 우리 즈훈이 놈한테로 가는 것이 소원이라예. "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소나무 삭정이처럼 앙상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지훈 어머니 의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슬픔의 봇물이 터지기라도 한 듯 좀처럼 눈물이 멎 지 않았다. 그것을 본 정매는 가슴이 꽉 메어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쏟고 말았다. 거 대한 나무 뿌리 같은 연민의 정이 뼏질러오므면서 온몸이 흐물하게 녹아내리는 것처럼 고통 스러운 슬픔에 젖고 말았다. 지훈 어머니와 정매는 한동안 그렇게 울었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의 선을 꼭 잡고 있었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의 손애서 기운 빠진 노 인 의 몸에서 느낄 수 있는 차갑고도 끈끈한 체온을 온몸으로 가늠하였다. "아주머니, 희망을 가지셔요. 아주머니한테도 희망이 남아 있어요. 비록 지훈 씨는 죽었지 만, 지훈 씨가 이 세상에 남긴 귀한 것이 있다구요." 정매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지훈이가 남긴 거라니... 우리 지훈이가 무엇을 남겼다고 그러능교?" "핏줄이어요. 핏줄을 남겼어요." "핏줄이라니? 무신 핏줄 말잉교?" 지훈 어머니는 정매의 말에 눈물이 얼룩진 얼굴을 들고 거듭 물었다. "원주 어머니, 방금 우리 지훈이가 핏줄을 남겼다고 했능교? 그거이 무신 말잉교?" 지훈 어머니가 정색을 하고 거듭 물었으나 정매는 대답을 못 하고 당황한 눈빛을 감추었 다. "어디에... 이 세상에 지훈의 핏줄아 있다는 말잉교?" 지훈 어머니가 정매의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다그치듯 묻고 있는 지훈 어머니 눈시울에 일말의 기대와 희망의 빛이 살아나고 있는 듯싶었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의 그 모습이 보기 에 너무도 좋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런 모습을 하고 살아가 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것은 서리를 맞아 고스러져가고 있는 풀잎이 아니라, 생명의 봄비를 맞고 싱그럽게 몸을 털고 일 어서는 신록의 모습과도 같았다. "그래요. 지훈 씨는 핏줄을 남겼어요. 그러니 기운을 차리시고 희망을 갖고 사셔야 해요." 정매는 지훈 어머니의 그 보기 좋은 모습에 취해 그렇게 말했다. "지훈이 핏줄이라면... 지훈이 자식이? 아니라예. 우찌 나를 병신 맹글라고 그러시는가예. 나는 믿지 몬하겠소. "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순간 지훈 어머니의 얼굴은 다시 절망 의 늪 속에 가라앉아 참담하리만큼 처절하게 녹아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다 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정말이에요. 지훈 씨의 핏줄이 바로..." 정매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섬뜩 놀랐다. "뉘깅교? 어디 있능교?" 지훈 어머니가 크렁한 눈을 정매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온몸을 들썩거리는 자세로 다급 하게 물었다. "우리 원주가...원주가..." 정매는 너무 쉽게 말하고 나서 가느다랗게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의 온몸이 촛물처럼 묽게 녹아내린는 것 같은 허탈감과 눈앞이 아득한 절망감과 두려움에 떨었다. 고 통스러운 쇠사슬에서 풀려나기라도 한 듯이 심신의 자유와 평화를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녀 는 거듭 한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표정이 갑자기 얼음처럼 싸늘하게 굳어졌다. 정매는 한숨 만 몰아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이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금방 자신이 한 말을 강하게 부정하고 싶기도 했다. "원주? 원주라 캤능교?" 지훈 어머니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정매를 찔러보며 숨가쁘게 물었다. 정매는 여전히 얼어 붙은 표정으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참말잉교? 원주라면 바로? 열 살 났다는..." 정매는 다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지훈 어머니는 스 순간 두 손으로 정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한동안 소리내어 울다가는 혼절하여 방바닥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정매가 급히 부엌으로 나가 냉수 한 사발을 따다 마시게 하자, 지훈 어머니는 가까스로 정신을 수 습하였다. "우리 지훈이가... 우리 지훈이 핏줄이..." 지훈 어머니는 그후로도 몇 차례 더 혼절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때마다 정매가 찬물 어 수건을 적셔 얼굴을 닦아주었고, 지훈 어머니는 촛불이 바람에 깜빡이는 것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하였다. 정매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지훈 어머니의 옆에 붙어 있었다. 그녀는 해 가 떨어지자 전깃불을 켰다. 지훈 어머니는 얼핏 잠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지훈 어머니가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끝내 그녀의 마음속 깊숙이 묻어두었 던 비밀을 쏟아놓고 만 자신을 탓했다. 뼈져리게 후회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오랫동안 목구 멍에 담고 있었던 썩은 핏덩이를 토해내 버린 것처럼 후련하기도 하였다. "지훈이 새끼가... 내 새끼가..." 얼마 후 지훈 어머니가 잠에서 깨어나 끈적한 눈길로 정매를 쳐다보며 꿈속에서처럼 중얼 거렸다. "정신이 드셨어요? 그 동안 잠이 드셨답니다. 한 시간쯤 주무셨어요." 정매가 지훈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보는 지훈 어머니의 눈길이 약간 끈적 하게 달라졌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꿈을 꾼 것은 아니겠제?" 지훈 어머니는 자신이 잠들기 전 정매한테서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확인이라도 하고 싶다 는 투로 물었다. 정매는 말이 없었다. 그러자 지훈 어머니가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가, "우리 지훈이고 그것을 알고 있었능교?" 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침착한 목소리를 물었다. "아뇨" "그라믄... 그라믄 우리 지훈이 핏줄을 한 번 볼 수 있겠능교?" 지훈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정매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죄송해요. 그건 안 됩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비밀로 해두셔야 해요. 정말 부탁이여어 요. 우리 원주가 지훈 씨의 핏줄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아주머니와 저 이렇게 둘이만 아 는 거예요. 그 아이를 만나실 생각 마시고, 그저 이 댁의 핏줄이 끊기지 않았거니하고만 생 각하고 계셔요. 만약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제가 얼마나 곤란하겠어요. 그렇게 되면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원주가 지훈 씨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거예요. 그러니 제발, 혼자만 알고 계세요. 그리고...그리고 이 세상에 지훈 씨의 핏줄, 아니 아주머니의 손자가 살 고 있거니 하시고 기운을 차리셔요. 기운을 차리시고 사셔야 언젠가는 원주를 만나볼 수 있 지 않겠어요? 아셨죠? 제 부탁대로 하시는 겨죠? 그러니 희망을 가지고 사셔야 해요. 그리 고 꼭 비밀을 지켜주세요. 비밀을 지켜주시지 않으면 저도 마음이 바뀔 거예요." 정매의 다짐하는 말에 지훈 어머니는 거듭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금방 얼굴에 생 기가 퍼졌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로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비밀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마 음이 놓였다. 지훈 어머니는 정매 말대로 기운을 차려야겠다는 각오를 하였는지, 웟목에 치 워놓은 상을 끌여당겨 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그 사이 정매는 식어버린 고깃국을 데워왔다. "그럼 전 가보겠어요. 꼭 제 말대로 하셔야 해요." 지훈 어머니가 고깃국에 밥을 말아 떠먹기 시작한 것을 보고 일어서며 정매가 말했다. 정 매가 코트를 입고 방에서 나가려 할 때 지훈 어머니가 따라 일어섰다. 지훈 어머니는 무릎 을 짚고 힘겹게 일어서는 이윽히 정매를 바라보았다. "친정으로 가실랑교?" 분명 정매와 지훈 사이에서 손자가 태어났음을 정매의 입을 통해서 들었음어도 지훈 어머 니는 그녀에게 존대말을 썼다. "친정에 갔다가 내일 아침에 부산으로 가겠어요. 내일이 친정 어머니 생신이거든요." "참 그렇고마. 마님 생신이 이때지예. 우짤고, 마님 생신날 찾아가 뵈입지도 몬하고... 내가 사는 기 이래 갖고..." 지훈 어머니는 그러면서 정매의 손을 꼭 쥐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기운 차리시고 희망을 갖고 시시는 거 잊지 마셔요." 정매가 촉촉히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믄요. 그리 하겠심더. 내일부텀이라도 일어나서 식당에 다시 나가겠심더. 그나저나 참 말로 고맙고 또 고맙데이. 우리 지훈이가 이 소식을 알면 참말로 좋아할 낀데..." 지훈 어머니는 마당까지 따라나오려고 하였다. 정매는 억기로 지훈 어머니를 방안으로 들여며보내고 서둘러 언덕길을 내려갔다. 6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날이 완연히 어두웠다. 그녀는 큰길로 나와 생각없이 걸었다. 감당할 수 없 을 만큼 머리 속이 뒤숭숭해지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초조해졌다. 큰 죄를 지은 사람 처럼 가슴이 심하게 덜컹거렸다. 그녀는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하였지만 이미 혼란해질 대로 혼란해진 마음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남편과 원주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남편이 무서운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는 환영에 온몸의 피돌기가 멎어버린 느낌이었다. 이상하게도 지훈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경솔했을까? 원주에 대한 비밀이 유지되지 못하면 어찌할까? 이 사실이 세상에 알 려지면 어찌될까? 정매는 불안한 생각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부옇게 어둠이 내리는 하늘을 꿰뚫어보고 서 있었다. 큰길 건너편에 다방 간판이 보였다. 정매는 길을 건너 2층 다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커피를 시켜 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 다. 텔레비전에서 코미디언들이 떠들어 댔으나 그녀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커피가 다 식을 때까지 넋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부산으로 돌아갈 일 이 두려웠다. 지훈 어머니가 텔레비전 수상기의 부라운관에서 얼굴을 내밀고, 원주는 내 손 자다, 하고 외쳐댈 것만 같았다. 낡은 목조 건물의 2층에 있는 사랑방 분위기 같은 다방에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앉아서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에 가슴을 죄던 정매는 한 시간쯤 후에야 택시를 잡아타고 친정으 로 향했다. 그녀는 친정 마을에 거의 다 와서야 어머니의 생신 선물도 사지 않은 채 빈손임을 알았 다. 친정에는 언니도 와 있었다. 언니는 지난번 부산에 왔을 때 정매와 언쟁을 벌인 후, 짐 을 싸들고 정매의 아파트에서 뛰쳐나가 여지껏 친정에 머무르고 있는 듯싶었다. 친정에 온 정매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고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이불을 둘러쓰 고 누워버렸다. 친정 어머니가 이불을 뒤집어쓴 정매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아서 어디가 아프냐, 김 서방과 다투었느냐, 하면서 시시콜콜 물어왔으나 정매는 그냥 몸이 좀 아프다고 만 했을 뿐이었다. 정옥 언니는 여전히 그녀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했다. 그러나 정매는 언 니의 태도에 신경을 쓸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밤 9시께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정매의 가슴은 다시 덜컹거렸다. 송수화기를 드는 순간 그녀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남편은 내일 몇 시 차를 타고 오 겠느냐는 말부터 물었다. 시간을 알려주면 마중을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마중 나오실 필요 없어요. 어쩌면 내일 못 갈지도 모르니까요." 정매는 남편과 긴 이야기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무슨 일 때문에 내일 올 수 없느냐고 되묻고는 정매의 대답도 듣기 전에 내일 늦게라도 돌아오라고 명령하듯 단호하 게 말했다. "나 말야, 당신 없으면 하루도 못 결딘다는 것 잘 알지? 그러니까 내일은 꼭 오라구.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남편의 그 같은 너스레에도 두려움과 불안으로 굳어진 정매의 마음은 풀리질 않았다. "알았어요. 내일 갈게요." 정매가 그렇게 말해서야 남편은 큰 소리로 웃고 나서 어머니를 바꿔달라고 하였다. 부모 가 없는 남편은 장모를 어머니라고 불렀으며, 그 때문에 어머니는 둘째 사위에게 더 애틋한 정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정매는 어머니에게 송수화기를 넘겨주고 나서야 잠옷으로 갈아 입고 다시 자리에 들어 이 불을 뒤집어썼다.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서 어머니와 남편이 전화로 주고받는 소 리를 들었다. 어머니는 전화기에 대고 말끝마다 어이 김 서방, 어이 김 서방, 하고 찐덥진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김 서방이 내일 꼭 오라고 야단이고마." 어머니가 사위의 전화를 받고 나서 다시 정매의 머리맡에 앉으며 말했다. 정매는 어머니 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손으로 정매의 이마를 짚어보며 미열이 있다고 하였 다. 그러나, 정매 기분엠 몸에 열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 라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한 것이었다. 정매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바람 부는 날 섬진강의 물너울처럼 몸을 뒤척였다. 그녀는 새 벽 무렵에야 얼핏 눈을 붙였다가 어머니의 생일상이 차려진 후에야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났 다. 정매가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방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생일상을 받고 있었다. 오빠와 올케, 그리고 정옥 언니와 조카들까지 각기 마련한 선물 꾸러미를 내놓았다. 정매만이 우두 커니 앉아 있었다. "정매는 선물이 뭐니?" 정옥 언니가 부드럽지 못한 눈빛으로 정매를 찔러보며 물었을 때 정매는 한동안 말을 못 하고 있었다. 간밤에 정매는 선물 대신 용돈을 드릴 작정이었는데, 늦잠을 잔 탓으로 봉투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이었다. 식구들이 모두 정매를 보았다. 그녀의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 한 눈빛들이었다. "고몬 선물 없어?" 중학교에 다니는 노카가 호기심 넘친 얼굴로 정매를 보며 물었을 때, 그녀는 묘안을 떠 올려 가까스로 궁색을 면할 수가 있었다. "응, 고모 선물은 할머니를 특별관광 시켜드리는 거란다." 정매는 자신 있게 말했다. "특별관광이라니? 해외라도 모시고 가겠다는 거니? " 정옥 언니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물었다. "그래요. 어머니를 해외 여행 시켜드리겠어요." 정매의 말에 가족들이 놀라움과 부러움의 눈으로 정매와 어머니를 번갈아보았다. "참말잉교, 고모?" 올케는 정매를 시기심 많은 눈빛으로, 그러나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정매는 푸실푸실 경박한 웃음을 날리며 가족들을 둘러보았다. "언제든지 어머니가 좋다고 하실 때요." 정매는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어머니에게 언제쯤이 좋겠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김 서방이 그랬느냐? 김 서방이 그런 말을 했어?" 어머니는 오달진 생각에 정매에게 거듭 묻고 나서는, "늙어갖고 어디를 가것냐. 김 서방 마음이 참말로 고마운 기라. 내사 먼대는 몬 가고 제주 도나 한 번 가보고 싶데이." 그러면서 어머니는 먼 해외 여행은 가기 싫다고 하였다. 그러자 정옥 언니가 나서며 "제주도는 제가 모시고 가겠어요. " 하고 생색을 내는 것이었다. 겨울의 강은 죽은 사람의 영혼처럼 을씨년스럽고도 외롭게 느껴졌다. 마치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처럼 냉엄하게 보였다. 그러나 겨울의 강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흐름이 멈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하늘이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었기는 해도 눈발이 비치지는 않았었는데, 정오쯤 되어서부터는 갑자기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눈이 퍼붓자 이내 산과 들이 은색으로 변했으며, 강물이 진한 남빛으로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매는 택시를 불러타고 섬진강변을 따라 하동으로 달렸다. 그녀는 눈이 쌓이는 들과 산, 그리고 흰빛의 눈과는 대조적으로 그 모습이 야청빛으로 떠 오르는 섬진강을 꿈꾸듯 바라보았다. 차갑고도 냉엄하게 느껴지는 그 강물 위에 그녀의 영 혼이 떠 있는 것처럼 오싹한 외로움을 느꼈다. 강물은, 그러나 거부하는 몸짓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면서 흐르고 있었다. 읍에 도착한 정매는 지훈 어머니를 만나보려다가 그냥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그녀는 버스 터미널에서 반 시간쯤 기다리다가 차에 올랐다. 그리고 버스에 올라와서는 이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탓으로 눈알이 씀벅거리면서 하품이 쏟아져나와 잠 시 눈을 감고 있었더니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그녀는 잠이 들었다가 몇 번이고 얼핏 깨어났으며 그 때마다 다시 눈을 감곤 하였다. 그 리고 마지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버스가 만덕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터미널에 버스가 멎자 뜻밖에 남편이 나와 있다가 버스 가까이 다가와서 그녀를 발견하고 는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알고 나오셨어요?" 버스에서 내리자 정매가 뜨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님께서 전화를 주셨더구만. 집어세 택시 잡아타고 나간 시간 계산하고 나왔는데, 무 려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니까." 남편 김원철은 한 시간이나 먼저 나와서 기다렸다면서도 조금도 짜증스러운 표정이 아니 었다. "아이들도 함께 왔으니까 우리 저녁 먹고 들어갑시다." 남편이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아이들은 어디 있어요?" "차 안에." 그러면서 남편은 주차장을 가리켰다. 어느덧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정매가 남편의 뒤를 따라 자동차 가까이 다가가자 차 안에 있던 두 아이가 뛰어나오며 엄마를 외쳐 불렀다. 그 리고 동시에 그녀에게 매달렸다. 정매는 두 팔을 크게 벌려 두 아이를 끌어안았다. 순간 정 매는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잊을 수 있었다. 두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순간 정매는 감미로운 행복감에 젖었다. 그녀는 행복과 불행의 뿌리는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 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여겨졌었는데, 아이들을 품에 안은 순간부터는 벅찬 행복감에 젖 어, 온갖 불안과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정매는 가족들과 함께 바다가 내려보이는 비치호텔의 라운지에서, 눈이 아름답 게 흩날리는 바깥 광경을 보면서 뷔페를 먹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가벼운 포도주로 적 당히 눈 오는 날의 싸늘하면서도 촉촉한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다. 그녀는 지훈 어머니를 만 났던 일이며, 지훈 어머니에게 원주에 대해 말을한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엄마, 언제 또 할머니 댁에 가? 이담에 갈 때는 나도 꼭 따라갈테야." 원주가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말했을 때, 정매의 머리 속에 불현 듯 지훈 어머니 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은 원주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 순간 어쩌면 지훈 어머니가 부산까지 원주를 만나러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다. "나도 따라갈 테야." 이번에는 창주가 떼를 쓰듯 말했다. "이담에 엄마가 외할머니 댁에 갈 때는 아빠도 따라갈 거다. " 남편 김원철이 정매를 빤히 들여다보며 둘째 창주를 흉내내듯 말했을 때 그녀는 뜨악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웃으면서도 뇌리를 파고드는 지훈 어머니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떨 쳐버릴 수는 없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지훈 어머니에게 했던 말을 스스로 부인하고 있었다. 나는 지훈 어머 니에게 아무 말도 한 사실이 없어.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래? 나는 다만 지훈 어머니를 찾아갔을 뿐인걸. 지훈 어머니가 너무 불쌍해서 잠시 찾아갔을 뿐이야. 내가 무슨 말을 했다 고? 난 지훈 어머니에게 원주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 정매는 가볍게 고개까지 가로 저으면서 스스로 부인했다. 그러고 나자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은 것 같기도 하였다. 그녀는 만약 지훈 어머니가 원주 를 만나고 싶어 부산에 찾아오는 일이 있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는 자신이 지훈 어머니에게 했던 말을 부인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당신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정매의 표정이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본 남편이 뚜벅 물었다. "아, 아녜요. 이젠 괜찮아요." 그러면서 정매는 금세 밝게 웃어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웃음은 어딘가 부자 연스러워 보였다. "당신 안색이 좋지 않은데? 피곤한 모양이니 그만 돌아갑시다." 남편은 진심으로 정매를 염려해 주었다. 정매는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눈앞에 자꾸만 지훈 어머니의 모습이 아 른거렸다. 그리고 곧 지훈 어머니가 원주를 만나러 그녀의 아파트로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도 그녀는 마음 한구석으로는, 지훈 어머니가 몸을 털고 일어너서 옛날 지훈이에게 모든 꿈을 걸고 고생도 모르고 열심히 살아갈 떄처럼 용기와 희망을 되찾아주었음녀 하고 빌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매 자신이 지훈 어머니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고통이 헛되지 않 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참 당신, 얼마 전에 죽었다는 고향 남자 친구 집에 가봤어?" 잠자리에 들기 전 가볍게 위스키 한 잔을 마시면서 남편이 뚜벅 물었을 때, 정매는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마주앉아 있던 남편이 정매의 그런 표정을 보 곤 놀랐다. "당신 왜 그래? 아무래도 너무 피곤한 모양이야. 자, 위스키 한 잔 하고 푹 자라구." 그러면서 김원철은 손수 잔을 가져다가 위스키를 따라주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사양하였으나 남편이 술잔을 들어 다시 권하자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았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려가면서 조금씩 혀끝으로 술잔을 핥았다. "혼자 남은 친구 어머니가 너무 불쌍해요." 술잔을 다 비운 정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집에까지 가봤어?" "네. 그 친구 어머니가 많이 아프다고 해서..." "어머니도 잘 아는 사이야?" 남편이 무심히 물었다. "그러믄요. 집에도 여러 번 널러갔었는데요. 그 친구 할아버지가 옛날 우리 집 하인이었다 나 봐요. 그 친구 어머니도 우리 집 행랑에서 좀 살았었구요. 그래서 친구 어머니는 지금도 나를 아기씨라고 불러요." "그으래? 옛날 상전의 자식과 하인의 자식이 친구가 되었다. 이거로구만. 괜찮은 인연인 데?" 남편은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 정매는 잠시 남편의 얼굴을 살폈다. 남편의 얼굴에서는 아 무런 의심쩍음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약간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그 표정은 건조해 보였 다. "비록 가난하였지만 아들이 살아 있을 때는 그래도 삶에 지친 모습은 아니었는데, 아들이 죽은 뒤로는 살아갈 기력을 잃어버린 듯했어요. 내가 찾아갔을 때, 친구 어머니는 며칠째 식 음을 폐하고 누워 계셨어요. 죽기로 작정을 한 사람 같았어요." 정매는 말을 하면서 다시 지훈 어머니의 초췌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럴 만도 하겠군 그래. 오직 하나의 꿈이었던 아들이 죽었으니 살아갈 기력이 있겠어? 그래도 한 사람은 살아야지. 뭐니뭐니해도 사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지 않겠어? 그래도 살면서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는 것이 훨씬 낫지. 죽어버리면 그리워할 수도 없으니까 말야." 남편은 정매로부터 지훈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말했다. 정매는 남편의 말 중에서, 살아 있으면서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에 깊 이 공감하였다. "그래서 친구 어머니에게 용기를 주었어요. 친구도 그의 어머니가 그러는 것을 원치 않을 거 아니겠어요?" "잘했어. 그런데 어떻게 용기를 주었는데?" 남편이 빈 술잔을 채우며 물었다. 순간 정매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할말을 조심스럽게 머리 속에서 굴려보았다. "당신과 똑같은 말을 했어요. 그런 말 외에는 해줄 건덕지가 었어야죠. 그냥 뭐 희망을 갖 고 살아라. 희망을 갖고 살자면 때로는 기쁜 날도 있을 것이다. 그랬죠 뭐." "그렇지만 절망적인 사람이 희망을 갖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그것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야. 더구나 그 친구 어머니처럼 죽기로 작정했던 사 람이 희망을 갖고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 김원철은 마치 자기가 그런 경험을 했던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매가 보기 에 남편은 언제나 삶에 자신과 용기와 희망이 넘쳐 있는 것같이 보였다. 비록 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보냈다고는 하지만, 여지껏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절망을 느껴보지 못한 사 람 같았다. 그리고 남편은 자신이 겪었던 지난날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 했다. 그런 면에서 남편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며 동시에 미래지향주의자였다. 그는 과거를 시간의 무 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과거란 미래를 보는 창문이라는 생각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어쨌어? 당신 말대로 친구 어머니가 희망을 갖고 살기로 했어?" 남편이 찬찬히 정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러나 저하고 약속을 했어요." "무슨 약속을?" "다시 옛날처럼 살아가기로 말예요. 옛날에 나갔던 식당에서 다시 일도 하고, 죽겠다는 생 각도 버리기로 했으니까요." "저엉말?" 정매는 대답 대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훈 어머니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그 순간에도 간절하게 빌었다. 지훈 어머니는 정매가 다녀간 후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매한테서 지훈의 핏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삶의 용기와 희망을 찾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집을 팔아서 빚 을 갚고 남은 돈으로 변두리에 전세방을 얻고, 옛날에 나갔던 역전 식당에서 다시 일을 시 작했다. 옷도 깨끗하게 빨아입었으며 끼니를 거르지도 않았다. 식당 여주인은 그런 지훈 어 머니를 보고 사람이 아주 딴판으로 달라졌다고 하였다. 지훈 어머니는 옛날 지훈의 뒷바리지를 하기 위해 역 앞에서 떡을 팔 때처럼 열심히 살아 가기로 작정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설마 정매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을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훈 어머니는 식당에서 고된 일을 하고 밤늦게 돌아와 잠자리에 들 때마다 지훈의 핏줄 인 원주라는 아이를 떠올렸다. 몸은 건간한지, 마음씨는 어떤지 알고 싶었다. 얼굴은 누구를 닮았으며 키는 큰 편일까 작은 편일까? 눈은 제 아비를 닮아 꼬리가 매달렸을까? 지훈 어 머니는 머리 속에 원주의 모습을 무수히 그려보았다. 그녀는 원주의 사진이라도 보고 싶었 다. 정매한테 부탁을 한다면 사진쯤이야 보내주겠지 싶었다. 지훈 어머니는 식당이 쉬는 날을 골라 정매의 친정을 찾아갔다. 정매가 사는 주소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정매에게 편지를 하여 원주의 사진 한 장 만 보내달라고 부탁할 작정이었다. 마음씨 고운 정매인지라 그만한 부탁이야 들어주리라 믿 었다. 지훈 어머니는 오랜만에 정매의 친정 마을인 미점으로 갔다. 그 곳은 지훈의 고향이기도 하였으며, 그녀 자신도 시집을 와서부터 6·25 때 남편이 죽은 후, 읍으로 나올 때까지 10년 가까이 살아왔던 곳이기도 하였다. 어린 지훈이와 함께 미점을 떠나온 후 얼추 가늠해 버아 도 20년은 훨씬 더 지난 것 같았다. 그녀는 지훈이와 함께 미점을 떠나오던 날을 돌이켜오았다. 그 날을 산천에 진달래가 찢 어지게 핀 초봄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산천의 꽃이 보이지 않았었다. 눈앞에는 꽃 대 신 죽은 남편의 모습만이 밟혀왔다. 그리고 자꾸만 눈말이 쏟아졌다. 그녀가 가진 것이라고 는 이불 한 채와 솥, 그리고 밥그릇이 전부였다. 읍에 나가 방을 얻을 돈도 없었다. 친정 마 을 이웃에 살던 처녀 적 친구네 집의 문간채에 임시로 몸을 의지하기로 하고 무작정 미점을 뛰쳐나왔던 것이었다. 미점을 떠나면서 그녀는 지훈이를 출세시키기 전에는 절대로 그곳에 다시 돌아가지 않으 리라 결심하였었다. 그리고 자신의 뻐가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훈이를 훌륭하게 키워 서 대학까지는 졸업시키겠다고 몇 번이고 마음을 공글렸었다. 그녀는 역 앞에서 떡장사를 하면서도 미점 사람들을 보면 애써 외면을 하였다. 지훈이가 출세하지 전에는 그들과 만나 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지훈이다 출세를 하기는커녕 이 세상에 살아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 녀는 용기를 내어 20여년 만에 고향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20여 년 전 고향에서 나올 때는 진달래가 찢어지게 핀 초봄이었는데, 그때보다 더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찾아가고 있 는 지금은 쌩쌩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다. "아이고 마님, 그 동안 통 찾아뵈입지도 못해 죄송합니데이. " 주춤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정매의 집 안으로 들어선 지훈 어머니는 정매 어머니를 보고 애써 너스레를 떨었다. "이기 누궁교? 아니 지훈 에미, 점백이 아이가?" 정매 어머니도 지훈 어머니를 보곤 깜짝 놀라며 손을 잡았다. "그래 고생이 많제. 지훈이꺼정..." 정매 어머니는 지훈 어머니 점백이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 마주앉았다. 지훈 어머 니는 눈물을 질금거렸다. 자신의 처지가 슬퍼서라기보다는 문득 지난날들이 마디마디 떠올 랐기 때문이었다. 시집 오던 때며, 지훈이를 낳던 때의 일, 그리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비난 의 소리를 듣던 남편이 죽음을 당했을 때와 지훈이를 데리고 마을을 떠나던 날이 엊그제 일 처럼 눈에 선하게 밟혀왔다. 지난 삶들의 깊은 회한에 젖어 지훈 어머니는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다. "그 동안 죄송합니더. 참말이제 보일 면목이 없구만예. 사는 거이 하도 사는 거답지가 않 어서 사람 노릇도 몬하고 이르케 천덕꾸러기가 되얐지 않았능교." "무신 말을 그러하는가. 그 동안 점백네가 고생 고생헌다는 것을 안면서도 한 번도 도와 주지 몬해서 참말로 미안허데이." "아입니데이. 죄가 많은 건 지라예. 참말로 뵈올 면목이 없슴데이." "그래, 요새는 어찌 사능가? 살기가 고달프면 우리 집으로 오그라이." "아입니데이. 지 적정은 마시이소." 정매 어머니와지훈 어머니가 손을 붙잡고 포실하게 회포를 풀고 있는데 정옥이가 들어왔 다. 지훈이 어머니를 보자 그녀는 대뜸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옥은 지훈 어머니에 게 얼핏 목례를 하고 방 한쪽에 조용히 앉았다. 한참 동안 지훈 어머니는 입을 열지 못하고 미적거리고만 있다가, "저... 저... 정매 아기씨 주소 좀 알 수 없겠능교?" 하고 넌지시 물었다. 정옥은 지훈 어머니가 정매의 주소를 묻자 심신이 바짝 긴장되었다. "그 아이 주소는 우째 그러노?" 정매 어머니는 별 생각 없이 물었다. "이본에 부산 갈 일이 생겨서 한본 찾아가 볼라고 안 그렁교." "아주 부산으로 옮겨가 살라꼬?" "마, 그건 가봐야 알겠구만예. 오라 카는 데가 있어서예."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믄 아주 부산 사람이 되겠고마." 정매 어머니가 홀깃 정옥을 보며 말했다. 정옥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방에서 나 갔다. 조카들 방으로 연필과 종이를 가지러 가면서 그녀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혹시 지훈 어머니가 원주 때문에 부산으로 정매를 찾아가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러나 원주가 지훈의 핏줄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정매와 정옥이 두 사람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정옥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조카의 방에 들 어가서 정매의 아파트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들고 큰 방으로 돌아왔다. "여기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었어요." 정옥은 지훈 어머니 앞에 쪽지를 내밀면서 다시 한 번 탐색적인 눈빛으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부산에는 언제 가시게요?" 정옥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은 언제 갈지 모른다 아입니꺼. 뭣보담도 그쪽에서 소식이 와야..." 지훈 어머니는 그렇게 말끝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마음속으로 부산으 로 이사를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공글렸다. 그것도 되도록 정매네 집에서 가까 운 곳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야 손자인 원주를 자주 볼 수 있을테니까. 지훈 어머니는 정매 어머니가 한사코 하룻밤 자고 가라고 붙잡는 것을 뿌리치고 해질 무 렵 읍으로 향했다. 그녀는 우선 정매한테 원주 사진 한 장 보내달라는 편지부터 보낼 양으로, 이웃에 사는 중학생을 불러다가 자장면 한 그릇을 사주면서 편지를 좀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녀는 이 웃에 사는 중학생이 자장면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자, 내가 부르는 대로 좀 써다고." 하면서 학생 앞에 볼펜과 편지지를 내밀었다. 그리고 학생이 방바닥에 엎드리며 볼펜을 집 어들었을 때, 오랫동안 뒤척이며 마음속에 새겨놓은 편지의 내용을 부르기 시작했다. "정매 아기씨 댕겨간 후부텀 다시 밥도 잘 묵고 식당에도 나가게 되얐심더. 이자부텀 이 노망구 아기씨 망대로 새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로 결심을 했능 기라예. 그란듸... 그란듸 한 가지 소원이 있능 기라예. 그것이 뭐꼬 하면 우리 원주 사진 한 장만 보내주시라 이거라예. 그라믄 그노메 자석 사진 봄서 희망 품고 잘살 수가 있겠고마." 지훈 어머니는 거기까지 불러주고 나서 잠시 숨을 돌렸다. 정매가 지훈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발신인이 죽은 최지훈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다시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번 편지도 지훈이가 교도소에 있을 때 부친 것이 이제야 온 것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겉봉 을 찢고 내용을 꺼내읽은 순간, 그녀는 질겁을 하였다. 더구나 '우리 원주'라는 표현이 여 러 군데 나타나고 있는 것에 놀랐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의 편지를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우리 원주'라고 쓴 대목이 탱자나무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있는 것만 같았다. 더욱이 그녀가 놀란 것은 지훈 어머니가 부산으로 이사를 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가 부산으로 옮겨오고 싶어하는 것은 필시 원주를 만나보기 위해서라고 짐작하 였다. 그녀는 앞으로 닥쳐올 일들이 두려웠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나서 이삼 일 동안 불안한 생각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일주일쯤 시간이 지나서야 불안감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리고 지훈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기로 작정하였다. 소식을 끊어버리면 당장 부산으로 올라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 문에 편지를 써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아주머니 편지는 잘 받아보았습니다. 식사도 잘하시고 식당에도 다시 나간다고 히시니 다 행입니다. 정말 잘하신 일입니다. 아주머니께서 새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시는 것을 알 면 지훈씨도 지하에서나마 마음을 놓게 될 것입니다. 아주머니께서 부탁하신 사진은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주머님께 사진을 보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원주의 장래를 위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부산으로 이 사를 오시겠다고 하셨는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그냥 그곳에 머물러 계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곳에 계시면 제가 가끔 찾아가서 뵙겠습니다. 겨울방학이 끝나기 전 에 원주 데리고 한 번 가겠으니,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정매는 지훈 어머니에게 편지를 부치고 나서야 후회하였다. 글을 모르는 지훈 어머니가 그 편지를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썼기 때문이다. 필시 지훈 어머니는 정매가 보 낸 편지를 다른 사람한테 읽어줄 것을 부탁할 터인데,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원주의 이름이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녀가 쓴 편지 내용 중에서 '원주의 장래를 위해서'라는 내용이 마음에 걸렸다. 제삼자가 그 내용을 읽게 되면 틀림없이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의심을 품게 될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녀는 당장 하동으로 내려가 그 편지가 배달되는 대로 회수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지훈 어머니에게 그 편지를 보내놓고 나서 며칠 동안 불안한 마음에 잠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요즈막 불안감 때문에 생활의 리듬이 깨어진 상태에서 하루하루 를 살아가고 있었다. 정매의 편지를 받은 지훈 어머니는 원주의 사진이 한시 바삐 보고 싶어 안당이 났다. 점 심때라서 손님들이 한창 붐비는데도 식당 일손을 멎고 슬그머니 화장실로 들어가 봉트를 부 욱 찢었다. 그러나 봉투 속에는 원주의 사진이 없었다. 실망한 그녀는 편지를 든 채 밖으로 나와 바쁘게 덤벙이는 주인을 붙잡고 당장에 편지를 읽어달라고 졸랐다. "시방 바빠 죽겠고마 무신 편지를 당장에 읽으라 카는교. 쬠만 있다가 손님이 한 파수 뜸 해지면 읽어줄 테니 싸게 반찬이나 갖다놓으시소. " 뚱보 주인 아주머니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빨리 반찬을 갖다놓으라고 성화였 다. "아니라예. 내는 이 편지를 읽어주기 전에는 아무 일도 몬하겠고마. 그리아 어서 이 편지 부텀 읽어주시이소." 지훈 어머니도 지지 않고 떼를 쓰다시피 하였다. 그러자 식당 주인은 어처구나가 없다는 표정으로 멀뚱히 지훈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손님들의 음식 재촉하는 소리가 여기저 기서 퉁겨 나왔다. 주인 아주머니는 지훈 어머니의 얼굴을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 면서, 손님들에게 곧 음식이 나간다는 말을 기계처럼 되풀이하였다. "냉큼 읽어주이소." 지훈 어머니가 매딜리는 듯한 눈으로 주인 아주머니 앞으로 편지지를 디밀었다. "아이고 참, 내가 몬살겠구마. 죽은 지훈이가 살아났다는 편지라도 되는가 원." 그러면서 주인 아주머니는 물 묻은 손으로 편지를 받아 눈앞에 펼쳤다. 그리고 빠른 속도 로 단숨에 편지를 읽었다. "자, 이제 되얐지예. 그라이 어서 일을 하이시소." 주인 아주머니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면서 편지를 지훈 어머니 손에 쥐어주었다. 지훈 어 머니는 한동안 멀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편지 내용 중에서 원주의 사진을 보낼 수 없다 는 것과 방학이 끝나기 전에 원주와 함께 찾아오겠다는 대목만이 머리에 남았다. 그녀는 시무룩해진 얼굴을 하고 손님들이 앉아 있는 식탁에 반찬을 가져다놓았다. 그녀는 반찬을 나르면서도 무엇 때문에 장매가 원주의 사진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니지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어 속이 탔다. 며칠 동안 잠을 설치면서 원주의 사진을 기다렸었는데, 사진을 보 내지 않았다는 사실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다시 한 번 차근차근허게 읽어주시이소. 좀 천천히 읽어주시구레." 식당이 한가해지자 지훈 어머니는 다시 편지를 들고 주인 아주머니한테 사정을 하였다. 주인 아주머니는 또박또박 편지를 다시 읽어주었다. "원주가 뉘깅교? 그라고 부산으로 이사 가겠다고예? "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주인 아주머니가 거듭 물었다. 지훈 어머니는 주인 아주머니가 묻는 말어 선뜻 대답을 못하고 한동안 미적거렸다. 그녀 의 머리는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원주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훈이의 어렸을 떄 모습과 똑같은 원주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오며 그녀의 머리 속에서 부스럭거렸다. "원주가 누구잉교?" 주인 아주머니가 다시 물었다. 그제야 지훈 어머니는 머리 속에 가득 찬 원주의 모습을 애써 지우며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예, 내가 잘 아는 아잉 기라예." 지훈 어머니는 희미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혀끝에서 그마나 우리 지훈이 핏줄이라예, 하는 말이 맴돌았으나 한껏 참고 발설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삐걱거리는 의자 에 턱을 받치고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까직 거 가지고 한숨을 푹푹 쉬어쌌능교." 식당 주인 아주머니가 핀잔을 주었다. 그 소리에 지훈 어머니는 눈꽁댕이를 빳빳하게 세 우고는, "그런 소리 마이소. 그마가 나헌테는 목숨보다 더 중헌 기라예. 아먼, 목숨보다 중허고말 고 내는 그마가 아니면 살아갈 기력을 잃고 만다 아입니꺼." 하고 푸념처럼 한숨을 섞어 말했다. 식당일을 끝내고 밤 11시가 넘어서 혼자 집으로 돌아온 지훈 어머니는 아무래도 잠을 이 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던 사진 한 장 보내주지 않는 정매가 야속하게 생각 되었다. 밤새도록 눈을 붙이지 못하고 뒤척거린 지훈 어머니는 정매의 말대로 잠시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정매의 말대로라면 겨울방학이 끝나기 전에 원주를 데리고 하동에 한 번 왔 다 가겠노라고 하지 않았던가. 정확히 그때가 언제일지는 몰라도 정매가 원주를 데리고 올 때까지 마음 다독거리며 무던히 기다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러고 나니 한결 마음이 느긋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원주를 보고 싶은 마음은 날이 갈수록 오히려 더 간절하게 부풀어올랐다. 그리 고 밤마다 원주의 꿈을 꾸곤 하였다. 꿈에 나타난 원주의 모습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처럼 어렸을 때 지훈의 모습 그대로였다. 정매한테서 원주의 사진을 보낼 수 없다는 편지를 받은 지 열흘이 지나갔다. 열흘이 지나 도록 정매는 하동에 오지 않았다. 지훈 어머니는 이러다가 겨울방학이 다 지나가지나 않을 까 하고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정매에게 언제쯤 원주를 데리고 하동에 올 것이지 알려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하루만 더 하루만 더 참자, 하면서 다시 닷새를 넘겼다. 참다 못해 그녀는 식당 주인에게는 몸이 아파서 이틀 동안 집에서 쉬겠다는 핑계를 대고 부산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부산행 버스를 타고 달리는 순간, 그녀는 문득문득 지난날 지훈이가 그곳에서 대학에 다닐 때 먹을 것을 마련하여 찾아다녔던 때가 생가나 고통스러웠 다. 정오쯤에 부산에 도착한 지훈 어머니는 터미널 부근을 서성거리며 그녀가 일을 할 만한 식당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녀는 터미널 앞에서 군밤을 구워 팔고 있는 중년 아낙에게 국 밥집이 어디쯤에 있는지 물어보았다. 지훈 어머니는 자신의 국밥 솜씨 하나는 어디에라도 내놓을 만하다고 생각해 온 터였다. "요 근처에는 국밥집이 없는 것 같은디. 저그 있는 식당은 불고기를 잘허고, 그 옆집은 중 국집이고, 약국 왼쪽 식당은 설렁탕집인디... 국밥은 먹고 잪으면 설렁탕집으로 가씨요. 설렁 탕이나 국밥이나 그거이 그거 아니겠소?" 지훈 어머니는 군밤 장수 아주머니의 말대로 약국 옆에 있는 설렁탕집으로 갔다. 그녀는 우선 점심으로 설렁탕을 먹고 나서 국밥 집을 찾아보기로 요량하였다. 설렁탕집의 밀창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보기보다는 홀이 크고 깨끗했다. 홀에 있는 식탁 수만도 스물이 넘었으며 홀 양쪽에 밀창 달린 방드링 여러 개 잇달아 있었다. 그 녀는 카운터 옆자리에 앉아서 벽에 붙은 메뉴판을 쳐다보았다. 두 줄로 씌어 있는 메뉴판의 음식 가짓수만도 스물이 넘는 듯싶었다. "국밥 한 그릇 주이소." 그녀는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온 스무 살 아팎의 여자 종업원에게 억지 웃음을 보내며 말 했다. "국밥은 없는데예." 여자 종업원은 다른 것을 주문하라는 표정으로 지훈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국밥이 와 없노?" 지훈 어머니는 짜증스럽게 퉁겨대며 얼굴이 냄비 뚜껑처럼 넘데데한 종업원을 빤히 쳐다 보았다. 종업원은 눈빛으로 주문을 독촉하고 있었다. "뭘 주문하실랑교?" 여자 종업원이 다시 재촉해서야 지훈 어머니는 얼핏 메뉴판을 쓸어보고 나서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주문을 하지 않았다. "그라믄 국밥 사촌이 뭐 있나?" "국밥 사촌이라 했능교? 그라믄 설렁탕 드시이소." 여자 종업원이 푸실푸실 웃으며 말했다. 지훈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설렁탕이 나올 동안 카운터에 앉아 았는, 주인인 듯 싶은 중년 부인을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주인 여 자한테 말을 붙여보려고 하였지만, 적당히 빌미가 떠로르지 않는 것이었다. "여자 요리사는 없능교?" 지훈 어머니는 그의 앞에 설렁탕 뚝배기가 놓인 후에야 카운터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중년 여인은 지훈 어머니의 묻는 말에 건성으로 고개만 가볍게 끄덕여 보였다. "그래도 음식맛은 여자 손이 들어가야 하는 기라예. 음식맛이라카는 기는 여자 손끝에서 우러난다 아입니꺼." 지훈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여러 차례 뿌려 간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러면서 그녀는 설렁탕 국물을 두어 숟갈 떠서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맛을 보았다. "이것은 숫제 화확 조미료 맛이 기라. 시상에 고깃국 맛이 우쨰 이리도 텁텁하노. 이래 갖 고 우째 손님을 끌겠능교. 이기 다 여자 손끝이 닿지 않은 탓인 기라." 지훈 어머니는 여진히 얼굴까지 찡으리며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제 야 카운터에 앉아서 주간지를 뒤적거리고 있던 중년 여인이 얼핏 지훈 어머니 쪽으로 고개 를 돌렸다. 그러고는 한동안 시선을 고정시켜 지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음식이란 여자 손꿑이 닿아야 제맛이 나는 기라." 지훈 어머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큰 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러고 나서, "주방에는 꼭 치마 두른 사람이 있어야 키는 기라. 내 말이 틀렸능교?" 라고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물었다. 주인 여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트적지근한 눈빛으로 지훈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다 가다시 주간지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지훈 어머니는 주인 여자의 눈빛을 의식하고 께지럭거리며 설렁탕 국물을 마지막 한 방울 까지 둘러마신 후에 카운터로 걸어갔다. 그녀는 설렁탕 값을 계산한 후에, "아주마이, 주방에 사람 안 쓰실랑교?" 하고 여전히 헤실거리며 물었다. 주인 여자는 거스름돈을 내주며 멀뚱한 시선으로 지훈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국밥 하나는 잘 마는 기라예. 그라이 한 번 써보이소. 설렁탕 국물이 입술에 쩝쩝 달라붙게 맨글겠심니데이. 그렇다고 많은 돈 달라는 것도 아닌 기라. 그냥 묵고 자고 용돈이 나 찌끔씩 쥐어 주면 그만인 기라. 우짠교, 나 한 번 안 써볼랑교. 이래봬도 하동에서는 점 백이 음식 솜씨라면 다 알아주는 기라." 지훈 어머니는 그녀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주인 여자는 빙긋이 웃었다. "아주머니 하동 사람인교?" 한참 후에 주인 여자가 웃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하동이 집인 기라예." "올 데 갈 데가 없능교?" 주인 여자가 다시 물었다. "아니라예, 부산에 댕기러 왔는데 쬠만 머물고 싶어서 안 그런교?" 지훈 어머니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다음날부터 지훈의 어머니는 부산에 있는 하동식당 주방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 그 녀는 그 식당의 옥호가 하동식당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툽상스러우면서도 마음씨가 무드러운 주인 여자가, "으리 하동식당에는 하동 사람들이 다섯이나 되는구마." 하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주인니 하동 사람이라는 것과 식당 이름이 하동식당이라는 것을 함께 알았다. 그리고 비로소 지훈 어머니는 주인 여자가 자신의 음식 솜씨를 믿어서가 아니 라, 같은 고향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자리를 주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지훈 어머니가 주방에서 하는 일이런 기껏해야 그릇을 씻고 주방을 청소하는 것이 고작이 었다. 주방에는 역시 고향이 쌍계사 골짜기라는 마흔두 살의 참나무 토막처럼 체격이 튼실 한 남자와 서른아홉 살의 깡똥한 여자가 있었으며, 그들 부부가 요리를 맡았다. 주인 여자는 지훈 어머니에게 요리를 맡기지 않았다. 지훈 어머니는 하동식당에서 일을 하게 된 지 사흘 만에야 정매한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를 받은 정매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부산에 와계신다고 했습니까? 앞으로도 부산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요?" 지훈 어머니가 고속터미널 옆에 있는 하동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 정매 가 놀라는 목소리로 반문해 왔다. 지훈 어머니는 정매가 왜 놀라는지 그 속내를 모르고 있 었기 때문에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하였다. "원주 때문이 아닝교. 원주 옆에 있고 잪어서 부산으로 옮겨왔다 카이." 지훈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지 정매는 한동안 말을 못하였다. "그라믄, 이담에 만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전화 끊겠고마." 지훈 어머니는 자신이 부산에 와 있다는 것만을 간단히 알렸다. 그녀는 오는 휴일에 원주을 만나러 정매네 아파트로 찾아갈 생각을 공글리며 송수화기를 놓 았다. 그리고 원주를 만나러 갈 때 어떤 선물을 사가지고 갈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원 주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고 싶었다. 젊어서 하나뿐이었던 아들 지훈을 위해서 온 갖 고생을 달게 감수했던 것처럼, 원주를 위하는 일이라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참고 견뎌낼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 인생의 목표를 원주에게 걸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훈을 위해서 고생을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고 어떤 어려움도 기쁜 마음으 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던 기억을 돌이킬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 시절이 좋았던 것 같았다. 그 때문에 그녀는 원주를 위해서라면 그 같은 삶이 다시 되풀이된다 해 도 거부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었다. 오히려 줄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지훈 어머니는 정매한테 전화를 걸고 나서 싱글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가서 그릇을 씻었다. 너무도 기분이 좋아 큰 소리로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훈 어머니가 전화를 한 지 한 시간도 못 되어 정매가 하동식당으로 달려왔다. 정매는 물빛 바탕에 분홍빛 줄무늬 스카프로 머리를 싸매고 경직된 얼굴로 하동식당에 들어서서 다 급하게 지훈 어머니를 찾았다. 그녀의 스카프 위에는 눈이 희끔하게 쌓여 있었다. 지훈 어머 니가 행주치마에 손이 물기를 닦으며 홀로 나왔을 때, 정매는 딱딱하고도 날카롭게 굳은 시 선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아이고, 아기씨 오셨구만예." 지훈 어머니가 반가움에 정매를 향해 쪼르르 내달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정매가 지훈 어 머니를 보는 태도는 여전히 얼음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녀는 마치 지훈 어머니에게 무엇인 가를 따지러 온 사람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훈 어머니는 정매의 그 같은 태도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반가운 마음에 정매의 손을 잡고 흔들며 눈물을 글썽였다. "시상에, 우리 아기씨가 오셨느데 우야꼬." 지훈 어머니는 그녀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면서 나로 옆자리로 정매의 손을 잡고 가서는 앉게 하였다. 그러나 정매는 자리에 앉지 않고 멀뚱하게 서서 지훈 어머니를 바라보기만 하 였다. "아주머니, 시간 좀 내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요." 정매는 그렇게 말하고 카운터에 앉아 있는 주인 여자를 보았다. 지훈 어머니에게 외출 허락을 받아오라는 것을 눈빛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지 훈 어머니가 카운터 쪽으로 가서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잠깐 밖에 좀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 였다. "나가입시더." 지훈 어머니는 행주치마를 벗어 심부름하는 아이한테 맡기고 나서 정매에게 말했다. 정매 는 홀을 나오면서 카운터 여자에게 목례를 하였다. 그러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주인 여자는 정매에게 무슨 말인가 할 듯하다가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주머니, 하동식당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자, 혹시 하동 사람 아닌가요?" 식당을 나와 몇 걸음 걷고 나서 정매가 뚜벅 물었다. "맞는 기라예. 하동 읍내 사람이라 카드마." 지훈 어머니가 큰 소리로 말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정매는 그녀가 여학교 선배 라는 것을 알고, 아는 체를 하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하였다. "차를 타는 데가 멀었능교?" 지훈 어머니가 걸음을 멈추고 서서 물었다. 그녀는 정매가 자신을 원주가 있는 아파트로 데려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 왔어요. 저기가 좋겠군요." 정매는 그러면서 그들이 서 있는 길모퉁이 맞은편 건물 2층에 붙어 있는 다방 간판을 턱 으로 가리켰다. 정매가 지훈 어머니를 다방으로 안내하지 그녀는 의외라는 듯 실망하는 빛 을 보이며, "여기는 다방이 아닝교?" 하고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아파트로 원주를 만나러 가는 줄 알고 차를 타기 전에 어떤 선 물을 사는 것이 좋을까 하고 가게들을 기웃거리고 있던 터에 정매가 다방으로 들어가작 하 니 실망하지 않을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지훈 어머니와 정매는 다방의 구석 자리에 마주앉았다. 정매는 차를 시키고 나서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창문의 반대쪽에 걸려 있는 겨울 풍경의 큰 사진을 바라보았다. 눈 이 수북이 쌓인 사진 속의 산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다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주머니, 부산에는 왜 오셨어요. 제가 그냥 하동에 계시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여기 계 시지 마시고 다시 하동으로 내려가 계세요. 여기 계시면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정매는 지훈 어머니를 빤히 들여다보며 타박하듯 말하였다. 그러자 지훈 어머니의 눈빛이 달라졌다. 눈빛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얼굴 빛깔까지도 창백해졌다. 할말을 잃은 듯싶었다. 지훈 어머니는 실망과 번민의 눈으로 정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 말대로 하셔야 해요. 그러니 오늘이라도 당장 하동으로 내려가세요." 정매는 하기 싫은 말을 퉁겨대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정매는 지훈 어머니에게 부산에 있 으라고도, 하동으로 내려가라고도 할 처지가 아니었다. 지훈 어머니가 어디에 살건 그것은 지훈 어머니의 자유 의사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내는 여기에 살라요. 하동에는 다시 안 내려갈라요." 한참 후에 지훈 어머니가 결연한 빛을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결연한 태도는 누가 뭐라고 해고 부산을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가 굳어져 있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 왜 그러십니까. 여기 있다고 해서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 그러세요?" "내가 원주 사진 하나만 보재달라고 펜지꺼정 했던 긴데 사진도 안 보내주고..." 지훈 어머니는 원망의 눈으로 정매를 보았다. 그러면서 눈시울이 크렁하게 젖었다. "조금 있으면 원주 데리고 내려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그새를 참지 못하고 올라오시면 어떻게 해요?" 정매는 답답하다는 얼굴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암턴 나는 하동에 가지 않을 기라예." 지훈 어머니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아무래도 헛소리를 한 것 같군요. 아주머니께 헛소릴 한 것이라니까요." 정매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정매의 그 말에 지훈 어머니의 눈빛이 달라졌다. 두 사람의 눈길이 쨍그렁 소리를 내며 엉켰다. 지훈 어머니와 정매는 한동안 마주앉은 채 말이 없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나헌테 헛소리를 했다 카이 무신 말잉교?" 한참 후에 지훈 어머니가 화난 얼굴로 말었다. "아주머니,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한테 편지를 보내고, 또 부산으로 올라와서 눌러사시겠 다고 하시고... 이러시면 안 돼요." "와 부산에서 살면 안 된다 카능교?" "나는 아주머니가 부산으로 올라와 사시겠다는 이유를 알고 있어요." "그기 잘못잉교?" "아주머니는 원주 이름도 들먹이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원주는..." 정매는 말을 하다 말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내가 원주 이름을 들먹이면 안 된다고예?" "그래요 절대 안 됩니다. 그런데도 사진을 보내라니 말이나 됩니까? 그래, 사진을 들고 다 니면서 이 아니가 내 손자요, 하고 광고라도 하시려고 그래요?" 정매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순간 지훈 어너미의 표정이 침통해졌다. 침통한 정도가 아니라, 금방 통곡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정매는 그런 지훈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그녀는 지훈 어머니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에게서 마지막 남은 삶 의 한 가닥 희망마저 거두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원주는 지금 잘 크고 있어요. 그러니 아무 적정 마셔요. 그 아이가 잘 큰는 것 외에 더 바랄 것이 뭐가 있겠어요? 그 아이가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겠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절대로 안 돼요." 정매는 부드럽게 지훈 어머니를 다독거려 주었다. "내가 와 그것을 모르겠능교. 내사 원주가 내 손자다, 허고 광고 허자는 것도 아니라예. 그냥 그아를 한 번 보고 잪어서... 지훈이 핏줄을 한 번 보고 잪어서..."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정매가 손수건을 꺼내주며 눈물을 닦도록 하였다. 그러나 닦아도 닦아도 눈물은 멎지 않았다. 그런 지훈 어머니를 보고 있는 정매의 마음도 쓰리고 아팠다. 그대로 둘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아주머니..." 정매는 한껏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긴장된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지훈 어머니를 보았다. 지 훈 어머니는 크렁하게 젖은 눈으로 정매를 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원주를 한 번 보게 해주면 하동으로 내려가시겠어요?" 정매가 물었다. 정매가 지훈 어머니에게 원주를 한 번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을 했을 때, 지훈 어머 니는 금방 생기가 돌아 고개를 번쩍 쳐들쩍거렸다. 지훈 어머니의 훌쩍거리는 소리에 다방 안의 손님들이 홀깃홀깃 두 사람을 훔쳐보았다. "그렇게 하시겠어요? 원주를 한 번 만나게 해드리겠어요. 그 대신 딱 한 번뿐입니다." 지훈 어머니는 훌쩍거리면서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주를 만나고 나서 곧 하동으로 내려가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겠어요?" 정매의 물음에 지훈 어머니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아주머니는 그만 식당에 가 계세요. 내일 점심때 원주를 데리고 식당으로 가겠어요. 워주랑 하동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테니 잠깐만 보세요. 그리고 원주를 만났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머니는 원주를 만나는 대로 하동으로 내려가셔야 해요. 내 말대로 하시는 겨죠?" 지훈 어머니는 크렁하게 젖은 눈으로 정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갑자기 입이 얼어붙어 버리기라도 한 듯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 아주머니께서는 그만 가보셔요. 그리고 식당에는 내일까지만 있겠다고 미리 말해 두셔요." 그러면서 정매는 지훈 어머니에게 그만 일어서라는 눈짓을 해보이며, "저는 여기 좀더 있다가 가겠어요." 하고 말했다. 지훈 어머니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므... 내일 꼭 원주를..." 지훈 어머니는 더듬거리며 말하고는 다방을 나섰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의 뒷모습을 측은 한 눈으로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마음과 걸맞지 않게 저음의 감상적인 노래가 촉촉하게 다방 분위기를 적셔주고 있 었다. 그녀는 창밖에 스치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지훈 어머니를 멀리 쫓아보내는 것 같아 마 음이 무거웠다. 그렇지만 그녀는 원주를 위해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하 였다. 그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원주를 지키고 싶었다. 지훈 어머니와 원주를 공공연히 만 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매는 혼자 다방에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거리로 나왔다. 눈발이 굵어진 듯싶었다. 그녀 는 눈송이가 머리 위에 내려앉는 것을 감미롭게 느끼면서 택시를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하염없이 걸었다. 정매는 지훈 어머니를 만난 후로 눈을 낮고 혼 자 거리를 거닐다가 남편이 퇴근할 무렵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 가고 싶었다. "원주아빠, 저예요. 지금 밖에 나와 있는데 함께 집에 갈 수 있겠어요?" 정매는 원주 아빠라는 말에 힘을 주며 응석을 부리듯 하였다. 그녀는 밖에 나와서 남편에게 전화를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아이들과 같이 외출을 했을 떄라면 몰라도 그녀 혼자 남편한테 전화를 거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 이 날만은 어쩐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남편에 대한 죄스러움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당신이 웬일이야? 지금 거기가 어디지? 그래 알았어. 그러지 말고 지난번 우리가 만났던 레스터랑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삼십 분 내고 갈 테니까." 남편은 일방적으로 만날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공중 전화 부스에서 나오자 눈 을 동반한 겨울 찬바람이 휙 얼굴을 때렸다. 눈발은 굵어지지 않았으나 바람이 드세어진 듯 싶었다. 정매는 10분쯤 걸어서 남편과 약속한 호텔 안의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창 쪽에 앉아서 커피를 주문하였다. 벌써 넉 잔째였다. 아침에 집어서 한 잔 마시고, 지훈 어머니와 만난 다방에서 두 잔을 마 셨다. 그녀는 창밖으로 눈발이 흩날리는 것을 보면서 커피를 홀짝거렸다. 정매는 어쩐 일인 지 마음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아무리 강해지자고 스스로 다짐을 해도 마치 사랑하는 사 람과 영원히 헤어지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울컥울컥 감정이 복받쳐오르는 것이었다. 원주를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남편 김원철은 정매와 약속했던 대로 정확하게 30분 안에 모습을 나타냈다. "당신 오늘 어쩐 일이야? 눈 떼문이야? 눈이 오니까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건가?" 남편은 눈 때문에 젖은 머리의 물기를 손으로 닦으며 말했다. "그냥 함께 들어가고 싶어소 전화했을 뿐인데 왜 여기서 만나자고 하셨어요?" 정매는 남편을 향해 애매하게 웃어 보이며 물었다. "기왕 만났으니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야지." "애들은 되두고 우리끼리만 저녁을 먹고 들어가요?" "때로는 애들 떼어놓고 이렇게 우리끼리만 오붓하게 만나는 것도 좋잖아. 연애하는 기분 도 들고 말야. 나는 연애 감정을 가져보지 못하고 결혼해서 조금은 아쉬울 때가 있거든. 그 러니 종종 우리끼리만 이렇게 만나서 연애하는 기분을 느껴보자구." "아이들이 기다릴 텐데요." "때로는 아이들한테 부모를 애타게 기다리게 할 필요도 있는 거야. 그래야 부모님에 대해 서 고마은 마음도 생기는 거구 말야. 요즘 아이들은 부모에 대한 고마음을 별로 느끼지 못 하거든. 요새 아이들은 감동을 모른다고 하더만. 큰 기쁨도, 큰 슬픔도, 큰 고마움도 모른다 고 하잖아. 아이들이 거렇게 된건 어른들 탓이야. 지나치게 과잉 보호를 한 탓이지." 남편은 열을 올려가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끼리만 저녁을 먹을 게 아니라, 집에 가서 애들을 데리고 나옵시다." 정매는 아이들만 집에 두고 외식을 하기가 마음에 걸려서 남편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오늘은 우리끼리 오붓한 시간을 갖자구. 눈도 오고 기분이 촉촉하지 않 아? 애들을 데리고 오면 그놈들 뒤치다꺼리하느라고 우리 기분은 그냥 떡이 될 텐데 뭐. 집 에 엄마가 없으면 이렇게 배가 고프구나 하고 깨닫게 해줄 필요가 있는 거야. 우리 집 놈들 언제 우리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시한 적이 있었어? 아무리 비싼 장난감을 사주어도 그 순간 만 고마워하고 기뻐할 뿐이지 며칠만 지나면 그 기쁨, 그 고마음 깡그리 잊고 말지 않아. 그 리고 말야, 우리 아이들 제 몸이 조금 아프면 울 줄은 알아도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눈 물을 흘리는 건 못 보았지 않아. 아마 우리가 죽는디 해도 그 슬픔은 오래 가지 않을 거야." "설마 우리 아이들이 그럴라구요." 정매는 남편의 그 같은 말을 맏고 싶지가 않았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스러웠다. "요즘 아이들의 피부는 코뿔소 가죽처럼 두꺼워서 감동이 없다는데도 그러네. 언젠가 내 가 우연히 연극을 구경했는데 모든 인간들이 코뿔소가 되어머리는 내용이었어. 사랑하는 여 자까지도 코뿔소가 아름답다니 코뿔소는 신이라니 하면서 코뿔소가 되어버리더라고 그러고 는 단 한 사람만 남게 되었는데, 그 사람마저도 코뿔소가 되기를 원하더라고. 요즘 사람들은 모두 코뿔소 가죽을 뒤집어쓰고 산다는 것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연극이었어. " "그 연극 나랑 같이 봤잖아요. 이오네스코의 코뿔소라는 연극이에요. 그렇지만 그 연극 속 에서도 어린아이들은 하나도 코뿔소가 되지 않잖아요. 우리 아이들이 코뿔소 피부라니, 당신 너무 심한 말을 하시는군요." 정매는 남편을 향해 눈을 흘겼다. 어쩌면 그것은 남편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절대적이 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암튼 오늘 밤 우리 아이들을 한 번 시험해 봅시다." "아이들을 시험해 보다뇨?" "우리끼리만 밥을 먹고 열두 시쯤에 들어가 보잔 말야." "열두 시에요? 아이들이 그때까지 굶고 있을 텐데요?" "그렇지 않을 거야. 어쩌면 아버지 어머니가 집에 없는 것에 대해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 을지도 모르지. 아니 처음에는 기다리겠지. 그러다 저희들끼리 다 해결을 할 거야. 집에 늦 게 들어오는 부모에 대해서 불평을 했으면 했지 적어도 걱정은 하지 않을 거야." "당신도 참, 아이들이 왜 걱적을 하지 않겠어요?" "우리 내기를 할까?" 남편이 자신 있게 묻자 정매는 다소 저항감을 느꼈다. 정매는 남편의 주장대로 할 수 없이 밖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그녀는 간단히 저녁만 먹고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저녁을 먹은 후에 곧장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고 있는 것 같았다. "집에 전화라도 해봅시다." 정매는 커피숍으로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멈칫거렸다. "전화할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남편은 막무가내로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커피숍 간판이 붙은 앙증스러울 정도로 자그마 한 3층 건물의 입구로 들어섰다. "당신은 애들이 궁금하지도 않아요?" 정매는 남편을 다그치듯 따져물었다. 그러나 남편은 싱글거리며 그녀를 돌아보더니, "애들은 지금 우리 전화를 기다리지 않아." 하고 잘라 말했다. "당신 참 몰인정한 사람이군요." 그녀는 남편이 이끄는 대로 커피숍 안으로 들어서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남편은 분명 그녀의 불만을 토하는 듯한 중얼거림을 들었음에도 아무런 대꾸 없이 도어를 밀고 들어가 히터 가까운 곳에 앉았다. 어두컴컴한 실내에는 쇼팽의 피아노곡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지금이 벌써 아홈 시예요. 애들이 얼마나 배가 고플까요?" 정매는 커피숍의 실내를 둘러볼 겨를도 없이 다시 아이들 걱적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아 무리 집 생각을 잊어보려고 애를 써도 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배가 고파 투덜거리며 부모를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밟혀왔다. 여자는 어쩔 수가 없구나, 정매는 그런 자신 을 탓하고 있었다. "저녁은 벌써 먹었을 거고, 지금은 신나게 텔레비젼 쇼 프로를 보고 있을 게야. 공부하라 고 잔소리하는 부모도 없으니 신나게 떠들어대며 놀고 있을 거라구." "저녁을 벌써 먹다니, 어떻게요?" "글세, 내 말이 맞다니까 그러네." 남편은 대답하면서 가볍게 짜증을 냈다. 정매는 커피를 마시면서야 잠시 아이들 생각을 잊고 피아노곡처럼 묵직하게 느껴지는 커 피숍의 실내 장치를 천천히 둘어보았다. 그녀는 어디를 가든 실내의 분위기와 장식을 두러 보고 한마디씩 평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는 커피숍의 분위기가 너무 육중하다는 것을 남편에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자 정매는 다시 남편을 닦달하듯 재촉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정매가 안달복달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앉아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편은 담배를 피워물고 연기를 내뿜으며 약 오르지, 하는 표정으로 정 매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렸을 때 아무도 기다릴 사람이 없었지. 기다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 내가 기다 린 것은 아버지나 어머니 같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시간이었다구.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 과 어서 커서 어른이 되고 싶은 생각뿐이었지. 나는 기다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어." 남편은 갑자기 비감에 젖은 표정으로 정매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난 집에 엄마가 없으면 울면서 온 마을을 찾아헤맸다구요. 엄마가 옆에 없으면 무섭고 답답하고 아무 재미도 없었어요. 그러다가도 엄마와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았어요. 가장 행복한 순간은 엄마의 품에 안겨 잠을 잘 때였어요. 자, 이제 그만 가봅시다." 그러면서 정매는 먼저 일어섰다. 남편이 집에 돌아가기를 거절한다면 그녀 혼자서라도 달 려갈 기세였다. "더 앉아 있자고. 우리 내기를 하지 않았어? 지금이 아홉 시 반이니까 열두 시까지는 두 시간 반이나 남았잖아?" "아니, 그럼 당신은?" 정매는 한심한 눈으로 남편을 내려다보다 말고 털썩 소파에 허물어지듯 앉으며, "열두 시까지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정말이에요?" 하고 따녀 물었다. 남편 김원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시간 반 동안을 어디서 보내지? 그래, 여보 우리 오래간만에 춤이나 추러 가는 게 어 때?" 남편은 왜 여지껏 그 생각을 해내지 못했을까 하는 얼굴로 정매를 보았다. "당신 미쳤어요? 집에서 저녁도 못 먹고 기다리지 있을 애들을 내버려두고 춤을 추러 가 자구요? 오늘 당신 왜 이래요?" 정매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녀는 오늘 남편이 좀 이상한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 아이들밖에 모르던 그가 갑자기 지나치리만큼 냉정하지 않은가. "내가 말했쟎아. 오늘은 우리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가져보자구말야. 잠시 아이들을 잊어보 자구 말야. 그래서 아이들에게 부모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자고. 이것도 아이들에 대한 교육의 하나야.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간절하게 부모를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시간을 갖게 해주고 싶은 거야. 나는 한 번도 그래보지 못했으니까, 우리 아이들만은 부모를 그리워하는 시간을 많이 주고 싶은 거야." 남편은 갑자기 우울한 기분에 젖어 말했다. 정매는 더 이상 남편을 조르지 않았다. 조금은 남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잠시 후 남편이 이끄는 대로 호텔 안에 있는 나이트 클럽에 가서 오랜만 에 남편과 함께 춤을 추었다. 춤을 추는 동안 그녀는 집에 있는 아이들 생각을 떨쳐버릴 수 가 있었다. 잠시 아이들 생각을 잊고 춤을 추는 동안 그녀는 짜릿하면서도 상큼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지훈 어머니에 대한 걱정도 잊을 수 있었다. 그녀는 집의 아이들과 지훈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잊기 위해 맥주를 한 병 가까이 마셨다. 그러다가 술기운이 온몸에 펴져 몸을 제대 로 가눌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춤을 추는 것을 그만두지 않고, 음악이 바 뀔 때마다 남편을 이끌고 플로어로 나갔다. "당신 여기 오기를 잘했지?" 블루스곡에 맞춰 휘황한 주황빛 조명을 받으며 천천히 움직이던 남편이 나지막한 목소리 로 물었다. "커피숍에 앉아 있는 것보다 좋아요. 우선은 쓸데없는 생각을 잊을 수가 있으니까요." "우리 앞으로 종종 이런 데 같이 오자구. 부부끼리 이런데 와서 춤을 추면서 은밀한 기분 에 젖어보는 것 괜찮지 않아?" "그래요. 종종 데려와 주세요." "여기서 춤추고 있는 사람들, 부부끼리는 아마 우리 두 사람뿐 일지도 몰라." "왜 그렇죠?" "그걸 내가 어찌 아나?" "당신도 이런 데서 다른 여자하고 같이 춤춰 본 적이 있겠죠?" "솔직하게 말해서 있었지." "몇 번이나 그랬죠?" "글세, 서너 번쯤? 아냐, 대여섯 번쯤 될걸." 남편 김원철은 솔직하게 말했다. 정매는 남편의 솔직함에 마음을 놓으면서도 어쩔수 없는 질투심 때문에 갑자기 스텝을 멈추어버렸다. 그리고 따지는 듯한 목소리로, "어떤 여자들이었죠? 설마 당신 환자들하고 춤추러 다니진 않았겠죠?" 하고 물었다. "당신답지 않게 왜 이래?" 그러면서 남편은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어 바짝 끌어 당겼다. "그럼 간호사들이에요?" "아냐, 병원 의사들하고 술 한잔 하러 왔다가 그냥 직업적인 댄서들과 잠깐 추었을 뿐이 야." 정매는 남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투정을 부리고 싶어 다시 스텝 을 멈추어버렸다. 정매는 정확히 밤 12시가 되어서야 나이트 클럽을 나와 남편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12시 30분이 조금 넘었다. 부저를 여러 차례 눌렀으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정 매는 아이들이 깊이 잠든 것으로 짐작하였다. "세상에… 저녁도 굶고 곯아떨어진 모양이에요." 정매는 그러면서 혀끝을 찼다. 잠시 후에 아파트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준 원주는 전혀 잠자다 깬 얼굴이 아니었다. 뒤이어 창주도 얼굴을 내밀었는데 그애 역시 잠을 자다가 일어 난 얼굴이 아니었다. "잠들지 않았었니?" 정매가 안쓰러운 얼굴로 두 아이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잠들지 않았어요" 큰아이 원주가 무엇인가 켕기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매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비밀을 찾아 내려고 하였지만 아무런 단서도 붙잡을 수 없었다. 식탁 위에는 요리 접시가 아무렇게나 놓 여져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음식점에서 요리를 시켜먹었다는 것을 알았다. "저녁밥은 어쨌니?" 정매는 식탁 위에 놓인 접시를 보며 물었다. "일곱 시가 넘어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아서 시켜먹었어요?" 원주의 대답에 남편이 흘깃 정매를 흘겨보았다. 자기 말이 맞지 않느냐는 그런 표정이었 다. "잘했구나. 그래 뭘 시켜먹었는데?" "난 탕수육하고 간자장 시켜먹고, 창주는 해삼탕에 자장면을 시켜먹었어요. 낼 아침에 돈 받으러 올 거예요." "아니, 간자장과 자장면에다 탕수육하고 해삼탕까지 시켜먹었단 말이냐?" 정매는 놀란 얼굴로 남편을 보았다. 남편은 그렇지, 내 말이 맞지? 하는 표정으로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의미 있게 웃었다. "세상에…" 정매는 놀란 얼굴로 안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12시가 넘도록 잠을 자지 않은 것도 이상했지만, 부저를 열 번이 넘게 누르도록 문을 열어주지 않은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텔레비전도 나오지 않는 시간에 잠을 자지 않고 무엇을 했을까? 정매는 아이들의 얼굴을 들 여다보았다. 자꾸만 아이들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거실을 둘러보 았다. 그때 정매의 눈에 비디오가 들어왔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서 비디오에 손을 얹어보았다. 비디오의 몸체가 오랫동안 열을 받아서 뜨거웠다. 그제야 그녀는 아이들이 12시가 넘도록 비디오를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매는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화장대 서랍에 감추어둔 포르노 비디오 테이프를 찾아보았다. 지난해 봄 일본에 갔다 온 같은 병원의 동료가 준 것이라면서, 남편이 가져왔던 것을 두어 번 구경하고 아이들이 볼까 싶어 은밀하게 숨겨두었던 것이었 다. 정매는 분명히 그 포르노 테이프를 화장대 맨 아래 서랍에 넣어두었었는데 아무리 찾아 보아도 보이질 않았다. 그녀는 너무 당황해서 거실로 나왔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얘들 어디 갔어요?" 정매가 짜증스런 목소리로 남편에게 따지듯 물었다. "자야겠다며 저희들 방으로 들어가던데?" "엄마한테 인사도 안 하고요?" "근데 당신 왜 그래? 당신 생각대로 애들이 굶은 채 눈이 빠지게 기다리지 않았다고 화가 난 거야?" 남편은 속도 모르고 실실거리며 정매를 놀리고 있었다. "당신 혹시 테이프 봤어요?" "테이프라니?" "지난번 닥터 최가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그 포르노." "왜? 그걸 또 보고 싶어서 그래? 둘이 함께 본 것만도 세 번째나 되지 않아, 당신? 지겹 지도 않아?"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구요."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글세, 봤어요, 안 봤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난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구. 그러자 정매는 남편을 끌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정매한테 끌려 들어온 김원철은 아내의 이상한 태도에 당황한 듯 싶었다. "왜 그래?" 남편 김원철은 정매에게 가볍게 화를 내고 있었다. "없어졌어요. 틀림없이 아이들 짓이라구요. 이 일을 어쩌지요? 아직 너무 어리잖아요." 김원철은 아내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애매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릴 뿐이었다. "차근차근 말해 봐. 당신 뭣 때문에 이러는 거야?" "아이들이 글세, 우리들 없는 사이에 그 포르노 테이프를 보았다니까요. 이제 고작 초등학 생인 어린아이들이 말예요." 말을 하면서 정매는 누구에겐가 화를 내고 있었다. 정매의 이야기에 김원철도 다소 놀라는 얼굴을 하였다. 그들은 다시 화장대의 서랍을 뒤 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매가 감추어두었던 포르노 테이프는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 있구만. 당신 여기에 꽂아놓았으면서 그래." 잠시 후에 거실로 나간 김원철이 테이프를 손에 들고 말했다. "그게 어디 있었어요?" "비디오에 꽂혀 있던데?" "아니 뭐요?" "왜 그리 놀라나?" "애들이 오늘 밤에 그 비디오를 보고 있었던 거라구요. 그걸 보다가 우리가 오니까 놀라 서 미처 문을 못 열고 꾸물대고 있었던 거라구요." "설마…" 김원철은 정매의 말을 믿지 않으려고 하였다. "우리 아이들이 설마 우리 몰래 이걸 보고 있었을라구." 그러면서 김원철은 고개까지 가로저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이게 다 우리가 늦게 돌아온 탓이에요." 정매는 남편에게 신경질적으로 말하였다. "이놈의 새끼들을 그냥!" 김원철은 단단히 벼르면서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때 정매가 남편의 팔을 붙잡아 방안으 로 끌어들였다. "이러시면 안 돼요. 애들을 나무란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자칫 잘못했다가는 역효과가 난 다구요. 중학교에 다니는 우리 이종사촌 언니 아들은 수음을 하다가 엄마한테 들킨 후로 뛰 쳐나가 여지껏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대요. 그러니 함부로 다뤄서는 안 돼요. 당분간 모르는 척합시다. 모른 척하고 있다가 당신이 좋게 타이르세요. 절대 지금 나무라서는 안 돼요. 우 리 이종사촌 언니를 생각하면 어찔해요. 언니한테는 그 아들 하나뿐이거든요." 김원철은 정매의 말에 수긍이 갔다. 그는 방바닥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여물었다. "당신은 왜 그런 저질 테이프를 집에까지 가져와서 이렇게 속을상하게 해요?" 정매가 다시 남편을 닦달하였다. "좋아라고 그걸 세 번씩이나 본 건 누군데?" 김원철은 아내를 향해 눈을 흘겼다. 두 아이들의 부모가 없는 사이에 포르노 비디오를 본 것은 정매 부부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아니 실망 정도가 아니라 불안과 번민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정매는 그날 밤 잠을 못 이루고 고민을 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다 비뚤어져도 원주와 창주만 은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자랄 것으로 믿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조금전 아이들이 보았던 포르 노 비디오 테이프를 들고 나가 쓰레기통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 불 을 켰다. 두 아이들은 천진스러운 얼굴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정매는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오랫동안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이렇게 천진스럽고 고운 아이들이 부모 몰래 포르 노 비디오를 보고 있었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 일을 어쩌지요? 모두 당신 잘못이에요." 아이들 방의 불을 끄고 안방으로 돌아온 정매는 자리에 누을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 귀퉁 이에 걸터앉아서 남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김원철은 자는 척하였다. "그래, 당신은 우리 애들이 그런 짓을 했는데도 잠이 와요?" 남편이 대꾸를 해주지 않자 그녀는 방안의 불을 밝혔다. "당신 잠 안 자고 왜 그래?" 정매가 불을 밝혀서야 김원철은 눈을 뜨고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애들이 그런 짓을 한 건 당신 탓이라니까요." 정매는 괜히 눈물이 나오려고 하였다. "우리 아이들만 그런 거 아니야. 요즘 아이들 부모 몰래 음란한 비디오 테이프 보는 거,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냐." "뭐라구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구요?" 정매의 목소리가 호비칼로 후벼파듯 날카로웠다. "저만한 나이 때는 이성에 호기심을 가질 만하다고 나도 저만했을 때 여자아이들 꽁무니 를 따라다녔으니까." 김원철은 그 말을 하는 순간, 고아원에서 경옥이를 처음 만나 이성에 대해 야릇한 감정의 움직임을 체험했던 때를 떠올렸다.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순수하고 아름다 웠던 느낌이었다. "원주만한 나이에 이성을 느꼈단 말예요?" 정매가 김원철의 말꼬리를 물고늘어졌다. "그렇다니까." 김원철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정매는 불빛 아래 꼿꼿하게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남편을 내려다보았다. 김원철은 비식거 리며 웃고 있었다. "당신은 저만한 나이 때 이성을 느끼지 못했어?" 김원철은 여전히 비식거리는 표정으로 정매에게 물었다. "불결해요." "불결? 당신 그런 데에다 불결이라는 말을 써도 된다고 생각해?" 김원철은 정매의 말을 따지듯 반문했다. 정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벌레 씹은 표 정으로 남편을 내려다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당신은 그럼 우리 아이들도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불결하고도 칙칙해요." 김원철이 묻고 정매가 대답했다. "당신은 뭘 모르는구먼. 그건 자연스런 일이야. 자연스러운 거라구.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 게 자라고 있다는 증거야."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당신은 우리 애들이 그런 저질 테이프를 본 것을 칭찬이라 도 해주고 싶은 거예요?" "물론 우리 애들이 잘했다고는 말하지 않겠어. 그러기에 내가 언제 기회를 봐서 알아듣게 타이르겠다고 하지 않았나. 당신도 그렇게 하라고 하구선.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야, 그 일이 그렇게 우리가 잠을 못 이루고 고민을 할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는 거야. 우리 애들이 그 테이프를 부모 몰래 봤다고 해서, 아이들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도 않을 거라 구. 그들도 얼마 안 있으면 알 것은 다 알게 될 테니까 말야. 그러니 다 잊고 어서 잠이나 자요. 김원철은 아내에게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듯 하였다. 그러나 정매는 남편의 그 말에 조금 도 긍정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난, 참을 수가 없어요.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라구요." "그렇다면 어쩌자는 게야? 아이들을 끌고 정신병원에라도 가야겠어?" 김원철은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암튼 심각한 문제라구요. 대책을 세우지 않고 이대로 뒀다가는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구 요." "대책을 세우든지 말든지 당신이 알아서 해. 난 좀 자야겠으니 제발 불이나 좀 꺼줘요." 그러면서 김원철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러나 정매는 심란한 얼굴로 한숨만 을 푹푹 몰아쉬고 있었다. "제발 잠 좀 자자니까." 김원철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소리를 내질렀다. 다음날 정매는 남편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원주를 데리고 외출 준비를 했다. 약속대로 지훈 어머니에게 원주를 데리고 갈 계획이었다. 지훈 어머니와는 점심을 먹으러 가겠다고 하였으나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외출을 서두른 것이었다. 정매는 하룻밤 사이에 두 아이들이 달라져 보였다. 간밤의 일을 생각하면 자꾸만 칙칙하 고 징그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포르노 테이프의 음란한 장면들이 거 듭 떠오르면서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보기가 꾸릿꾸릿해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간밤의 일을 까맣게 잊은 듯 여전히 천진스럽고 명랑했다. "엄마, 왜 형아만 데리고 가는 거야? 나도 따라갈 테야." 정매가 원주와 함께 외출 준비를 서두르자 둘째 창주가 불만투로 말하였다. "오늘은 집에 있거라. 다음엔 꼭 창주를 데리고 갈 테니까." 정매는 부드러운 말로 창주를 다독거렸다. "엄마, 형 데리고 어디 가는데?" 창주가 다소 마음이 누그러진 듯 물었다. "원주 선생님한테 가는 거란다." 정매는 거짓말을 하였다. 정매는 원주를 그의 선생님한테 데리고 간다고 했더니, 원주는 가기 싫다면서 오리털 점퍼를 벗어 팽개쳤다. "나 안 갈래." 원주가 갑자기 화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댔다. 정매는 그런 원주를 보고 너무 당황해 하 였다. "네 선생님한테 가자는데 왜 그렇게 화를 내니?" "방학인데 뭣하러 가요!" 정매가 묻고 원주가 대답했다. "선생님 싫어!" 원주는 단호했다. 정매는 원주가 무엇 때문에 선생님을 만나기 싫어하는지 몰라 걱정이 되기까지 하였다. "원주 너 선생님한테 잘못한 일이 있는 게로구나, 그렇지?" "잘못한 일 없어요." "그럼 왜 그러니?" "우리 선생님 보고 싶지가 않은걸." "왜 보고 싶지가 않어?" "못 생겼으니까." "뭐라구? 선생님이 못생겼으니까 만나기 싫다구?" 정매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어버렸다. "네 선생님이 못생긴 것하고 너하고 무슨 상관이니? 공부만 잘 가르치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정매는 원주의 말에 그의 담임 선생을 떠올리며 말했다. 정매가 생각하기에 원주의 담임 조 선생은 키가 좀 작고 이마가 살짝 튀어나온 짱구라서 그렇지 그렇게 못생긴 얼굴도 아니었다. 서른이 넘도록 시집을 못 가서 다소 노처녀 히스테 리가 있다고는 들었으나 일류 대학 출신으로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실력 있는 선생님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난 못생긴 선생님은 아무리 잘 가르쳐도 공부하기가 싫단 말야. 교장 선생님한테 이쁜 선생님으로 바꿔달라고 편지를 쓰자는 아이들도 있는데?" 원주는 노골적으로 말하였다. 정매는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짜리가 제 선생님의 얼굴 타박을 하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세상에… 원주 넌 네 엄마가 못생겼다면 엄마라고 부르지도 않겠구나." 정매는 한숨을 섞어 물었다. "엄만 미인이잖아." 그러면서 원주는 정매를 향해 씩 웃었다. "창주 너도 그러니?" "응, 엄만 미인이야. 나도 엄마 같은 여자한테 장가 갈 테야." "그것말고, 너도 못생긴 선생님한테서는 공부하기가 싫니?" 정매는 다소 언성을 높이며 창주에게 물었다. "우리 선생님은 엄마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미인인걸. 원주 형은 우리 선생님하고 형아 선생님하고 바꿨으면 좋겠대. 그러나 난 바꾸기 싫은걸." 정매는 다시 창주를 보며 한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 아이들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전과 같지 않은 것이다. "원주, 어서 옷을 입어라." 한참 후에 정매는 점퍼를 벗어 팽개쳐버린 원주를 다그쳤다. 그러나 원주는 옷을 다시 입 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네 선생님한테 가지 않을 테니 어서 옷을 입어." 정매는 원주를 향해 소리쳤다. "그럼 어디 가는데?" "부산에서 제일 이쁜 미녀를 만나러 간다." 원주가 묻고 정매가 대답했다. "그 여자가 누군데?" 그제야 원주는 벗어던졌던 점퍼를 다시 업으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그런 아들을 향해 정매는 혀끝을 찼다. 정매는 점심때가 거의 다 되어서야 원주를 데리고 아파트를 나섰다. 원주가 한사코 그의 선생님을 만나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이를 설득하지 못하고, 결국은 다른 핑계를 대 억지 로 끌고 나오다시피 한 것이었다. 정매는 기왕에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차라리 점심때를 맞 춰서 지훈 어머니가 일하고 있는 식당으로 나갈 계획이었다. "엄마, 부산에서 제일 미인이라면 미스 부산을 만나러 가는 거야? 엄마가 미스 부산 알 아?" 원주가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물었다. "미인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고 그냥 점심을 먹으러 가는 거야." 정매의 말에 원주는 다소 실망한 얼굴로 걸음을 멈추어섰다. "씨, 아깐 미녀를 만나러 간다고 하구서는." 원주는 씩씩거리며 정매를 쏘아보았다. "조그만 게…" 정매는 원주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고 나서, "너 엄마하고 둘이서만 외식하는 게 싫으니?" 하고 따지듯 물었다. "점심 먹으러 가는 거라면 창주도 데리고 가면 되잖아." 원주가 아파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창주는 내일 사주기로 하고 오늘은 우리 둘이만 먹자. 너 한테 엄마가 할말도 있고 하니까 말야." 정매는 아직 점심때가 되려면 한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걸으면서 말했 다. "무슨 할말?" 원주는 갑자기 간밤 창주와 함께 엄마의 화장대 서랍 속에 감추어둔 비디오 테이프를 구 경했던 것이 떠올라 시무룩해졌다. "너 엄마한테 잘못한 일이 있잖니." 정매가 뒤따라오는 원주를 돌아보며 추궁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창주가 먼저 보자 했단 말야. 나는 그 테이프가 어디에 있었는 지도 몰랐다구요. 그런데 창주가 엄마 화장대에서 그걸 갖고 와서…" 원주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 겸연쩍은지 말끝을 흐려버렸다., 정매는 꾸릿꾸릿한 마음 때문에 아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가 없어 턱을 쳐들어 하늘 을 보았다. "남자가 비겁하게 왜 동생 핑계는 대니? 창주가 그걸 보자고 해도 형인 네가 말렸어야 지." 정매는 가볍게 원주를 꾸짖었다. 정매가 원주와 함께 택시에서 내려 손목시계를 보았더니 11시 35분이었다. 점심을 먹기에 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큰 길을 건너 하동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엄마, 뷔페 먹을까?" 점퍼에 손을 찌르고 쫄랑거리며 따라오던 원주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점심때 뷔페는 무슨…" "그럼 칼질하고 싶어." "칼질?" 정매가 힐끗 원주를 돌아보았다. 원주가 밝게 웃었다. 봄날의 말고 싱그러운 햇살과도 같 은 원주의 웃음이었다. 정매는 아들의 그 웃음을 보는 순간 간밤의 일로 칙칙했던 기분이 싹 가셔버린듯 싶었다. "스테이크 먹고 싶어." 원주의 말에 정매는 속으로 쿡 웃으면서 하동식당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여긴 설렁탕집이잖아." 원주가 하동식당의 큰 플라스틱 간판을 올려다보며 어쭙잖은투로 말했다. 정매는 원주의 불평을 못 들은 척하고 식당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점심때가 아직 이른 탓인지 식당은 썰렁했다. 카운터의 주인 여자가 큰 석유난로 옆에 앉아 있다가 정매가 들어서자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지훈 어머니로부터 정매가 여학교 후배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안녕하세요? 어저께는 언니를 몰라보았어요. 죄송해요." "나도 어저께는 긴가민가했구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생각이 안 나더라고." 식당 여주인은 그러면서 난로 옆에 정매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고 원주를 보며 몇 째냐 고 묻고 나서, 정매가 대답을 할 여유도 주지 않고 주방 쪽에 대고 큰 소리로, "아주머니, 손님이 왔고마." 하고 소리쳤다. "아주머니가 아침부터 손님이 찾아올 것이라 캄서 섣달 큰아그날 받아논 것맹키로 들성거 리고 있었데이." 식당 주인 여자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잠시 후에 지훈 어머니가 주방에서 나왔다. 지훈 어머니는 정매와 원주가 나란히 앉아 있 는 난로 옆으로 다가오더니, "아가씨 오셨구만예." 하고 말하곤 눈을 뜨고 원주를 보았다. 지훈 어머니는 난로 옆 식탁 모서리에 손을 짚고 서 서 오랫동안 그렇게 원주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순간 지훈 어머니의 눈이 크렁하게 젖기 시 작했다. 정매는 얼핏얼핏 지훈 어머니의 표정을 훔쳐보면서 그녀가 냉정을 찾아주었으면 하 고 바랐다. 정매 생각에는 지훈 어머니가 와락 원주를 끌어안고 아이고 내 손자놈아, 하고 울음을 터뜨릴 것 만 같았다. "네 이름이 뭐꼬?" 한참 후에 지훈 어머니가 원주 쪽으로 고개를 꺾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훈 어 머니의 물음에 원주는 약간 뜨악한 눈길로 낯선 노파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른이 물으시는데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냐?" 정매가 원주를 보며 다그쳤다. 그제야 원주는 여전히 마땅찮은 얼굴로 지훈 어머니를 쳐 다보며, "김원주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김원주, 그래 몇 살이꼬?" 지훈 어머니가 다시 묻자 원주는 귀찮다는 눈빛을 하며, 이것도 대답을 해야 하느냐는 듯 정매를 보았다. 정매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열 살입니다." 원주는 큰 소리를 대답했다. 그러자 지훈 어머니는 여전히 크렁하게 젖은 눈으로 혼이 빠 진 듯 말그러미 원주만을 바라보았다. "아주머니, 우리 점심 먹어야겠는데요. 설렁탕으로 주세요." 정매는 지훈 어머니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그렇게 말했다. 그제야 지훈 어머 니는 원주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정매를 보았다. 정매가 이제 그만하면 되었지 않느냐는 눈빛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나 지훈 어머니는 그 자리에 빳빳하게 서서 다시 원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원주에게 무엇인가 또 물으려는 듯 여싯여싯 망설이고 있는 듯하였다. "김양아, 여기 설렁탕 둘이다." 식당 주인 여자가 종업원을 부러 말하였다. 그때까지도 지훈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꼼짝 도 하지 않고 넋을 잃은 얼굴로 서서 원주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주머니, 그라고 서 있지만 말고 앉으시이소." 식당 주인 여자가 턱짓으로 식탁의 의자를 가르키며 말하자, 지훈 어머니는 의자를 원주 옆으로 바짝 끌어당켜 앉곤 다시 눈길을 원주에게로 쏟았다. 무서운 힘에 빨려들 듯 원주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길은 아교풀처럼 찐득하게 보였다. 지훈 어머니는 원주의 얼굴에서 지훈의 어렸을 적 모습을 찾아 보려고 하였다. 붓에 먹물 을 찍어 그린 듯한 새까만 눈썹이며 끝이 뭉뚝한 코, 그리고 좁장한 이마와 작고도 쫑긋한 귀, 짧은 인중에 두툼한 입술이 영락없이 지훈의 어렸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이름이 원주라 캤쟈?" 지훈 어머니는 다시 원주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그렇게 물었다. "예, 김원주." 원주가 신경질적으로 큰 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순간 지훈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너는 김 원주가 아닌 기라. 네노마 진짜 이름은 최원주인 게라. 이노마가 제 성씨도 잘 모르는 고마, 하고 말하면서 짯짯이 원주의 얼굴을 되작거려 보았다. 지훈 어머니의 그 같은 시선에 원주 는 한사코 귀찮아 하는 눈치였다. 원주는 어쩌다가 지훈 어머니와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하 면 후다닥 고개를 돌려보리고 하였다. 잠시 후에 설렁탕이 나오자 정매와 원주는 난로 옆에 탁자로 옮겨왔다. 그때까지도 지훈 어머니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몸을 돌려앉으며 원주에게 묶음으로 시선을 퍼붓고 있었 다. 원주는 심통이 난 표정으로 숟갈을 들어 설렁탕 국물을 떠먹었다. 정매가 외식을 시켜준 다기에 잔뜩 기대를 걸고 따라나왔다가 기껏 설렁탕을 먹게 되자 심통이 난 것이었다. 그런데다가 처음 본 웬 휘주근한 차림의 노파가 옆에 앉아서 따끔거리는 눈으로 들여다보 고 있어 기분이 좋지가 않은 것이었다. 원주는 설렁탕을 깨지락거리다가 숟갈을 놓아버렸다. "왜 안 묵는겨? 우리 집 설렁탕 국물은 쩍쩍 달러붙는다 카이." 원주가 숟갈을 놓아버리자, 옆에 앉아서 먹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지훈 어머니가 한마디 하였다. 원주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침을 늦게 먹어서 배가 고프지 않은가 봐요." 정매가 대신 말해 주었다. 그녀는 되도록 빨리 원주를 데리고 식당에서 나가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지훈 어머니가 끈끈한 시선으로 원주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저도 아침을 늦게 먹었더니 밥맛이 없네요." 정매도 숟가락을 놓고 엽차로 입을 헹구고 나서 말했다. 그녀는 밥값을 계산하고 일어섰 다. 정매가 원주를 데리고 식당을 나가려고 하자, 지훈 어머니는 매달리는 눈으로 안타깝게 정매 모자를 바라보았다. "아주머닌 오늘 내려가신다면서요?" 정매가 일부러 식당 여주인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정매의 말에 지훈 어머니는 난처한 얼굴을 하였고, 식당 여주인은 영문을 몰라 의아해 하는 눈빛으로 지훈 어머니를 보 았다. "아주머니, 하동으로 가시능교?" 식당 주인 여자가 지훈 어머니에게 물었다. 지훈 어머니는 난처한 얼굴로 식당 주인과 정 매를 번갈아보았다. 정매가 하동식당을 나오자 지훈 어머니도 따라나왔다. 지훈 어머니는 어 느 사이엔가 주방으로 들어가서 큼직한 종이 가방을 들고 정매를 따라나온 것이었다. "이거 원주한테 주이소." 지훈 어머니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정매한테 건네주며 말했다. "이게 뭔데요?" "원주 옷 한 벌 샀십니더." "원주 옷은 왜요? 이러지 마시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성의니 받아주이소." 그러면서 지훈 어머니는 한사코 종이 가방을 정매의 손에 넘겨 주었다. 하는 수 없이 정 매는 종이 가방을 받아들었다. "아주머니는 하동으로 내려가시는 거죠? 저하고 그렇게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정매가 묻는 말에 지훈 어머니는 여남은 걸음 앞서 걷다 말고 걸음을 멈추고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원주를 보며 무겁게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동에 내려가 계시면 언젠가 또 원주를 데리고 가겠어요. 그러니 부산에서는 다시 원주 만날 생각 마시고 내려가 계세요." 정매는 냉엄하게 말하고 몸을 돌려세워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훈 어머니는 정매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원주가 서 있는 보험회사 빌딩 모퉁이 쪽으로 다가가더니, 원주 앞에 쭈 그리고 앉아 턱끝을 쳐들고 원주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원주 잘 가그래이. 그라고 또 만나재이." 지훈 어머니는 정매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원주의 손을 잡았다. 원주가 지훈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려고 하였다. 그때 정매가 빈 택시를 잡고 다급하게 원주 를 불렀다. 원주는 지훈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택시가 서 있는 차도로 내려와 도망치듯 차에 올랐다. 지훈 어머니는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험회사 건물 모퉁이에 서 있었다. "엄마, 아는 사람이야? 꼭 귀신 같은 할머니야." 택시 안에서 원주가 큰 소리로 물었다. "원주 뭐 먹고 싶니? 우리 제과점에 가서 단팥죽 먹을가?" 정매눈 원주가 묻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그렇게 묻고 나서, 제 과점의 간판을 찾기 위해 차창 밖에 시선을 던지고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그녀는 제과점 간판을 발견하고 택시를 세 웠다. "우리 단팥죽 한 그릇씩 먹고, 창주 줄 빵도 사가지고 가자." 정매는 부드럽게 말하며 원주의 손을 잡고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엄마, 식당에서 만난 거지 같은 노인이 누구야?" 제과점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원주가 얼굴까지 찡그리며 불만스럽게 물었다. "노인이 뭐니? 할머니라고 해야지." "우리 할머니도 아닌데?: "그래도 나이가 든 어른이니까 할머니라고 해야지." 정매는 부드럽게 아들을 나무랐다. "내 얼굴만 뚫어져라 하고 들여다봐서 기분이 나빴어요. 뭐 그런 노인이 다 있어요?" 원주는 여전히 불통거렸다. 정매는 그런 아들을 향해 눈을 흘기고 나서, "엄마 고향 사람이야. 불쌍한 할머니란다. 그 할머니한테는 아무도 없거든. 그래서 고향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한단다." "아들이나 딸도 없어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얼마 전에 죽었어." "얼마 전에 죽은 엄마의 친구가 그 노인의 아들이지, 엄마?" 원주는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기억해 낸 듯 상반신을 들썩거리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 다. "그래, 기억하고 있구나." "그럼 그 할머니 혼자 사는거야?" "혼자 살지 않구. 이 세상에 친척이 아무도 없으니까. 그러니 얼마나 불쌍하니?" "혼자 살면 불쌍한 거야?" "불쌍하지. 너도 엄마나 아빠, 그리고 창주가 없이 혼자 산다면 얼마나 불행하겠니?" "나는 어린애잖아." "원주는 혼자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제과점에서 단팥죽을 먹고 집에 돌아온 정매는 하동식당으로 전화를 걸어서 지훈 어머니 와 통화를 하였다. 그녀는 먼저 원주에게 스웨터를 사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말하고 언제 부산을 떠나겠느냐고 물었다. 지훈 어머니는 언제 떠날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여짓거리기만 하였다. "저하고 약속을 하시지 않았어요? 약속대로 하셔야죠." 정매는 다그치듯 말하였다. 그러나 지훈 어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약간 트적지근한 목소리로, "너무 나를 내쫓을라고 허지 마이소. 떠날 때가 되면 떠나게 될기라예."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정매는 더 할말을 잃고 수화기를 놓아버렸다. 그러곤 원주를 데리고 괜히 식당까지 갔다 왔구나 하고 후회하였다. 5. 밤과 낮 김원철은 병원의 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야 그날이 금요일이라는 것을 알고 약간 당황해 하였다. 그는 식당의 벽에 걸린 큰 달력을 쳐다보며, 금요일은 왜 이리 자주 돌아오 지? 하고 마음속으로 불만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금요일에는 경옥이 모녀를 만나러 가야 했 기 때문이다. 그는 매주 금요일만 되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강제로 저당잡힌 듯한 기분이었 다. 그날만은 자신이 속박의 튼튼한 밧줄에 묶임을 당하는 것만 같았다. 그 때문에 그는 여러 차례 그 속박의 굴레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는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그를 묶은 속박의 끈을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김원철은 경옥이 모녀를 만나러 갈 시간이 다가오자 괜히 짜증이 났다. 그가 그들 모녀를 만나러 가는 것은 의무였으며, 그 의무에는 언제나 불안감이 따랐다. 그러기에 부자유스러움 을 절감하게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이, 닥터 김. 오늘 오후에도 회오리바람이 될 건가?" 김원철이 경옥이 모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가운을 벗고 머리를 손질하는 것을 본 동료 의 사들이 비아냥거렸다. 그들은 김원철을 '금요일의 회오리바람'이라고들 부른다. 금요일 오 후 4시만 되면 어김없이 병원을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선배 의사로부터 힐책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김원철의 재치 있는 변명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그는 동료들 에게 늘그막에 혼자가 된 불쌍한 고향 어른을 위해 매주 금요일만 되면 왕진을 한다고 둘러 댔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금요일 경옥이 모녀를 만나러 갈 때는 어김없이 왕진 가방을 챙겨 차에 싣는다. 언젠가 동료 의사들을 그의 집에 초대하여 회식을 할 때, 거나하게 술에 취한 동료 하나가 그의 부인 정매에게, "닥터 김이 매주 금요일마다 자취를 감추곤 하는데. 그 사실을 아십니까?" 하고 말해 버려, 그것을 정매한테 설명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몰랐다. 매주 금요일 오 후 그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병원을 나가는 사실을 정매는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원철이 왕진 가방을 들고 막 진찰실을 나서려는데 미숙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 지금 간다. 그러니 집에 있거라." 김원철은 미숙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리려고 하였다. 그때 미 숙이가 다급하게, "아빠, 나 지금 병원에 와 있어요. 여기 수위실이에요." 하는 것이 아닌가. 김원철은 서둘러 수위실로 내려갔다. 미숙이가 병원에까지 찾아온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무슨 일인가 싶어 걱정이 되기도 하 였지만, 한편으로는 미숙이가 그의 숨겨놓은 딸이라는 것이 밝혀질까 봐 불안하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미숙이가 한사코 친구들과 병원에 놀러오겠다는 것도 핑계를 대어 차일피일 미루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김원철은 미숙이가 진찰실까지 올라오지 않은 것을 여간 다행한 일로 생각하며 서둘러 엘 리베이터에 올랐다. 진찰실에서 뛰어나온 김원철은 수위실 공중전화 부스 앞에 서있는 미숙이를 발견하였다. "나가자." 김원철은 다급하게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미숙이를 끌고 병원 밖으로 나갔다. 그는 차를 세워둔 지하실 차고까지 내려가서 미숙이를 옆자리에 앉게 한 다음에야, "아빠 자금 가는 길인데 병원에는 뭣하러 왔어?" 하고 가볍게, 그러면서도 퉁명스럽게 나무람하였다. 김원철의 나무람에 눈치 빠른 미숙은 이 내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숙여버렸다. "엄마 때문에 엄마 때문에 왔어요." 미숙의 목소리가 지렁이 우는 소리처럼 잦아들었다. "엄가가 왜?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니?" 김원철이 차를 몰아 지하실의 차고를 빠져나가면서 뜨악하게 물었다. "엄마 병원에 있어요." "병원에? 병원에는 왜? 어디 아프시니?" 김원철은 건성으로 남의 말하듯 물었다. 미숙이는 아빠의 표정에서 엄마가 병원에 있다는 데 대해서 별로 걱정을 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미숙은 그런 아빠가 비정하게 느 껴졌다. "엄마 오늘 눈을 떠요." 미숙은 엄마가 아빠에게 비밀로 해달라는 말은 끝내 털어놓고 말았다. 다른 말은 다 참을 수 있었지만 엄마가 눈을 뜬다는 것만은 비밀로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것은 자랑이라기보 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미숙이 생각에 엄마가 눈을 뜨게 되면 아빠 몰래 멀리 떠나버릴 것 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방금 엄마가 어쩐다고 했니?" 김원철은 미숙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미숙이가 그에게 말을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엄마가 오늘 병원에서 눈을 뜬다니까요." 김원철은 하마터면 자동차를 인도로 몰 뻔하였다. 그는 찍 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차를 인 도의 은행나무 가로수 앞에 바짝 붙여 세웠다. "방금 뭐라고 했니?" 김원철은 차를 세우고 나서 다시 물었다. 그리고 긴장된 표정으로 미숙이의 입술을 보았다. "엄마가 눈을 뜬대두요." 미숙이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였다. "뭐라고? 너 방금 뭐라고 했는지 다시 차근차근 말해 봐." 김원철은 아무래도 미숙이의 말을 믿고 싶지가 않았다.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요? 엄마가 오늘 눈을 뜬다니까요. 엄마가 아빠한테는 절대로 말하 지 말랬는데 이야기하는 거예요. 엄마가 아빠 몰래 멀리 떠나버릴지 몰라서요." 미숙은 끝내 마음속에 품어온 생각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아빠가 엄 마를 멀리 가지 못하게 붙들어달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었다. "멀리 떠난다고?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하던? 아냐,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엄마가 눈을 뜬다는 이야기부텀 해보자. 그래 어떻게 된 건지 차근차근 말해 보아라." 김원철은 숨을 돌리기 위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물었다. "천주교에서 사랑의 빛 찾아주기 운동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대상이 되어 무료 개안 수술 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오늘 붕대를 푸는 날이에요. 엄마는 처음에 수술을 받지 않으려고 했 어요. 그때 아빠에게 엄마를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을 할까 했었는데, 엄마가 내 맘을 읽으시 고 생각을 고쳤어요." 김원철은 미숙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한동안 말없이 담배 연기만을 숭숭 내뿜고 앉아서 행인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숙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았다. 미숙이가 그런 거짓말을 할 수도, 그럴 이유도 없지 않은가. "수술은 언제 했니?" 한참 후에 두 개비째의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숙은 대답을 하 지 않고 아빠의 옆얼굴만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엄마가 눈을 뜨게 된다는데도 아빠는 별로 기뻐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기뻐하기는커녕 되레 걱정스러운 얼굴이 아닌가. 미숙은 그런 아빠의 표정을 읽고 크게 실망하였다. 그것은 실망이 아니라 분노였는지도 모른다. 미숙은 다만 아빠한테 어떻게 분노의 표정을 나타낼 수 있을까를 몰랐을 뿐이었다. "지난주 토요일에 수술을 했어요. 엄마가 한사코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예정보다 늦 어졌다구요." 미숙이는 엄마가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 자신이 눈을 뜬다고 해도 아빠가 그 사 실을 기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생 각이 거기에 미치자 아빠를 보는 눈이 호비칼처럼 날카롭게 휘어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의사 선생님께서 엄마가 눈을 뜰 수 있을 거라고 분명히 말하더냐? 네가 의사 선생 님의 말을 들었느냐? 뭐라고 하더냐?" 김원철은 다급하게 이것저것 물었다. 김원철은 미숙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경옥이가 수술을 하여 확실하게 시력을 회복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의사 선생님이 엄마를 나무랐어요. 진작 눈을 뜰 수 있었는데 왜 여지껏 수술을 하지 않 고 답답하게 살아왔느냐고요.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따졌지요. 왜 아빤 그 동안 엄마를 한 번도 병원에 데려가 보지 않았냐고요. 그랬더니 엄마는 " 미숙이는 일단 말을 멎고 아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미숙의 날카롭고도 뜨거운 눈길을 의식한 김원철은 시선을 피해 멀리 창 밖의 뿌연 하늘을 보았다. "그래 엄마가 뭐라고 하던?" 김원철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가 여러 차례 병원에 가자고 했으나 엄마가 마다했다고 하시대요. 엄마는 그랬을 거 라구요. 나도 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엄마를 설득시키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다구요." 미숙이의 말에 김원철은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 어느 병원이니? 붕대는 몇 시에 푼다던?" 한참 후에 김원철이 천천히 자동차를 움직이며 물었다. "성모병원이에요. 다섯 시쯤에 붕대를 풀기로 했대요." 미숙의 말이 떨어지자 그는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뜨고 그 자신을 바라 보게 될 경옥이와 얼굴을 마주 대하기가 두려웠다. 그는 차마 경옥이의 눈을 들여다볼 자신 이 없었다. "아빠는 병원에 가시면 안 돼요. 아빠한텐 비밀로 하기로 약속을 했거든요." 성모병원에 가까이 이르자 미숙이가 말했다. 실은 김원철 자신도 눈을 뜬 경옥이 앞에 나 타나기가 두려웠다. 그렇지만 경옥이가 눈을 뜬다는데 가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 가? "아빠 이렇게 해요." "뭘 말이냐?" "오늘은 병원에 가지 마시고 낼이나 모레쯤에 집으로 오세요. 오늘 아빠가 병원에 가시면 충격을 받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겠니?" "엄마하고 약속을 했거든요.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엄마를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가 않아요. 엄마는 늘 저한테 실망을 느끼면 멀리 떠나버리겠다고 하셨거든요. 전 어떤 일이 있어도 엄 마를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가 않아요." "그럼 그렇게 하자." 김원철은 그렇게 말하고 미숙을 병원 앞에서 내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출발하지 못하 고, 자동차를 세운 채 그대로 차 안에 들어앉아 있었다. 혹시나 경옥이가 눈을 뜬 모습으로 밖으로 나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는 몇 번이고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가 경옥이가 눈을 뜨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뿐이었다. 김원철은 경옥이가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날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김원철을 붙들고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김원철은 그런 경옥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아기를 낳지 않았더라면 시력을 잃지 않았을 게 아니냐고 추궁하면서 화를 냈던 것이었다. 김원철은 오랫동안 승용차에 앉아 있었다. 어느덧 짧은 겨울의 하루해가 서서히 사위어가 기 시작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7시가 넘었다. 그는 6시 반에 가족들과 만나 외식을 하고 영화 구경을 가기로 약속을 하였었다. 아이들이 포르노 비디오를 훔쳐본 것에 충격을 받은 그들 부부는, 아이들과 만화 영화를 함께 보기로 한 것이었다. 가족들과 만날 장소에 시간 맞춰 가기 위해서는 차를 돌려야만 했다. 그러나 김원철은 조 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그대로 병원 앞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손목시계를 들 여다보며 자동차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경옥이가 미숙이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의 현관을 나오고 있는 모습이 김원철의 시야에 들어왔다. 미숙에게 부축을 받으며 병원 현관문을 나온 경옥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 렸다. 그녀는 먼저 어둠이 서서히 덮이기 시작하는 하늘을 쳐다본 후 병원 앞 큰길을 바라 보는 듯 싶었다. 그리고 옆에 미숙에게 무엇인가를 간단하게 물었으며, 미숙이가 한참 동안 길게 설명하는 것 같았다. 경옥은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 되찾은 듯한 얼굴로 병원 앞을 건너다보았다. 그녀 는 얼핏 김원철이 타고 있는 자동차도 스쳐보는 듯싶었다. 그러다가는 천천히 어둠에 묻혀 가는 주위를 살피며 계단을 내려왔다. 경옥 모녀가 계단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 김원철은 차에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경옥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경옥이가 계단을 다 내려와서 큰길의 건널목 쪽으로 몸을 돌려세 우려다 말고 그 자리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경옥이와 미숙이가 동시에 김원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아빠!" 미숙이가 먼저 소리쳤다. 김원철은 경옥이 옆으로 다가갔다. "내가 보여?" 김원철이 굳은 표정으로 경옥의 눈을 들여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경옥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마주본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엄만 잘 보인대요." 미숙이가 대신 말해 주었다. 경옥은 오랫동안 눈을 꿈적거리며 김원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눈물 위에 어둠이 서서히 내려덮이고 있었다. 때문에 김원철은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볼 수가 없었다. "축하해. 병원에 들어가려다가 당신한테 충격을 줄까 싶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김원철이 여전히 조심스럽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집에 돌아가서 안정을 취하라고 하셨어요." 미숙이가 엄마의 팔을 잡아끌며 말해다. "그래, 엄마를 차에 태워라." 김원철이 미숙에게 말했다. 미숙은 엄마를 차에 태우기 위해 자동차 가까이로 그녀를 부축 해 내려갔다. 경옥은 잠시 망설였다. 미숙이가 자동차의 뒷문을 열고, "엄마, 어서 타." 하고 재촉을 했을 때도 그녀는 꼿꼿하게 서 있기만 하였다. "왜 그러고 서 있어. 어서 타지 않고." 김원철이 경옥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경옥은 차에 오를 생각을 않고 어둠에 묻 혀가는 거리를 바라보고 서 있기만 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짧게 감탄을 토해 내고 있었다. 아, 아름다운 밤이로구나. 차가운 바람조차도 향기롭구나. 눈이 왔으면 더 좋았을 것을. 내일 아침에는 새벽에 일어나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구경해야지. 밤바다를 구경할 수 있을까? 그 녀는 혼자 마음속으로 말을 하며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엄마, 집에 안 갈 거야?" 미숙이가 차 안으로 밀어넣다시피 해서야 그녀는 허리를 구부리고 자동차 뒷자석에 올랐 다. 경옥은 차에 올라서도 계속 차창 밖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병원에서 나오기 전에 미숙 이를 그렇게 되작거려 뜯어보았었다. 진찰실에서 붕대를 풀고 한참 동안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경옥은 그녀 앞에 감격 하여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서 있는 미숙이를 발견하고 와락 끌어안았었다. 그리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고 말았다. 그녀는 한바탕 울고 나서 미숙을 불빛 아래로 끌고 가, 딸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되작거려 뜯어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네가 미숙이가 틀림없니?" 하고 물었다. 경옥이 병원 밖으로 나와서 맨 처음 본 것은 어둠의 점액질이 출렁이고 있는 해넘이 무렵 의 하늘이었다. 그녀는 맨 처음 미숙의 얼굴을, 다음으로 하늘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밤마 다 온몸으로 몸부림치듯 울어대, 그녀를 잠 못 들게 보채는 겨울 바다도 눈이 시리도록 보 고 싶었다. 김원철은 서서히 차를 몰았다. 그는 자동차 안에 달린 룸미러를 통해 창밖의 광경에 도취 해 있는 경옥을 훔쳐보았다. 김원철이 생각하기에 그녀는, 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듯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경옥에 대해서 불만은 없었다. "미숙아, 바다가 여기서 가깝니?" 병원을 떠나 5분쯤 달렸을 때 경옥이가 뚜벅 물었다. 김원철은 그녀가 자신에게 묻지 않은 것이 약간 서운하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나와서 아직 김원철이 묻는 말에 대답조 차 하지 않았다. "왜? 바다가 보고 싶어?" 미숙이가 물었다. "어두워서 안 보일까?" 경옥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는 몇 번이고 김원철에게 바다가 보일 만한 곳으로 데 려다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으나, 말이 혀끝에서만 맴돌았다. 그녀는 밤바다를 보고 싶었다. "집에 가는 길에 잠시 태종대에 들렀다가 가지 뭐." 김원철이 경옥을 돌아다보며 말했을 때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빠, 시간 있어요?" "시간? 시간이야 있지." 김원철은 얼핏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미 가족들과 만날 시간이 지났다. 그렇다고 그 는 경옥이 모녀를 남겨둔 채 가족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경옥이가 눈을 뜬 오늘 만이라도 그들 모녀 곁에 오래 있어주고 싶었다. 그는 태종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거리는 이미 어둠 속에 깊숙이 파묻혀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 불빛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경옥은 거리의 불빛들을 놓치지 않고 오래도록 붙들고 보고 있었다. "엄마, 한꺼번에 너무 많이 보지 말어. 앞으로 얼마든지 불 수 있으니까 천천히 봐. 한꺼번 에 많이 보았다가 눈이 피로해지면 어쩌려구 그래!" 미숙이는 엄마가 잠시도 쉬지 않고 창밖의 광경들에 시선을 팽팽하게 던지고 있는 것에 은 근히 불안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엄마, 태종대에 도착할 때까지라도 눈을 좀 감고 있으세요." 그러면서 미숙이는 손바닥을 펴서 경옥의 눈을 가렸다. "그래 알았다. 알았으니 손을 좀 치워라. 이렇게 눈을 감고 있을게." 경옥은 상반신을 자빠듬히 뒤로 젖히고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이 광경을 거울로 비쳐본 김원철은 빙긋이 웃었다. 세 사람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경옥은 오랫동안 그렇게 상반신을 뒤로 젖힌 채 눈을 감고 어슷하게 앉아 있었고, 미숙은 옆에서 그런 엄마를 감격적인 표정 으로 들여다보았다. "바다 가까이 왔나 보다." 잠자코 있던 경옥이가 눈을 뜨고 똑바로 일어나 앉으며 소리쳤다. 그녀는 아슴하게 들려오 는 파도 소리와 함께 비릿한 갯내음을 맡은 것이었다. 경옥의 말대로 자동차가 태종대 입고로 휘어들었다. 미숙이와 김원철도 태종대에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어지만, 경옥이를 잠시라도 더 쉬게 하려고 그것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 다. "바다로구나. 바다 냄새가 나는구나." 다시 경옥이가 밖을 내다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아직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다 같 이 짭짤한 갯내음을 맡고 있었다. 경옥은 거듭 바다 냄새가 난다면서 코를 킁킁거렸다. "아직은 바다가 보이지 않지?" 차를 몰던 김원철이 미숙에게 물었다. "글쎄요. 밖이 어두워서요. 아직은 안 보이는 것 같아요." 미숙이 차창 밖을 두리번거리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김원철은 속력을 빨리 했다. 경옥에게 바다를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문득 그녀와 함께 처음으로 바다를 구경했던 때가 생각났다. 경옥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의 여름이었다. 김원철은 경옥에게 바다 구경을 시켜주기 위해 석 달 동안 신문배달을 했었다. 그렇게 해 서 돈을 마련한 그는, 새벽에 경옥이와 함께 헌털뱅이 버스에 올랐다. 그들이 찾아갔던 곳은 여수 오동도였다. 처음으로 바다를 본 경옥은 너무 감격하여 한동안 할말을 잃고 우두커니 바다에 취해 있었다. 그녀는 바다가 알몸으로 운다는 말을 하였다. 바다가 너무 슬퍼서 하늘을 통째로 안고 몸 부림치며 울고 싶다고 하였다. 그녀는 바다를 처음 보던 날, 바다를 내용으로 한 노래를 수 도 없이 흥얼거렸었다. "보인다., 저기 검은 바다가 보인다." 경옥이가 소리쳤다. 그녀는 그렇게 소리치고 나서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음을 의식했음 인지 잠시 조용했다. 태종대 앞바다가 어둠 속에서 뒤척이는 모습이 보였다. 김원철은 태종 대 모자상 앞에 잠시 차를 멈추었다. "그냥 차 안에서 바라보기만 해. 언제고 낮에 다시 한번 오기로 하고." 경옥이가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김원철이 말했다. 그녀는 내릴 것을 포기하고 자동차의 창 을 내렸다. 김원철은 서서히 차를 몰아 태종대를 한 바퀴 돌아 경옥이 모녀가 살고 있는 동네로 향했 다. 집으로 가는 도중 김원철은 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자고 하였으나, 경옥이가 싫다고 하여 곧장 그들의 집으로 직행하였다. 그는 그들 모녀를 집에까지 실어다주고 이내 차를 돌렸다. 경옥이 쪽에서 김원철과 같이 있기를 원하지 않은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이 날따라 경옥은 유별나게 김원철을 냉엄하게 대했다. 경옥이 모녀가 병원에서 집에 돌아오자 큰방 주인 식구들을 비롯해 이웃 아낙들과 아이들 이 몰려와서 눈을 뜬 경옥이를 구경하였다. 그들은 저마다 축하의 말을 한마디씩 하였다. "미숙이 엄마, 내가 누구인 줄 알겠능교? 어디 한번 알아맞혀 보이소." 이웃 아낙들은 경욱이 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물었다. "앞집 영미 어머니로군요. 그렇지요?" 경옥은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녀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수가 있었다. 경옥 은 목소리와 얼굴을 일치시켜 가면서, 자기가 누구냐고 묻는 사람마다 정확히 알아맞혔다. 그녀는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정확하게 알아맞혔다. "어디 우리 미숙이 얼굴 다시 한번 똑똑히 보자." 이웃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후, 경옥은 전등 가까이에 미숙의 얼굴을 대고 이목구비를 다 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본 후, 그녀는 미숙이 영락없이 어렸을 때 경옥이 자신을 그대로 빼 다박은 듯이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경옥은 그러고 너서 미숙에게 그녀의 앨범을 가져오게 하여, 퇴색한 자신의 옛날 사진들을 꺼내놓고 미숙의 얼굴을 비교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들 모녀는 서로 부둥켜안고 오랫동안 울었다. 모녀는 온몸의 물기를 쥐어짜듯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엄마 그만 울어. 의사 선생님이 안정을 취하라고 하셨잖아." 미숙이가 먼저 울음을 멎고 말하였다. "그래 알았다. 너도 그만 울어라." 경옥은 딸의 등을 토닥거리며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우리 울지 않기로 해." "그래, 울지 않기로 하자. 지금까지 너무 많이 울었으니까, 이제 부터는 울지 않기로 하자." 그러면서도 경옥은 다시 딸을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다. "울지 않기로 해놓구선 " 미숙이는 울음을 참느라고 어금니를 앙다물고 눈심지를 빳빳하게 세우며 말했다. "그래 그래, 울지 않으마." "울지 않겠다고 하구선 또 우네." 그러면서 미숙은 벽에 걸린 수건으로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고 너서 전등을 껐다. 그러나 경옥은 어둠 속에도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훌쩍거렸다. 그들 모녀는 자리에 나란히 누워서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비벼댔다. 눈물 때문에 그들의 얼굴이 질컥하게 젖었다. 그들 모녀는 자는 척 숨소리를 거칠게 내뿜었다. 경옥은 딸이 잠든 줄 알고 다시 울 기 시작했다. 다음날 경옥은 미명이 밝아오기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파도 소리를 듣고 눈을 뜨자 분홍 빛 커튼이 한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그녀를 깨워준 것은 파도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 그녀 의 아침을 열어준 것은 분홍빛의 커튼이었다. 경옥은 몽유병 환자처럼 천천히 일어서서 분 홍빛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 앞집의 파란 슬레이트 지붕이 보이고, 그 지붕 위로 젖빛 겨울 하늘이 끝없이 열 려 있었다. 경옥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비롭기만 하였다. 앞집의 블록담 옆에 앙상한 모습으로 서 있는 오동나무까지도 신비로운 존재로 보였다. 그녀는 예전에 많은 나무들과 일상적인 하늘을 얼마든지 눈이 시리도록 보았었지만, 그것들이 신비로운 존재로 느껴지지 는 않았었다. 그러나 12년 만에 다시 눈을 뜬 지금, 그녀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눈을 감고 꾼 꿈속 의 세상처럼 신비롭기만 했다. 경옥은 분홍빛 커튼의 빛깔을 되작거려 살펴보고, 또 그것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였다. 미숙이의 냄새가 났다. 미숙이의 아름답고 착한 마음 씨가 커튼의 빛깔 속에 스며든 것처럼 향기롭게 빛났다. 경옥은 조용히 소리나지 않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아무도 없이 고즈넉하게 가라앉아 있는 새벽의 마당 한가운데 서서,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는 하늘을 보았다. 그의 눈 이 뜨이는 순간처럼 그렇게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눈뜸과 함께 신비롭게 열 리고 있는 하늘을 향해 감사하는 마음을 보냈다. 그녀는 얼마 동안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당 한가운데 서 있다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 도 뿌유스름한 새벽빛으로 밝아왔다. 그 밝아오는 새벽의 빛이 비록 가난하지만 정갈하게 정돈된 부엌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밥그릇 하나 숟가락 하나에서 미숙이의 아름답고 사 랑스러운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미숙이가 일어나기 전에 아침밥을 짓고 싶었다. 밥솥에 쌀을 안치고 가스 레인지에 불을 당겼다. 그 하나하나가 감격스럽기만 하였다. 감격스러움에 자꾸만 눈물이 쏟 아지려고 하였다. 경옥은 밥을 짓고 국을 끓인 후에 반찬을 준비하고 나서 미숙이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미숙이가 놀라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아침상을 차렸다. 그녀는 딸에게 처음으로 밥상을 차린다는 사실이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숙은 날이 훤하게 밝아 온 후에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경옥은 미숙이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며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12년 만에 보는 찬란한 아침 햇살에 눈이 부서, 잠시 손바닥으로 눈썹 차양을 만들어 눈을 가렸 다. 처음에는 너무 눈이 부셨기 때문에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었으나 차츰 익숙해지자 눈썹 차양을 내렸다. 경옥은 그러게 눈부신 아침을 오랜만에 맞았다. 그때 미숙이가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들어서다 말고 경옥이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미숙은 엄마가 눈을 떴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 뭘 하세요?" 미숙은 엄마가 눈을 떴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아침밥을 짓기 위해 부엌으로 발을 들여놓다 말고 소스라치듯 소리쳤다. "이제 일어났니? 어서 세수하고 밥 먹어야지. 엄마가 밥상을 들고 들어갈 테니 세수하고 들어오너라." 미숙은 엄마의 그 말에 우두커니 그 자리에 쇠말뚝처럼 서 있기만 하였다. 미숙은 엄마의 그 소리가 마치 꿈속에서 들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왜 그렇게 넋을 잃고 서 있기만 하니? 어서 세수하라는데도." 경옥이가 미숙이를 밉지 않은 목소리로 다그쳐서야, "참 엄마가 눈을 떴지." 하고는 얼굴의 긴장감을 풀면서 아침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 나서 미숙은 엄마 가 까이 다가가서 까치발을 하고는 경옥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도 나는 깜짝 놀랐지 뭐야? 우리 엄마가 눈을 떴지. 그렇지?" "그래, 아침 해가 떠오른 것도 봤단다. 그리고 아침밥도 지어놓고 " 경옥은 손으로 딸의 얼굴을 감싸안으며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녀는 울지 않 았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그 눈부신 순간을 맞으면서부터, 그녀는 이제 미숙이 앞에서 눈물 을 보이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이제 그녀의 가슴 속에는 슬픔 대신에 햇덩이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감격적인 새 출발의 희망만이 넘치고 있을 뿐이다. "엄마가 밥상 들고 들어갈 테니 어서 세수하거라." 경옥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녀는 그 말을 열 번 스무번이라도 되풀이하여 말하고 싶었다. 그 동안 그 말이 얼마나 하고 싶었었는지 몰랐다. "알았어요. 세수하고 들어갈게. 근데 아침 반찬은 뭐예요?" 미숙이도 엄마에게 그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몰랐다. 그 때문에 미숙은, 아침 반찬은 뭐예요? 하는 말에 투정을 부리듯 큰 소리로 물었다. "응, 오늘 아침에는 미역국을 끓였단다." 경옥도 역시 큰 소리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왜 미역국을 끓였어요? 오늘이 누구 생일이에요?" "응, 오늘 엄마가 십이 년 만에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거든. 그리고 또 엄마가 우리 미숙 이한테 첨으로 밥을 해먹이는 날이고 " 경옥은 미숙을 보며 밝게 웃었다. 미숙은 비로소 처음으로 엄마가 그렇게 화사하게 웃는 모습을 불 수가 있었다. 엄마가 밝게 웃는 모습은 이 세상의 어떤 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밥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앉은 경옥이 모녀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미 숙은 어머니가 손수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어먹는 모습을 보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 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미숙은 엄마에게 일일이 어디에 무슨 반찬이 놓여 있는가를 알려주거 나, 김치는 오른쪽 국그릇 옆에 놓고 마늘장아찌는 밥그릇 앞에 놓아야만 했었다. 그런데 오 늘 아침은 엄마가 직접 상을 차리기까지 하였다. 미숙은 이제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설령 아빠가 그들을 버리게 된다 할지라고 슬프지 않을 것 같았다. "엄마, 어서 들어요." "그래, 먹자." 두 사람은 똑같이 성호를 긋고 나서 숟가락을 집어들었다. 미숙은 숟가락을 들고도 엄마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그러고 있니?" "엄마, 어서 드셔요. 엄마가 지은 밥이에요." 미숙은 시울이 크렁하게 젖은 눈으로 엄마를 보며 말했다. "그래, 엄마가 우리 미숙이한테 처음으로 지어준 밥인데 반찬이 말이 아니구나." 경옥은 미숙의 눈물을 보지 않으려고 밥상의 반찬들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반찬이라고 해 야 멸치를 넣고 끓인 미역국에 배추김치, 멸치볶음, 마늘장아찌가 전부였다. "오늘 저녁에는 엄마가 고깃국을 끓여줄게. 아침은 그냥 미역국에 말아먹자." 그러면서 경옥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거푸 숟가락질을 하였다. 그녀는 목이 칵 메어와서 밥을 삼키기가 힘들었지만, 미숙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억지로 밥알을 씹어 삼켰다. 미숙이도 크렁하게 젖은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면서 밥을 떠넣었다. "엄마가 해주신 밥이라서 그런지 맛이 있어요." 미숙이가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미숙은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자신 이 울음을 터뜨리게 되면 엄마가 밥을 못 먹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눈을 뜨시게 되어서 아빠도 좋으신가 봐." 밥을 먹다 말고 미숙은 불현 듯 아빠 생각이 나서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자 경옥은 숟가락 을 든 채 음울한 표정으로 미숙을 바라보더니, "우리 아빠 이야기는 안 하기로 하자." 고 냉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저께 아빤 병원에 들어오시고 싶어했어요. 그런데도 내가 말렸어요. 엄마하고 약속했다 고 말씀드렸어요." 미숙은 엄마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경옥은 딸의 말에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이제 미숙이 아빠를 자유스럽게 놓아주어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녀가 개안 수술을 하겠다고 한 것도 김원철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개안은 바로 김원철의 자유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김원철을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운명은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김원철 때문이 아닌 것 이었다. "미숙아." 경옥은 밥숟갈을 든 채 미숙이를 보았다. "왜? 엄마 왜 그래?" 미숙은 경욱이가 자기 이름을 불러놓고 무슨 말인가 할 듯 말 듯 여짓거리고만 있자 팽팽 한 시선으로 엄마를 마주보았다. "너 말이다, 아빠와 같이 사는 것이 좋으니, 엄마가 눈을 뜬 것이 더 좋으니?" 경옥은 그렇게 묻고 나서 곧 후회하였다. 겨우 열두 살 된 딸에게 그런 말을 묻고 있는 자 신이 한심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런 질문이 어디 있어?" 경옥이가 생각했던 대로 미숙이는 입을 비쭉거리며 가볍게 반발하였다. "엄마가 눈을 뜨지 못한 상태로 아빠와 같이 사는 것이 좋으니, 아빠가 없더라도 엄마가 눈을 뜨는 것이 더 좋으니?" 경옥은 잔인하게도 미숙에게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빤 어차피 우리하고 같이 살 수가 없잖아요." 미숙이가 희미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아빠하고 함께 사는 것보다는 엄마가 눈을 뜨는 게 더 좋단 말이지?" "엄마, 그건 왜 갑자기 물어?" "우리 말이다, 이제 아빠를 놓아주자. 미숙이도 이제 다 컸으니까 아빠 없이 살 수 있겠지? 엄마하고 둘이서만 살 수 있겠지?" "아빠가 우릴 버리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요?" "아니다. 아빠가 어떻게 미숙이를 버리시겠니. 미숙이를 아빠가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럼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미숙은 앙탈을 부리듯 말하며 숟가락을 상 위에 놓았다. 경옥이가 딸의 손에 숟가락을 쥐 어주며 밥을 더 먹으라고 하였으나, 미숙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냥 지금 이대로 살면 되잖아요. 아빤 일주일에 한 번씩만 오시면 되잖아요. 난 일주일에 한 번씩만 아빠를 만나도 괜찮아요." 미숙이가 갑자기 울면서 말했다. 경옥은 아침을 먹고 나서 미숙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는 시력 검사를 하고 안경을 맞추어주었다. 안경을 쓰자 훨씬 잘 보였다. 미숙은 경옥의 안경 쓴 모습을 보고 한 참 동안 깔깔거리고 웃었다. "엄마, 안경 쓰니까 우리 학교 교감 선생님 같아요." 미숙은 그러면서 경옥의 검은테 안경을 벗겨 자신이 쓰고는 뒷짐을 지고 헛기침을 큼큼 해 대는 것이었다. 경옥은 그런 미숙을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병원을 나오자 김원철이 차를 세워놓고 그들 모녀를 기다기고 있었다. 경옥은 김원철을 발 견하고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미숙을 찔벅거렸다. "아빠가 웬일일까?" 미숙이도 놀란 얼굴을 하고 아빠 쪽으로 달려갔다. "웬일이세요, 아빠? 병원에 안 나가셨어요?" "그래. 오늘은 쉬기로 했다." 김원철은 그렇게 말하며 안경을 끼고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경옥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 다. 그는 문득 자신이 10여 년 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안경을 쓰니까 잘 어울리는데 그래." 김원철은 경옥에게 말했다. 경옥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여긴 웬일이세요?" 하고 물었다. "오늘은 우리 셋이 함께 있고 싶어서 병원을 하루 쉬기로 했어." 김원철도 웃는 얼굴로 경옥이와 미숙이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경옥과 미숙은 어쩐 지 뜨악한 표정으로 김원철을 보았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들 모녀는 김 원철의 예기치 않은 호의에 오히려 부담감을 느낀 것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지금껏 김원철 로부터 그런 호의를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직 셋이서 함께 집 밖에 나가본 일이 없었다. 언제나 둘이었다. 미숙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그들이 성 당에서 영세를 받았을 때도 둘뿐이었다.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나 그들 모 녀만이 기쁨을 나누고 서로 위로를 주고받았다. 김원철은 마치 그들 모녀의 방 사진틀 속에 들어있는 사진처럼 언제나 먼 거리에 있었다. 조금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서 서로 바라보 고만 있었다. "자, 어서 차에 타지 않고 뭘 해?" 김원철이 미숙이와 경옥을 번걸아보며 재촉했다. 그들 모녀는 여전히 뜨악한 기분으로 차 에 올랐다. 그들은 차에 올라서도 말이 없었다. "어디로 가세요?" 차가 병원을 떠나 한참이나 달린 후에서야 미숙이가 물었다. "글세, 어디로 갈까?" 김원철이 모녀를 돌아보며 되물었을 때, 미숙은 대답을 못하고 엄마를 보았다. "어제 바다를 보고 싶다고 했었지?" 모녀가 서로 얼굴만 마주보고 대답을 하지 않자, 김원철이 경옥을 돌아보며 물었다. "태종대에 갔었잖아요." 미숙이가 경옥이 대신 말했다. "그건 밤바다였었지. 바다는 햇빛에 눈이 부시는 대낮에 봐야 그 빛깔을 제대로 감상할 수 가 있는 게야. 햇빛 속에 부서지는 파도의 희고 날카로운 이빨을 제대로 봐야지. 겨울 바다 의 파도는 제재소의 둥근 톱날 같단다. 미숙이는 바다를 보면 뭘 느끼느냐?" 김원철이 차를 몰면서 물었다. 어쩌면 그것은 경옥이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 던진 질문이었 는지도 모른다. "전 바다를 불 때마다 춤을 추고 싶어져요./?" 미숙이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춤을 추고 싶다고?" 그렇게 되물으면서 김원철은 경옥이가 여고 시절에 처음 바다를 보고, 그것을 통째로 끌 어안고 싶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혼자 마음속으로 쿡 웃었다. 춤을 추고 싶다고 한 말 이나 끌어안고 싶다는 말의 의미가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춤을 추고 싶다니 왜 그렇지?" 김원철이 다시 물었다. 다시 물으면서 그는 얼핏 경옥을 돌아다보았다. "모르겠어요. 그냥 바다를 보면 괜히 마음이 울렁거리거든요." 미숙의 그 말에 김원철은 다시 쿡 웃었다. 자동차는 어느덧 시가지를 완전히 빠져나가 해 운대 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자 경옥은 차창의 유리를 내리고 시선을 멀리 던졌다. 찬바람이 묶음으로 몰아 쳐왔다. 바다가 눈앞에 야청 빛깔로 다가왔다. 그러나 경옥은 어제 태종대에서 처음 보았을 때처럼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도 감탄사를 토해 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다만 말없이 먼 시선 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김원철은 해운대에 이르자 천천히 차를 몰아 극동호텔 앞까지 갔다가, 다시 조선비치호텔 쪽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비치호텔 양식부로 들어갔다. 경옥과 미숙은 화려한 호텔의 식당 분위기에 압도당한 듯 주눅이 든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모녀는 두렷두렷 주변을 살펴보면 서 연신 놀라움의 시선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미숙이 뭘 먹고 싶으냐? 오늘은 뭐든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거라. 아빠가 사줄 테니 까." 김원철이 미숙이와 경옥을 보면서 물었으나 그들 모녀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 뭐 먹을까?" 미숙이가 경옥에게 무엇을 먹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경옥은 한동안 대답을 못하고 멀뚱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 그녀로서는 식당의 으리으리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무슨 음식을 시 켜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경옥으로서는 설렁탕이나 곰탕 같은 것을 먹는 것이 가장 마 음이 편할 듯싶었으나, 이런 고급 식당에서 그런 음식을 주문했다가는 망신을 살 것만 같아 입도 벙긋 못하고 김원철이 그녀를 도와주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경옥이 지금까지 먹어본 양식이라야 기껏 햄버그 스테이크나 돈가스가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김원철이 대학에 다닐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경옥은 문득 김원철이 그녀 에게 돈가스를 사주었던 일이 마치 꿈속에서처럼 까마득하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지금도 김 원철이 처음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던 '설원'이라는 그 양식집의 분위기와 그녀의 마음 을 흥건히 녹여주었던 음악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후 김원철은 그녀가 여고를 졸업하던 날, 두 번째로 양식집에 데리고 가 비프가스를 사주었었다. "엄마, 뭘 먹어?" 미숙이가 상반신을 흔들며 칭얼대듯 물었다. "나? 나는 돈가스" 경옥은 잦아 들어가는 목소리로 김원철을 보면서 말했다. "돈가스?" "그래. 난 돈가스가 젤로 맛있더라." 경옥은 여전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김원철을 따라 처음으로 양식 집에 갔을 때, 그에게서 포크와 나이프 잡는 법을 따라 배우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김원철의 말을 무시하고, 오른손에 포크 하나만을 들고 양식을 먹었었다. 그녀는 그 때의 일이 생각나서 마음속으로 피식 웃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뷔페를 먹지." 김원철이 경옥이와 미숙이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경옥은 뷔페라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어도 그 음식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몰라, 다시 멀뚱한 시선으로 김원철을 바라보았다. "뷔페 맛있어?" 미숙이가 다시 경옥에게 물었다. "먹어보면 알아." 경옥은 똑같은 대답을 하였다. "그럼 다 같이 뷔페로 하자." 한참 후에야 김원철은 미숙에게 말했다. 잠시 후 경옥이와 미숙은 김원철을 따라 큰 접시를 들고 음식들을 차례로 퍼담아서 식탁으 로 돌아왔다. 김원철은 미숙이의 음식 접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음식을 접시에 넘칠 만큼 퍼담아왔기 때문이다. 미숙이뿐만 아니라 경옥이의 접시도 가득했다. "미숙이 너, 그 많은 음식을 다 먹을 수 있겠어?" 김원철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모녀를 보며 물었다. 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쯤 얼 마든지 먹어치울 수가 있다는 표정이었다. "더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갖다 먹어도 된단다. 그러나 가져온 음식을 남겨서는 안 되지." 김원철이 미숙에게 말했다. "더 갖다 먹어도 괜찮아요? 돈을 더 내는 거 아니예요?" 미숙이 큰 그릇에 음식이 가득가득 담겨 있는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단다. 그러니 마음놓고 더 먹고 싶으면 더 가져다가 먹어라. 그 대신 음식을 남겨서는 안 된다고 했지?" "그건 걱정 마세요." 그러면서 미숙은 손으로 갈비찜을 들고 뜯기 시작했다. 경옥이 포크를 사용하라고 나지막 한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미숙이와 경옥이의 접시에는 거의가 쇠고기와 닭고기로 만든 기름 진 음식들이었고, 김원철의 접시에는 생선과 야채뿐이었다. 그리고 미숙이와 경옥이의 접시 에 비해서 반도 안 되는 음식이었다. 경옥이는 김원철의 접시와 자신의 접시를 비교해 보고 나서, 그녀 자신의 접시가 너무 가득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빠는 왜 그렇게 쪼끔만 가져왔어요? 음식을 쪼끔 가져오면 값이 더 싸나요?" 미숙이도 김원철의 접시를 여러 번 들여다보고 나서 물었다. "값은 마찬가지란다." 김원철이 음식을 많이 먹으나 적게 먹으나 값은 똑같다는 말을 하자 미숙은 신기하다는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레스토랑 안에 있는 음식들을 모두 먹어치우기라도 할 것처럼 먹을 탐을 부렸다. 미숙은 불따구니가 미어지도록 꾸역꾸역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경옥이 딸의 옆구리를 찔벅거리며 천천히 먹으라고 눈짓을 하였다. 미숙은 경옥 이가 접시에 담아온 음식을 반쯤 먹고 있을 때, 접시를 비우고 나서는 여자아이답지 않게 황소 트림을 토해 냈다. 그러고 너서도 한사코 경옥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는데, 경옥은 미 숙이가 음식을 더 먹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끔적거리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엄마는 배가 불러서 더 못 먹겠다." 경옥은 포크를 놓으며 미숙을 보았다. "남은 거 내가 먹어도 괜찮지?" 미숙은 그러면서 경옥이의 접시를 끌어당겼다. 김원철은 미숙의 식성에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경옥은 안쓰러운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 동안 마음놓고 고기 한번 제대로 먹이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결렸던 것이다. 미숙이가 놀랄 만큼 많은 양의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이렇듯 아빠인 김원철과 엄마인 경옥의 입장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미숙은 경옥이가 남긴 음식까지 다 먹어치우고 너서는 김원철이 후식을 가져오자, 다시 아 빠를 따라가 엄청난 양의 케이크를 가져와 먹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먹어도 배탈이 안 날까?" 김원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숙이와 경옥이를 보면서 말했다. 그러나 경옥은 김원철의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여태껏 미숙이한테 맛있는 음식을 마 음놓고 먹을수 있도록 해주지 못했던 죄책감 때문에 기분이 울적했다. "걱정 말아요. 제가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배탈 난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미숙이가 말했다. 딸의 그 말에 경옥은 가슴이 더욱 아팠다. "그래요, 미숙이는 아직 음식을 많이 먹어서 배탈 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늘 허기가 쳐 있었으니까요." 경옥이도 김원철에게 원망하는 투로 퉁겨댔다. 몰론 미숙이가 그 동안 허기가 질 정도로 굶주려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마음놓고 아이스크림 한번 사먹이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뷔페를 나온 김원철은 경옥이 모녀를 다시 차에 태워 시내로 나가 백화점에 들렀다. 백화 점에서 그는 경옥이와 미숙에게 옷 한 벌씩을 사주었다. 경옥은 사양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 속으로 이것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때문에 뷔페도 먹어보고 옷도 생기고 정말 고마워요." 백화점에서 나오면서 미숙이가 경옥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왜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저분은 네 아빠가 아니냐?" 경옥이는 미숙이가 아빠보다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아빠는 여태껏 나를 위해 옷을 사주시지도, 맛있는 음식을 사주시지도 않았잖아 요. 그냥 돈으로 주셨잖아요." 미숙이의 그 말은 옳았다. 아직 김원철은 미숙을 음식점에 데리고 가준 일도, 백화점에 데 리고 가서 옷을 사준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다만 옷값과 생활비를 대주었을 뿐이었다. "그야 아빠가 늘 바쁘시니까 그러신 거지." 경옥이는 좋은 말로 미숙을 달랬다. 그녀는 미숙으로 하여금 아빠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 게 하고 싶지 않았다. 김원철로서는 처음으로 그들 모녀에게 각별한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고 났을 때 그의 기분은 오랫동안 부담감을 느껴온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빚을 갚은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어쩌면 그는 눈을 뜬 경옥이가 조금은 두렵게 생각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녀에게 처음으로 친절을 베푼 것은 그 두려움에 대한 예방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숙이 먼저 집에 들어가 있거라. 엄마는 아빠하고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자동차가 집으로 휘어드는 골목 어귀에 이르렀을 때, 경옥이가 김원철에게 차를 세우게 하 고 말했다. 눈치 빠른 미숙은 알겠다고 머리를 끄덕이며 먼저 차에서 내리더니 아빠, 오늘 고마웠어요, 하고 빙긋 웃으며 큰 소리로 말하고는 혼자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삼십 분만 시간을 좀 내주시겠어요?" 미숙이가 골목 안으로 사라지자 경옥은 김원철에게 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김원 철은 경옥이가 그에게 엉뚱한 것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뜨끔했다. 그 는 차를 몰아 큰길로 나가서 카페 간판이 붙은 자그마한 빌딩 앞에 이르렀다. "차라도 한잔 할까?" 김원철이 차를 세우고 물었다. "그래요. 시간만 괜찮으시다면요." 경옥은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김원철을 따라 2층 카페로 올라갔다. 그들은 창 옆 구석자리에 마주앉았다. 김원철 과 마주앉자 그녀는 기분이 이상했다. 자꾸만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한동안 그들은 말이 없 었다. "미숙이가 아주 좋아하는 것 같구만." 김원철은 턱짓으로 종업원을 불러 옛날에도 그랬듯이, 그녀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일 방적으로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나서 먼저 입을 열었다. 경옥은 대꾸하지 않고 무거운 눈 길로 그를 마주보았다. "부산을 떠나겠어요." 경옥은 김원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러나 결연하게 말했 다. "떠나다니?" 김원철이 다소 놀라움을 나타냈다. "아직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떠나기로 결심을 했어요. 이제부터는 내 힘으로 살아가고 싶어서 그래요." 경옥의 말에 김원철은 찻잔을 놓고는 말없이 창밖에 시선을 던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한 표정을 했다. "그렇다고 부산을 떠날 이유는 없지 않아?" 한참 후에야 김원철은 창밖에서 시선을 돌리고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시선으로 경옥을 보며 말했다. 경옥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김원철의 진의를 가늠해 보기라도 하려는 듯 말없 이 탐색적인 눈길을 던졌다. "부담을 주고 싶지가 않아서요." 경옥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말하였다. "부담이라니? 누가 누구에게 부담을 준다는 게야?" 김원철은 약간 화난 목소리였다. 경옥은 그가 일부러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숙이가 문제예요. 미숙이를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의견을 듣고 싶어요. 미숙은 원철 씨 딸이잖아요." 경옥이는 오랜만에 김원철이란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눈물이 솟구치려는 것을 느끼고 입 술을 꼬옥 깨물며 참았다. "처음에는 미숙이를 아빠한테 맡기고 떠날까 싶었으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미숙이와 헤 어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미숙이는 제가 데리고 가겠어요." 김원철은 거푸 담배만 피워 물었다. "그냥 부산에서 살도록 해. 내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어." 한참 후에야 김원철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경옥은 김원철의 그 말이 적어도 거짓 된 마음은 아니라는 것을 헤아릴 수가 있었다. 그녀는 김원철이 근본적으로 마음이 여린 사 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로는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타산적이기는 해도 본바탕의 마음 은 선하고 여린 데가 있는 남자였다. 그는 잔인한 광경을 보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었다. 어쩌면 그는 진심으로 경옥이 모녀를 그의 옆에 있게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만 약 경옥이 모녀가 그에게서 멀리 떠나 소식조차 끊겨버린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괴로 워하면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숙이 아빠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거예요. 그 동안 우리 때문에 당신이 얼마나 고통스 러워했는지 다 알고 있어요. 우리가 너무 큰 짐이 된 거지요.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 경옥은 김원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 말은 그녀의 진심이었다. 기실 그 녀가 눈을 뜨기로 작정했던 것도 김원철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을 뜨지 못한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김원철의 보호권안에서 떠나리라 생각하고 그 준비를 해오고 있었지 않았던가. 그런 경옥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홀가분하게, 그리고 자신만 만하게 김원철로부터 떠날 수가 있는 것이었다. "나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라고?" 김원철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경옥을 바라보았다. 김원철과 경옥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갑자기 두 사람은 처음 만남 사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경옥이도 김원철도 한결같이 아득한 거리감을 느꼈다. "다시 말하지만, 내 생각은 그냥 부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좋겠어. 자립을 하고 싶다고 했 는데, 그건 말리지 않을 테니 경옥이 생각대로 하라구. 그리고 내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지 주저하지 말고 도움을 청해 주었으면 해. 그러면 될 걸 굳이 부산을 떠날 필요는 없지 않아?" 한참 후에야 김원철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것은 김원철의 진심이기도 했다. 그러 잖아도 그는 경옥이 모녀에 대해서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 만약 그들 모녀가 그의 곁에서 멀리 떠나버린다면 그것은 그에게 괴로움만 더해 줄 터였다. "그 동안 경옥이나 미숙에게 내가 너무 소홀했던 것만은 사실이야.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 했다면 내가 잘못을 빌겠어." 김원철이 경옥이 쪽으로 상반신을 꺾어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 로 말했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경옥이 모녀가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서운한 생각은 없어요. 아무런 불편도 없구요. 늘 마음속으로 미안한 생각뿐이예요. 다 만... 다만..." 경옥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들어 김원철을 마주보았다. 잠시 두 사람의 눈길이 촉촉하게 엉키었다. 그러나 그 눈길은 이내 풀리고 말았다. 경옥은 김원철을 마주보자 자꾸만 옛날 일들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그녀에게 행복이 아니 라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마치 행복의 썩은 잔해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부산 에 머물러있는 동안에는 그 같은 기분에서 해방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녀는 김원철과의 지 난날을 아름다운 삶의 궤적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로부터 벗어나야 한 다고 생각했다. 과거를 아름답게 간직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김원철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은 것이었다. "이것만은 믿어주세요. 정말이지 아직 한 번도 미숙이 아빠를 원망해 보지 않았다는 것 말 이예요. 지금도 저의 사랑은 변함이 없어요. 그리고 그 사랑을 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간직 하고 싶은 생각도 변함이 없어요. 저는 사랑이 연민이나 동정으로 퇴색되는 것을 원하지 않 아요. 제가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강하고 꿋꿋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떠나려는 거예요." 경옥은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일어섰 다. 김원철은 경옥이가 일어선 후에도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아마 미숙이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거예요. 저도 그렇구요." 경옥은 그렇게 말하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계속) 작가 후기 고통스러운 가면의 삶에 대하여 소설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 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간단하게 해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은근히 마음속으로 고민을 하 게 마련이다. 내가 이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되풀이하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소설 쓰기가 점점 더 두려워지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나는 스스로의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구하지 못한 채, 나는 무엇 때문에 소설을 쓰는 가 하는 또 다른 의문 속으로 나 자신을 함몰시키고 만다. "소설이란 형식적으로는 산문으로 된 창조적 이야기이며, 창조적 삶의 내용을 보여줌으로 하여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생의 개안을 도와준다"라는 말만으로는 완전하지 가 않다. 그리고 나는 이 같은 말을 떠올릴 때마다, 과연 내 소설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 게 하기 위한 용기와 희망을 제공해 주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내가 소설을 쓰는 순간순간마다 소설의 사회적 기능이나 작가의 역사적 사명감 따위를 가 슴 깊이 새기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만 소설을 쓰는 동안 나 자신은 소설 속에 서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서, 내가 쓰는 소설 속의 인물들과 진실되고 진지하게 만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쓰는 소설 속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 면서, 기쁨보다는 끊임없는 고통과 번민을 겪게 되고, 또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애정 과 증오심을 동시에 느낀다. 작가는 결국 소설을 쓸 때마다 또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러나 행복한 삶 이 아닌 고통스러움으로 시작하여 고통스러움으로 끝나는 삶이다. 다만 소설을 완성하고 나 서야 회한의 긴 한숨과 함께 고통은 비로소 끝나게 되며, 새로운 고통의 삶을 다시 준비하 는 것이다. 이 소설의 원 제목은 '가면의 춤'이다. 오래 전에 부산일보에 연재한 소설로, 나름대로는 본 격소설과 대중서설의 벽을 허물어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썼다. 대중소설에서도 얼마든지 문학의 진정성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중소설에서도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보 여줄 수 있고, 개인의 삶을 사회문제로 확대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주변에는 '가면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오정매도 그 들 중의 하나다. 이 여인은 가면을 쓰고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살아가고 있다. 하나의 삶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여 양심을 속이지 않고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모습이 고, 또 하나의 삶은 현실적인 행복이라는 덫에 걸린 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면서 자신을 속이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어떤 모습이 진실이며 가면인지를 분간할 수 도 없게 된다. 그리고 어떤 삶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인지조차도 모르게 된 채, 행복의 덫 에 걸려 고통을 겪게 된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 오정매처럼 저마다 두 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 나의 삶은 자신의 운명대로 살아가는 진실한 모습을 갖고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이웃과 세상은 물론, 자신까지도 철저하게 속이고 배반하는 가면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본래의 자기 모습보다는 자신까지도 속이는 가면의 삶에 더 충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여 가면의 사회, 가면의 역사 속에서 우리들 모두 한데 어울려 정신없이 '가면의 춤'을 추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가면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들 자신이 가면을 쓰고 가면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이 고통스러운 가면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1998년 문순태